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땅따코 Dec 22. 2020

모르겠어요, 아니요 모르겠어요, 아니요 모르겠어요 그냥

전공 수업 중 기사문 작성에 관한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에게 늘 지적받았던 부분은 바로 말의 맺음이었다. 나는 거의 모든 문장을 ‘~일 것 같다’ ‘~라고 생각한다’ ‘~일 수 있다’라는 말로 맺었다. 그것은 사실만을 전달하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기사문에서는 절대 용남 될 수 없는 표현이다. ‘것 같다’라는 것은 정확한 팩트체크가 되지 않은 정보임을 의미하고, ‘라고 생각한다’는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 나의 주관일 뿐이며, ‘일 수 있다’는 확신하지 못하고 논제에서 한 발 빼버리는 비겁한 마무리이기 때문이다.


친구가 내게 "네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뭐야?"라고 물었다. 나는 단번에 대답할 수 있었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그 말이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정보나, 경험을 말할 때도 끝에 꼭 “근데 아닐 수도 있고” “아님 말고”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와 같은 첨언을 하곤 한다. 내가 거짓된 것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을 늘 경계하기 때문이고, 내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모르는 것이 많기도 하다. 세상 전반의 이치는 당연히 모르겠고, 정확하다고 생각했던 정보도 의심해봐야 하는 가짜 정보 범람의 시대에서 모르겠다고 말하는 건 오히려 현명하고 이성적인 처사라고도 생각한다. 내가 정확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이름은 땅따코 세 자이고, 나는 여성으로 태어났으며, 4명의 가족 구성원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정도다. 그것 외에 내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가끔씩 불쑥 튀어나오는 질병이나 혹은 질병 같은 감정들도 그 출처가 어딘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


하지만 모르겠다는 말이 반복되었을 때, 그것은 사람을 희미하게 한다. 그 사람의 지식수준이나 인지능력과 별개로 확신이 없어 보이며, 불투명해 보이게 한다.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이 맞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내 경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내가 가진 지식과 정보들을 의심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 ‘내가 감히’라는 생각을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하면서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돌파구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다 우선 나는 “모르겠다”라는 말을 줄이기로 했다. 방심한 사이 말하는대로 생각하는 일에 익숙해져버렸는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정보에 대해서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대신 그 자리에서 정보를 찾거나, 최대한 아는 한에서 답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 추상적인 것에 대해 물었을 때, 그 추상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나만의 답변을 많이 만들어 놓는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터무니없는 자문자답을 하기도 한다. 일생에서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다면? 죽기 전에 단 한 곡의 노래를 들어야 한다면? 사랑이란? 좋은 우정이란? 건강한 삶이란?


그럼에도 여전히 나에게는 모르겠는 것 투성이다. 아무리 답안지를 만들어 놓는데도 그 답안지는 늘 엇나가기도 밀려 쓰기도 한다. 인생은 오지선다도 아니고, 단답형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절주절 늘어놓을 서술형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 이제 좀 알 것 같아”라고 말할 수 있는 때가 올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모르겠음의 연속 속에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때가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왜냐면 분명히 알 것 같다 생각할 때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거니까. 알 것 같다는 것도 결국 모르고 있다는 것이잖아!


이쯤 되면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다.

“아~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