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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따코 Apr 24. 2022

적응이 정당을 증명하진 않음으로

나는 어딘가에 일정 시간 이상 머무르면 ‘갇혀 있다’는 기분을 느끼는 편이다. 정서적으로도 쉽게 고립감과 싫증을 느낀다. 지금의 원룸에 살기 이전, 나는 지금의 5평짜리 원룸의 반절 정도 되는 방에서 생활했다. 그 방에서도 매일 사각형 천장을 바라보며, 이 방 안에 갇혔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방이 좁고 불편한 곳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러나, 자취를 시작하고 다시 그 방에 들어섰을 때, ‘어떻게 이렇게 좁은 곳에서 2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낡은 형광등 갓이며, 다 찢어진 벽지, 목재가 삭아버린 가구들, 몸을 정자세로 누일 수도 없는 작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동향이라 아침 해만큼은 끝내주게 드는 지금의 원룸과는 다르게 시장 안 쪽에 위치하고 있던 전의 방은, 시장 아케이드로 가려져 볕이 전혀 들지 않는 곳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방 불을 켜는 게 습관이었던 내게, 아침에 뜨는 태양빛으로 밝아지는 방 안 풍경을 보는 일은 신비할 지경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적응이란 것은 마냥 긍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아무리 제한되고 열악한 환경이라도 적응한다면, 어떻게든 살아는 지니까 그렇다. 주어진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 것은, 내게 제시될 수 있는 더 나은 환경을 직접 경험해보고서야 가능하다. 적응해서 살아간다면, 사람들은 그런대로 괜찮은 줄 안다. 어쩌면 그러한 적응의 반작용으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지금의 상황이 최선이 아니라 예측하며 더 나은 무언가를 추구한다.  




동네를 돌아다니는 엄마와 아들이 있었다. 엄마는 아들의 휠체어를 끌었고, 아들은 휠체어에 앉아 엄마가 끌어주는 대로 움직였다. 사계절이 변해도, 눈이 와도 비가 와도 어머니는 아들의 휠체어를 끌었다. 겨울엔 담요에 몸이 둘둘 말려서, 여름엔 목에 젖은 수건을 메고서 동네를 돌았다. 아들에겐 지체장애가 있었다. 내 또래였던 아들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소년에서 어엿한 성년의 몸이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그 엄마를 대단하다고 했다. 아마 엄마는  자신이 수월하게 휠체어를 끌 수 있는 경로를 터득해 놓고, 같은 길을 돌고 또 도는 듯했다.


얼마 전, 본가에서 자취방으로 오던 버스를 타고 가다 창밖으로 그 엄마와 아들을 봤다. 엄마는 어느새 머리가 희끗해졌고, 아들은 엄마보다 키가 커진 것 같았다.


이제 와 생각해본다. 만약, 엄마와 아들이 휠체어를 타고도 버스를 탈 수 있었다면, 지하철을 이용하기가 수월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더 넓은 세상을 아들에게 보여주려고 했을 것이다. 같은 동네, 같은 길만을 계속 맴도는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새로운 동네로, 새로운 풍경으로 향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작은 동네보다 더 예쁜 세상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아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 작은 동네보다 더 예쁜 세상이 있을 것이란 것을. 지금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택지는 아니란 것을. 하지만, 엄마와 아들은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라도 한다면, 모두에게서 느껴지는 불편한 시선을, 피곤한 탄식을.


우리 동네엔 3개의 지하철역이 있고, 도보로 5분 거리마다 버스 정류장이 있지만, 그 어디에도 장애인을 위한 장치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하더라도,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기 위한 계단에는 경사로가 없다. 경기도 버스는 장애인이 휠체어를 접고, 버스 위로 올라탈 만큼의 여유로운 승하차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에게 차단된 모든 것들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공정과 형평을 말하며, 저 사람은 가졌고 나는 갖지 못한 것에 대해서 늘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것이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 차이를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그것을 견뎌야 한다고, 더 나은 상황을 꿈꾸지는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은 결국 아무에게도 없다.


비장애인이란 단어는 장애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어떻게든, 사지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건강한 육체는 불가침의 영역처럼 보장되어 있지 않다. 나도 이제야 생각이 들었다. 그 엄마와 아들이 힘을 들여 나가 봐야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곤욕이었을지. 얼마나 답답했을지. 그리고 때로는 ‘갇혀 있다’고 느끼진 않았을지 말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도 더 나은 상황을 추구해야만 한다.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결국 그것이 우리 모두가 원하는 공정과 형평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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