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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의 죽음

죽음은 아무리 경험해도 매번 낯설다. 2017년 10월 1일 오전 9시 40분. 외할머니가 사망했다.

외할머니의 죽음, 그 자체도 슬펐지만 나는 나의 엄마의 슬픔이 더 안타까웠다. 친할머니의 장례 당시에도 나는 아버지의 슬픔에 더 슬픔을 느꼈었다.

역시나 외할머니의 죽음 앞에, 그녀의 자녀인 나의 엄마는 하염없이 울었다. 다른 이들이 잠든 새벽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을 나는 소리로 먼저 접했다. 나는 엄마와의 스킨십을 그리 자주 하지 않아왔지만, 그때는 위로의 손길이 나도 모르게 먼저 나아가더라고.

입관, 발인에 이르기까지 엄마는 고개를 떨구고 손으로 손수건을 뜯어가며 그렇게 흐느끼고 또 울음을 삼키고 쏟아내기를 반복했다. 또, 주저 앉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엄마는 '왜 이틀을 못 기다려줬나(이틀 후가 추석 연휴의 시작이었기에)'는 원망과 후회가 뒤섞인 말과 함께 흐느껴댔다. "엄마 먹이려고 직접 낚시한 생선도 들고 왔는데, 여행 한 번 제대로 같이 못 갔는데…" 연이은 말들이다.

다시금 느꼈다.
단 하루, 이틀 앞도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 그러니, 소중한 사람들은 생 전에 최선을 다해 정과 사랑을 나눠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엄마에게 원망과 후회 따위를 하지 말라고 했다.
아니, 후회보다는 원망을 말라고 했다.
후회는 각자의 몫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했다고 한들, 후회는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당연히 찾아오는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타인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특히 망자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원망하고 후회하는 건 인정한다. 그 원망과 후회를 덜기 위해 우리는 지금, 소중한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표현해야만 한다. 또한, 함께 해야만 한다.

"이제, 만질 수도 없어."
메마른 영정 사진 속 할머니 얼굴을 쓰다듬는 엄마의 손짓은 너무나 슬펐다. 그렇다. 이제, 더 이상 할머니의 생살을 만질 수 없을 것이다. 엄마도, 그리고 나도. 그래서 나는 앞으로 열심히 소중한 사람을 만지고 또 만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만끽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현재에 충실하라(Carpe Diem).
인식만 갖고 실행에 옮기지 않는(혹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후회에 가슴앓이하기 싫다면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하자.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나는 죽음을 평상시보다 조금 더 가까이 접함으로써, 망각하고 간과해왔던 현실을 반성할 수 있었다.

외할머니의 죽음은, 아프고 쓰라렸지만 많은 깨달음을 선사한 계기였다.
추석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와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했고 생전의 업적을 기렸다. 정통 기독교식 장례를 치른 나는 수많은 예배를 통해 죽음이 내포한 훌륭함을 다시금 인지할 수 있었다.




_201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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