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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걸을수록 성장한다

잘 걷고, 또 걷는 걸 즐겨하지만, 그 행위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살았던 나는, 주말산책을 시작하면서부터 걷기가 주는 총체적인 이로움을 체감하게 됐다. 더불어,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라는 책과 만난 이후로는, 전달하는 메시지와 호흡하며 더욱 풍성한 걷기의 이로움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책은 니체, 칸트, 소로, 간디 등 걷기에 일가견있었던 인물들의 생활과 그들의 금언 및 책 속의 글귀들을 소개하면서 저자의 걷기에 대한 개인의 철학을 역설한다. 사실, 걷기에는 이렇다할 기술이 없다. 그저 한쪽 발을 다른 쪽 발 앞에 놓으면 된다. 그렇기에 저자는 걷기를 '아이들의 놀이'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이 단조로운 활동인 걷기를 통해 수많은 철학자들의 책이 등장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걷기는 사유의 활동이었으며 오솔길을 비롯한 산책로는 사유의 장소였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햇볕조차 들지 않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보다 걸으라고 조언했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만, 책을 읽어야만 비로소 사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야외에서, 특히 길 자체가 사색을 열어주는 고독한 산이나 바닷가에서 생각하고, 걷고, 뛰어오르고, 산을 오르고, 춤추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 야외 활동을 통해 사색을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능, 즉 습관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걷기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행위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있어 걷기는, 걸어가는 길은 '안'에서 '다른 안'으로 향하는 통로(복도)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이 아닌 이 책에서 등장하는 '걷기의 달인'들은 '안'이나 '미디어', '책'보다 걸을 수 있는 '길'을 더욱 찬미한다.


장자는 '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발은 그 자체로서 공간의 작은 부분에 속하지만 임무(걷는 것)는 이 세계의 공간을 연결하는 것' 그렇다. 큰 면적을 차지하지 않는 두 발로 우리는 거대한 행위, 세계와 개인을 연결하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책에서는 걷기의 태도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오랫동안 산책을 하다 보면 항상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때 또 다른 경치가 나타난다. 무진 애를 써서 높은 곳까지 올라간 우리의 몸이 돌아서는 순간 발밑에 드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혹은 길을 돌아서면 경치가 바뀌어 산맥이 나타난다. 장엄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도치된 전망에, 다른 것이 발견되는 최후의 탄성에, 새로운 풍경 같은 발견물의 비밀에, 그것에 동반되는 환희에 근거하여 많은 금언들이 만들어진다.(p. 40에서)' 우리는 풍경이 건네는 풍미와 색깔, 향기를 통해 몸의 활력을 얻는다.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자, 가자!' 라 외치던 랭보가 그토록 걷기에 '광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를 되새겨보자.


더불어, 필자가 존경하는 인물들 중 한 명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금언들을 자주 만나볼 수 있어서 더욱 애착도가 높아진 책. 2년 간 월든 호숫가 근처에 오두막집을 짓고 자급자족과 검소한 생활을 하며 오랜 산책을 즐긴 그의 이야기,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경고를 다시 만나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내면은 되레 가난해지는 이유는 왜일까. 예전보다 걸을 기회가 줄어서이지 않을까. 차체 속에 갇혀, 바쁜 업무를 처리하다보면 어느덧 하루가 지나가버리고 마는 현실. 우리는 자연이 주는 선물과 조우할 기회도 없으며,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좀처럼 걷지 않으려 한다. 자연을 벗 삼아 홀로 걸으며 사색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이로운 것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아마, 우리는 더욱 미쳐버리지 않을까.


오롯이 자기자신을 위한 시간, 온전한 자기를 발견하게 만들어주는 시간, 바로 걸을 때의 시간일 것이다. 책<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은 우리에게 걷기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자기성찰을 도모하는 인문학 서적이기도 하며,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실전서 역할도 한다. 심신의 건강 모두를 아우르는 걷기. 실천을 통해 성장의 길을 걷자!



[책 속의 한 줄]


오랫동안 산책을 하다 보면 항상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때 또 다른 경치가 나타난다.

무진 애를 써서 높은 곳까지 올라간 우리의 몸이 돌아서는 순간 발밑에 드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혹은 길을 돌아서면 경치가 바뀌어 산맥이 나타난다.

장엄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도치된 전망에, 다른 것이 발견되는 최후의 탄성에,

새로운 풍경 같은 발견물의 비밀에, 그것에 동반되는 환희에 근거하여 많은 금언들이 만들어진다.

-40쪽


천천히 숲길을 걸으며 자신에게 덧씌워진 인간의 사회적 가면을 문질러 벗겨내야 한다.

책 속에는 없는 원시적 인간의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

책은 자연에서 벗어나 문명화되었으며, 사회에 대한 애착으로 뒤덮인 인간에 대해서만 말하기 때문이다.

최초의 인간을 그려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오직 나무들과 동물들만을 벗 삼아 혼자 외롭게 오랫동안 산책하며 내 안에서 원초적 인간을 발견하고 또 발견해야 한다.

-113쪽


나는 걷기가 어린아이의 놀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날의 날씨와 태양의 광채, 나무의 크기, 푸른 하늘을 보며 감탄하는 것이 걷기다.

-127쪽


걷기는 차라리 걷는 사람이 참여한다고 느끼게 한다.

즉 식물과 광물, 동물을 내 안에서 느끼는 것이다.

-145쪽


나는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살아가는 순수한 정착민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키보드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린다. 그들 말에 따르면, 접속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에 접속되어 있다는 것인가? 시시각각 바뀌는 다양한 정보에, 다량 유통되는 이미지와 숫자에, 도표와 일람표에 접속되어 있다. 일을 마치고 나면 지하철과 기차를 탄다. 여전히 속도를 따진다. 시선은 휴대전화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화면을 살짝 터치하면 메시지들과 이미지들이 줄지어 지나간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린다. 이번에는 텔레비전을 본다. 또 다른 화면이 등장한다. 먼지를 일으키지도 않고 접촉도 하지 않는 그들은 도대체 어떤 차원에 사는 것인가. 태양도 비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그들이 사는 시간은 어떤 것인가. 이처럼 오솔길과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살다 보면 우리의 상황을 잊게 된다. 계절과 시간은 전혀 마모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 262, 263쪽


심지어는 필수품조차 없이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자연 요소에 맡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나면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더 이상 계산도 필요 없고, 자신감도 필요 없다.

그 대신 이 세계의 관대함에 대한 완전하고도 충만한 신뢰가 생겨난다.

돌들과 하늘, 땅, 나무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보조자가 되고 자연이 준 선물이 되고 무궁무진한 도움이 된다.

-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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