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그런 은밀하고 이상한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함께 산을 오른 초가을의 아침이었다.
50대 중반이 넘어가는 여자는 동네 뒷산에 조성되어 있는 등산로를 1시간 30분가량에 걸쳐 오르내리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같은 시각의 나는 보통 수영장에서 헤엄을 치지만, 그 해의 가을은 코로나로 체육시설이 문을 걸어 닫는 바람에 꼼짝없이 운동을 거르는 중이었다. 어째 입고 있는 바지가 좀 작아진 것 같은 기분에 찝찝해 할 때쯤, 여자는 선뜻 내게 함께 등산이나 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흔쾌히 여자를 따라 나섰다.
새벽사이 짧은 비가 지나간 탓인지, 산의 흙들이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젖은 흙과 젖은 나뭇잎 냄새가 한 데 섞여났다. 머리 위에서는 벌레가 갉아 먹어 바늘만한 구멍이 숭숭 뚫린 나뭇잎들이 바람에 몸을 썰렁썰렁 흔들었다. 여자와 내가 함께 내는 툭툭, 하는 발소리가 평화롭게 들렸다.
등산로의 입구에는 노란색의 길고양이 가족이 거의 모든 등산객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전용 밥그릇에는 여자처럼 산을 매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늘 그들에게 줄 사료와 간식을 채워 놓는다고 여자가 설명했다. 다섯 마리 정도 되는 고양이들은 거의 비슷하게 생겼는데, 저들 밥그릇을 살펴주는 사람들 옆에 붙어서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짧은 인사를 하고 서둘러 여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나보다 훨씬 더 키가 작고 마르고 나이도 많지만, 산에서는 꼭 날다람쥐처럼 빨랐다. 성큼성큼 경사진 길을 저만치 앞서 걷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스크 속에서 뜨거운 숨을 훅훅 내뱉었다.
숨이 껄떡 넘어갈 것만 같은 오르막길을 몇 번 오르고 나니, 눈앞에 커다란 전나무 숲이 펼쳐졌다. 높이 솟아 오른 푸른 나무가 정말이지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시원한 피톤치드향이 코를 화하게 했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볕이 반짝거렸다. 어쩐지 이 전경을 혼자 눈으로만 보기에는 아까워, 나는 휴대폰을 들어 전나무 숲의 모습을 담았다. 여자의 뒷모습도 함께 찍혔다. 그리고 그 때, 여자가 제 주머니 속에서 웬 봉지 하나를 꺼냈다. 그러더니 아주 민첩한 손짓으로 숲의 여기저기에 무언가를 뿌리듯 던졌다.
-엄마, 그게 뭐야?
내가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여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씨앗.
그때야 알아차렸다. 엄마는 항상 과일을 깎아 먹을 때마다 과일 씨를 한 쪽 구석에다 따로 빼놓곤 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었는데, 알고 보니 따로 모아 놓은 작은 씨앗들은 다 나름대로의 쓰임이 있었던 것이다. 여자가 여태 뿌려왔을 과일들의 씨앗이 꽤 됐을 텐데, 아직까지 숲에는 그렇다할 모습을 갖춘 과실나무가 보이지는 않았다. 여자가 다시 앞서 걸으면서 약간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열매 맺혔으면 좋겠다.
조금은 뜬 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싹이 트기도 전에 청설모나 다람쥐가 씨앗을 주워 먹었을지도 몰랐다. 며칠간 내린 비 때문에 씨앗이 썩어버렸을 수도 있고, 추워진 날씨에 겨우 움튼 싹이 얼어버렸을지도. 그럼에도 여자는 그 손톱만큼의 ‘만약’을 꿈꾸면서 매일 저 혼자 씨앗을 뿌려온 것 같았다. 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평화로운 숲 속의 좋은 자리만 골라가면서 말이다.
어쩌면 엄마는 비슷한 마음으로 나를 키우지 않았을까. 두어 걸음 앞서서 걷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대학 졸업 이후 뜬금없게도 글을 써보고 싶다는 통보 비슷한 내 얘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던 여자였다. 나는 몇 년간 카페 아르바이트로 겨우 한 달 생활비를 벌고, 간간이 성취한 자잘한 성과로 나를 위로하면서 그렇다할 성공을 내일로 모레로, 조금 먼 다음으로 미루고 있었다. 나를 채근할 법도 했지만 여자는 그러지 않았다. 가끔 굳게 닫혀 있는 내 방문 바깥에서 해사한 목소리로 말을 걸 뿐이었다. 뭘 먹고 싶느냐고.
여자 주변의 친구들 역시 내 또래의 딸을 가지고 있다. 공무원인 딸도 있었고, 두 아이의 엄마인 딸도 있었고, 또 대기업의 정규직 사원인 딸도 있었다. 실컷 딸 자랑을 하는 여자들 사이에 앉아서 여자는 무슨 얘기를 할지, 그다지 내세울만한 자랑거리가 없는 딸인 나는 가끔씩 염치없게도 그런 것들이 궁금하다.
아직 엄마의 나무들은 그렇다 할 열매를 맺지 못 하고 있지만, 그래도 제법 가지를 멀리 뻗을 정도로 자란 나는 알 것 같다. 여자가 씨앗에게 스스로의 삶을 짊어지도록 맡긴 이유는, 씨앗이 가진 힘을 전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무언가를 키우는 데 있어서, 뿌리 내릴 수 있을 좋은 자리에 씨앗을 뿌려주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는 것. 그저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응원하는 것이 이후 자신의 몫이라고 믿는 것. 여자가 고수하는 양육방식이었다.
그 날 이후, 뒷산의 전나무 숲에 다다를 때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기웃거리게 된다. 혹시나 여자가 뿌려 놓은 씨앗이 어딘가에서 무럭무럭 자라 손을 흔들 것만 같아서다. 여자는 요즘 감을 먹고 씨앗을 꼭 한 데 모아 놓는다. 가족 중 여자의 이 은밀한 취미를 알아차린 사람은 아직까지도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서른이 넘은 나는 아직까지도 자라는 중이다. 나는 우리의 열매를 기다리는 매일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