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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봉봉 Jul 27. 2019

임신 출산 정책? 그딴 건 개나 줘버려.

지나간 억울함에 대한 나의 고백

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다양한 화두, 그 중 하나가 바로 저출산일 것이다. 출산률이 1도 안되는 시대. 그런 시대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대 속에서 사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출산을 장려한다. 일명 임신, 출산, 육아 정책들. 

배우자의 출산 휴가를 늘리고, 임신 기간 동안 근로 시간을 단축시키고, 아이를 낳으면 시도별로 지원금을 주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출산을 하고 나서 뒤돌아 보니, 참 많은 혜택을 받았구나 싶다. 임신 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바우처는 물론이고, 매달 들어오는 양육지원금까지.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역경과 고난을 거쳐서 ‘임신’이라는 문턱을 넘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와 관련해서, 그 문턱을 넘기 전,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자 한다. 일단 나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고, 우리 부부는 결혼 후 바로 아이를 원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원하고 안원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조만간 생길 것이고 순리대로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의 순리를 방해하는 존재가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팀장. (그당시 나는 나는 그녀를 국쌍희라고 불렀다. '국민 쌍년 **희'의 줄임말로, 그것은 그녀의 망령된 짓들에 대한 나의 소심한 울부짖음이었다.)


나의 팀장은 틈만 나면 나를 보고 이딴 소리를 지껄였다. 


“너, 지금 임신하면 안돼.”



회사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팀 내에서 팀장이라는 존재가 갖는 그 힘과 권위를. 그런 그녀가 허구한 날 나만 보면 그딴 소리를 지껄였다. 자, 이런 상황에서 나의 임신과 출산을 막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대한민국의 출산 정책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젊은 신혼부부의 가치관의 변화 때문일까? 


아니다. 나의 임신과 출산을 막는 것은 바로 ‘팀장과 회사’였다.


아니 어쩌면 회사가 아니라 팀장 혼자만의 지랄이었을 수도 있다. (그냥 과감히 지랄이라는 표현을 쓰겠다. 비속어가 아니고서야 그녀의 만행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나는 그녀의 그딴 지껄임 덕분에 그 회사에 머무는 내내 스트레스를 받았다. 임신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런 마인드의 팀장 밑에서 일을 하는 나는 매일이 스트레스였다. 그리고 극도의 스트레스는 가끔 나의 점심에 대한 욕구까지 앗아갔다. 간헐적으로 식욕이 사라질때마다 나는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지 않고 그냥 엎드려 있었고, 그런 나를 지나가면서 그녀는 말했다. 


“김대리, 너 혹시 임신해서 피곤한거 아니지? 너 지금 임신하면 안된다, 알지?”


썰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존재 같으니라고. (물론 실제로 썰어 먹지는 않았다. 아니 썰어먹는 흉내도 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팀원이고 그녀는 팀장이니까.)


물론 그녀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우리 팀의 구성원만이 갖는 리스크도 있었고, 특정 한사람이 자리를 비웠을 때 그 공백을 대체할 만한 대책이 그녀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준의 인간이라면 그런 소리는 하면 안된다. 하지만 이는 윤리적인 부분일 뿐, 상명하복의 직장 생활에서는 윤리보다 위에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묘한 분위기. 팀장이 만들어내는 그런 알수없는 분위기는 나는 물론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공통된 주제로 힘들게했다. 


임신, 출산, 육아 정책? 그건 일단 임신이라도 해야 적용이 가능한 정책이다. 





나 같은 케이스에서는, 임신을 하는 것 자체가 마치 무언가 팀에 누를 끼치는 분위기에 있었기 때문에 ‘저출산 정책’은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정책의 수혜를 받기 위한 최소한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 (물론 내가 보편적인 케이스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저 천하의 못된 팀장을 만난 특별히 재수없는 케이스였을 수도 있다.)

물론 정책의 수혜를 받기 위해서 임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저출산 정책을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처럼, 그러니까 <저출산 원인>의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케이스도 있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분위기 속에서 길게 버티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임신 출산>에 대해서 그딴 소리를 지껄였던 팀장인데, 다른 영역에서는 노멀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총체적인 불량품이었고, 그 불량품이 만들어낸 분위기 속에서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결국 퇴사를 하였다. 

그리고 퇴사 이후 나는 사랑스러운 내 딸이 내 뱃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소리를 의사선생님으로부터 들었고, 인간으로써 누려야 할 ‘생육과 번성’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금 이렇게 혼자서 노트북 앞에서 주절거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도, 그녀도, 또 이 순간을 살아가는 수많은 직장인들은 달라지지 않는 삶을 자기만의 방식대로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마디 쓰는 이유, 기록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내가, 우리가 겪었던 억울함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기억을 해야 주장할 수 있고, 주장을 해야 바뀔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무언가를 바꾸자고, 주장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것 역시 핑계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그때의 일들을 글로 쓰는 이유. 생각해보니 이유는 없다. 그냥 그때 그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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