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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꼰대라니

비비빅 쿠키



 얼마 전, 비염을 달고 사는 우리 가족에게 코 세척이 도움이 된다기에 고민 끝에 주문했다.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세척 방법 때문에 두루가 겁을 먹을까 싶어 택배가 도착하기 전부터 다 같이 둘러앉아 두루 또래의 아이가 스스로 코 세척 하는 동영상을 골라 여러 번 보았다. 영상 마지막에 노란 콧물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우리 가족 모두 속이 다 시원하다며 ‘좋아, 한 번 해보자!’ 하고 결의를 다졌다.


 택배가 도착하자마자 콧물이 시원하게 뽑히는 모습을 기대하며 제일 먼저 내가 시범을 보였다. 입을 벌리고 서서 한쪽 콧구멍으로 콧물이 줄줄 흐르는 다소 민망한 모습을 과감하게 보여주었고, 마무리로 코를 팽! 하고 풀며 하나도 아프지 않고 아주 시원하다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두루의 차례가 왔다.


      



 세척 용기를 콧구멍에 대고 정확히 1초 후, 두루가 불편해서 하기 싫다며 뒷걸음질을 쳤다. 혹시 아프냐고 묻자 그건 아니라고 하길래 다시 한번 해보자고 세척 용기를 가까이 가져가자 화장실 구석으로 가서 두 손으로 코를 감싸고 버티는 것이 아닌가. 이럴 줄 알고 미리 동영상도 보면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불편해서 싫다고 내빼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최대한 나긋한 목소리로 이거 하면 병원 가는 것도 줄어들고 약도 덜먹을 수 있다며 어르고 달래서 다시 발판에 올려놓으려는 순간, 두루가 내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악을 썼다.

 

“나 불편하다고!”    

  

 나도 질세라 ‘하지 마! 그냥 병원에 가서 코에다 왕 주사 맞아!’ 하고 윽박지르고 말았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살벌해졌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두루와 들끓는 솥단지 같은 나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남편은 ‘이번에는 아빠가 하는 거 잘 봐’하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우리 둘을 번갈아보며 연신 콧물을 뽑아냈다.




 아픈 것도 아닌데 불편해서 싫다니, 나는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구시렁거리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내 주변을 맴도는 두루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내가 좀처럼 화가 누그러지지 않자 두루가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꼭 쥐고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한테 시간을 좀 줄 수 있어? 내가 아직 용기가 안 나서 그래”     


 두루의 말이 커다란 망치가 되어 내 머리를 세게 한 대 내리친 기분이었다. 처음 해보는 일을 가지고 고작 일곱 살짜리 아이에게 ‘태도’를 운운하며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불편하다는 말은 두루에게 겁이 나니 기다려 달라는 뜻이었다.


 그 순간, 아주 오래전 한 극단의 신입 단원 시절 첫 번째 발표를 앞두고 긴장해서 우물쭈물하는 동기에게 ‘너는 배우가 되려면 그런 태도부터 고쳐야 한다’며 호되게 다그쳤던 선배가 생각나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날 그 동기는 그동안 열심히 외웠던 대사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뒤풀이 자리에서 서럽게 울던 동기에게 자기는 처음부터 잘했냐면서 재수 없는 꼰대라며 심하게 흉을 봤던 그 선배와 지금의 내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미안한 쪽은 오히려 나였다.    


 



 나는 두루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고 말해주었다. 둘이 한참을 부둥켜안고 경쟁하듯 서로 미안하다며 볼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자 남편은 이미 예상한 결말이었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우리는 기분 전환도 할 겸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기로 했다. 신이 난 두루가 얼른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더니 딸기 맛이 하나뿐인데 엄마가 어른이니까 팥을 먹어 주면 안 되겠냐는 말에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나도 네 나이 때는 딸기를 좋아했다만 아이스크림은 역시 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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