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내려야 할 정차역이 있다. 전철의 문이 열리고, 하나가 먼저 내린다. 앨리스는 전철에서 내리지 않고 우뚝 서있다. 그러자, 문이 닫히기 직전 하나도 다시 전철 안으로 뛰어든다. 결국 그렇게 둘은 학교를 땡땡이친다. 하나는 앨리스에게 어딜 가냐고 묻지만, 앨리스는 진짜 가야 할 곳을 아는 사람처럼 앞서 걷는다. 하나는 그 뒤를 쫓아가느라 바쁘다.
짝사랑하는 선배, 마사시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하나. 그 거짓말에 앨리스까지 연루시킨다. 하나는 선배를 따라 구린 만담 동아리에 들고, 거짓말을 하고, 다음 데이트를 이어가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하지만 선배는 하나를 떨쳐내고 싶은 민달팽이 취급이나 한다. 그리곤 하나의 단짝인 앨리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게 아닌가.
하나는 아무리 애써도 이뤄지지 않는 인연이, 앨리스에겐 우연히, 필연적으로 이어진다. 하나는 생각한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나를 제외한 이 세상은 왜 이렇게 운명적이고 낭만적인가. 왜 내 인생은 끝나지도 않고 지루하기만 한 만담 같은 건가. 공허한 건가.
앨리스는 어른스럽다. 엄마고 친구고 남자 때문에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게 하고, 자신을 등한시해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살펴준다. 정작 본인의 마음은 잘 살피지 못하는데도 그런다. 앨리스가 계속 “더 이야기해줘”라고 말하며 묵묵히 들어주는 마사시에게 끌린 건 앨리스 안에 웅크리고 있던 작은 아이의 반응이었다.
오디션에 탈락해도, 길가에서 음식을 먹는다고 사람들이 힐끔거려도, 빗속에서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춰도 그녀는 괜찮다. 그런 일들이 그녀 자신을 깎아먹는 일은 없다. 쉽게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내면이 아주 단단한 사람.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그 자신감이 밖으로 비춰 보이는 사람. 그게 아주 자연스러운 사람. 앨리스라는 인물에 아오이 유우라는 배우가 잘 묻어난 이유도 이 특유의 자연스러움에 있다.
이와이 슌지가 아오이 유우에게 요구한 것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할 것’이었다고 한다.
앨리스의 오디션 장면은 아름답다. 화려한 조명이 없어도, 이렇다 할 무대가 없어도,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만으로 마룻바닥 위에서 춤을 추는 앨리스는 빛이 난다. 종이컵을 발가락에 끼고 있다는 사실에 아무도 괘념치 않는다. 오리의 둥지에서 태어났느냐는 상관없었다. 백조의 알에서 태어났다면.
물론 이 영화에서는 하나와 앨리스 모두 사랑스럽다. 맹랑한 두 소녀 사이에서 놀아나는 마사시만 불쌍할 뿐이다. 누가 누구에 비해 못나고, 잘나고는 없다. 주연이고 조연이고 없다. 하나와 앨리스 둘이 주연이고, 하나는 하나이고 앨리스는 앨리스다. 그것이 이 영화의 탁월한 점이다.
하나는 마사시의 마음을 사기 위해 마사시가 기억을 잃기 전 그의 여자 친구 행세를 한다. 앨리스는 길거리 스카우트가 되고 연기자가 되려 하고, 사람들은 앨리스에게 우스꽝스러운,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연기하게 한다. 앨리스는 엄마, 아빠, 하나를 위해 다른 사람 행세를 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거짓이 사라졌을 때, 하나가 하나로서 마사시에게 고백했을 때, 그 무감각하던 마사시가 하나에게 응답해줬다. 앨리스는 머리를 질끈 묵고, 교복을 입고, 토슈즈도 없이 마음껏 발레하는 가장 앨리스다운 모습으로 잡지 메인 모델을 따냈다. 심지어 코에 모기 물린 자국까지 적나라하게 나온 사진이 잡지 커버가 되었다.
그러니 결국, 연기할 필요 없다는 것 아닐까. 거짓으로 진실을 완벽히 포장할 수 없다면. 당신이 그렇게 치밀하고 철저한 사람 일리 없고 아직 어리숙하고 또 어리숙한 사람일 테니 그냥 연기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자신 그대로 행동할 때, 그대로 부딪혔을 때,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고루하지만 정직이 최선의 전략이다.
이쯤 되면 드는 의문, '나'중에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내가 연기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하나일까 앨리스일까.
나와 내 것이 아닌 것이 있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과정은 꽤나 자존심이 상하고, 냉정하며 씁쓸한 일이다.
나는 앨리스이고 싶은 하나다.
스스로 어른스럽다 여기고,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머리와 몸이 어쩐지 꽃밭인 어린아이일 뿐이다.
내가 있고, 내가 바라는 내가 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있고,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나 말고 모두가 어쩌면 나 자신도 자명하게 알고 있는 것들. 알려하기도 전에 직관적으로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아닌 것을 나였으면 했고 내가 가지지 못할 것을 내 것이었으면 해왔다. 그리고 은근히 생각했다. 노력하면 되지 않나?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나는 될 놈이니까.
될 놈은 있다. 어찌 됐든 되는 놈들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일 확률은 아주 낮다. 아아주 낮다.
그런데도 무슨 일이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갖기 어려운 것을 쉽게 얻어 보려 요량을 피워보기도 한다.
근데 그런 일은 될 놈들이 하는 짓이다. 정말 안타깝게도 나는 될 놈이 아니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될 놈’은 못 돼도 ‘된 놈’은 될 수 있다. 노력한다면, 온 마음과 체력을 쏟아서 성취한다면. 그래서 더더욱 나와 내 것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에 중요성을 느낀다. 중요성을 깨달으니 필요성을 느낀다. 삶의 자세를 결정하는데,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아주 필수적인 거였구나.
나는 내가 바라는 나의 상태와 같지 않다. 내가 상상하는 나의 모습은 객관적인 나의 모습과 같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가장 중요한 것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그리고 나도 안다. 그 망상은 아주 조그만 충격에도 뽁 하고 터져버리는 비눗방울 같은 것이라는 걸.
그렇다 나는 하나다.
아마 앨리스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혼자만의 힘으로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일을 해내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일에 자연스럽기보단 서툴고 어색할 것이다. 나는 아주 많은 이의 도움이 필요하고, 아주 많은 실수를 할 것이고, 아주 많은 자책을 해야 할 것이다. 자격지심과 열등감이라는 감정에서 영영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하나도 충분히 괜찮은 아이니까. 앞으로 노력해볼 거니까.
재미없는 것이라면 줄줄 외서라도, 관객이 없다면 나 혼자서라도,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먼저 구걸하듯 사랑해서라도 쟁취해내겠다. 하나도 나에겐 감지덕지 일지 모른다. 하나는 맹목적으로 순수하게 열정일 수 있는 아이니까.
그렇다면 나의 이상향을 앨리스가 아닌 하나로 해도 좋겠다. 내가 아닌 것을 바라지 않고, 내가 될 수 있는 나를 바라겠다. 아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기억상실증에만 걸리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