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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의 로맨티시즘,
영화 <타락천사>

'좋은 팀은 서로에 대한 감정이 없어야 한다'. 파트너 사이에서는 이성의 감정이 배제돼야 한다는 맥락으로 시작되는 영화 <타락천사>는 네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킬러 재민과 그의 파트너는 동업한지 155주가 지났지만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지민이 청부 살인을 하러 나간 사이, 파트너는 그가 없는 방을 치우면서 일거수 일투족을 알아낸다. 어찌됐든, 함께 한 시간,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에 머무르는 동안 정이 쌓이게 되는 그들. 하지만 둘은 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로를 그리워한다.


지민: 우린 서로 거리를 유지해왔지만, 그녀는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됐다.

지민과 파트너 사이에는 한 여자가 더 있다. 지민이 비 내리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펑키한 헤어스타일의 한 여자다. 짧은 만남이지만 지민에게 강렬히 이끌린 여자. 하지만, 만나고 사랑에 빠진 짧은 순간 만큼 이별의 속도도 빠르게 진행된다. 이 이별이 더욱 안타깝게 와닿는 이유는, 여자가 지민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비춰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민은 안다. 연이 아니라면 떠나보내는 것이 마땅함을.

여자: 내게 레인코트가 필요했을 때 그는 내 곁으로 돌아왔다. 난 매일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민: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건 소용 없는 일이다. 나는 그녀에게 그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그녀가 어서 목적지에 도착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길 바란다.

이들 로맨스에는, 재미있고도 현실적인 장면이 있다. 바로, 지민을 사랑하는 두 여자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스치는 장면이다. 일면식도 없는 그녀들이지만, 둘은 서로가 지민과 얽혀있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사랑하고 함께하면, 상대의 일거수 일투족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 영향 때문에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 두 여자가 스치는 장면은, 마치 필자가 그녀들 중 한 명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다른 남녀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남자 하지무는 다섯 살 때 파인애플 통조림을 잘못 먹은 후 말을 잃었다. 밤마다 주인 없는 상점에 무단 침입해 장사를 해오던 그는, 우연히 자신을 떠난 남자 때문에 힘들어하는 여자 '체리'를 만난다. 체리에게 생애 첫 사랑의 감정을 느낀 하지무는, 체리를 돕는다는 명목 하에 그녀 곁을 떠나지 않는다. 말 못하고 다소 괴팍한 방식으로 살아오던 하지무이지만, 그의 사랑 방식은 더할 나위 없이 지고지순했다. 옛 연인을 못 잊는 체리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하지무는, 언젠가는 체리가 과거의 남자를 잊을 것이라는 믿음을 희망으로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믿음은 그에만 그칠 뿐이었다.

하지만 하지무는, 짧고도 강렬한 사랑 덕분에 성장한다. 사랑의 대상 뿐 아니라, 아버지까지 잃은 하지무는 아이 같았던 자신의 과거에서 탈피해, 음식점에 취직해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무의 이야기를 통해, 만남과 이별은 많은 깨달음을 준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다.

<타락천사>를 포함한 왕가위 감독 작품들 속 인물들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헤어진 후에도 우연한 기회로 재회한다. 인연이란, 결코 나약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왕가위의 로맨티시즘은, 쉬이 이뤄질 수 없기에 안타깝고 애잔하다. 하지만, 시공간을 초월한 인연을 보여주기에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필자는, 왕가위의 '공기를 타고 흐르는 로맨스'를 사랑한다. 그 분위기를 한 번 경험해 본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결코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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