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투표를 했다.
투표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기대를 하며 투표를 할까. 자신의 표에 대해 얼마만큼의 확신을 가지며,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라고 가늠할까. 그렇다면 나는.
20대들의 표는 특정 정당에 편향되지 않고, 변수가 많아 캐스팅보트로 여겨진다고 한다. 20대의 표심에 대해 한 작가(?)가 “20대의 공정은 비어 있다”라고 평한 것을 보았다.
작가의 인터뷰 기사 원문을 빌리자면 20대가 요구하는 ‘공정’에 대해
“본인의 어려운 처지나 삶에 대한 요구는 뚜렷하게 없고 수능이나 입사시험에 근거한 지대추구만 바라는 것 같아서 그렇다. ‘내 삶이 어떻게 나아져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나보다 못하거나 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로부터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지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내용이 없다고 봤다”
그들이 그렇게 범주화하고 싶어 하는 ‘20대’에게 ‘공정’이란 무엇일까. 같은 20대로서 20대의 공정은 확실히 비어 있다. 더 이상 공정이란 개념을 믿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공정’이란 더 이상 목을 매고 덤벼들어야 할 가치가 아니다. 그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초등학생 때부터 배우고 성인이 된 후론 몸으로 새긴다.
보복정치를 하고, 이 모든 불공정을 초래한 것은 후발 세대가 아니다. 이제 와서 20대 집단을 불공정에 길들여져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릴 줄 모르는 힘없는 청년세대로 치부하는 것은 그저 또 하나의 통제집단을 실험집단으로 치환하려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얼굴을 알고 이름을 아는 20대 중 내 삶이 어떻게 나아져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시험 후의 지대 추구라. 근래에 공무원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20대들의 기사가 자주 보인다. 세상과의 고별을 택한 그들이 많은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 부모를 기쁘게 하고 봉양할 수 있으면서, 나의 인격이 존중받고 영혼이 다치지 않는 것. 그것이 많은 것을 바란 것이라고, 정신상태가 나약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대화의 여지는 없다.
현시점에서 젊음이란 것이 그저 프레임처럼 느껴진다. 젊음이란 최대한 효율적으로 소진해내야 하는 연료 같기도 하다. 연비가 얼마나 되는지, 더 훌륭하다면 하이브리드인지 전기차인지 젊음은 그로써 연소되고 평가된다. 외제차도 아닌데 연비가 구린 차는 폐차가 답이 아니겠느냐 자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반화는 오류를 남긴다. ‘이대남’ ‘이대녀’ ‘MZ세대’ 같은 ‘나이’라는 특성만을 비대하게 그리는 일반화가 그렇다. 미디어에서 오징어 게임마냥 남발하고 있는 ‘MZ세대’라는 용어. 그들의 특징은 이러하다고 1번부터 10까지 나열 해대며 이것이 너희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느냐며 끊임없이 타켓팅 한다.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기 보단 그저 또 다른 일반화의 과정으로 보인다. 일반화는 오류를 남기고 그것이 바로 MZ에 속한 이들의 요구를 정확히 비껴나가는 짓이다.
젊은 세대의 핵은 개별성과 다양성이다. 쉽게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용하는 기성세대와 달리 우리는 ‘다르다’와 ‘틀리다’는 다르다고 배웠다.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말하는 것을 틀리다고 배웠다. 개별성을 인정하여 다양성을 지닌 공동체를 이루는 것. 틀에 갇히기를 끊임없이 거부하는 것. 정체성의 복합성. 그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렇다고 특별히 저항적인 것은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국가직에 대한 열망이 높은 세대라는 점에서 그렇다. 조직에 속하기를,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열망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억누르는 학습을 성실히 수행한다. 나는 더 이상 친구들이 공무원이 되지 않았음 하는 주제넘는 소망이 있을 정도로 많은 친구들이 공무원 시험을 본다며 연락이 뜸해진다. 각자의 길을 찾으려 공부하고 또 공부한다.
그럼에도 정치인들과 미디어는 개에게 목줄을 달고 ‘바둑이’ 같은 이름을 세뇌시키듯 깊은 이해가 결여된 호명을 계속한다.
이번 대선, 모두가 위기를 말하고 극복하겠다 말했다. 20대에게 ‘공정’을 소구 하며 집을 갖게 해 주겠다, 아이를 낳게 해 주겠다, 여자는 남자보다, 남자는 여자보다 잘 살게 해 주겠다 말했다. 나는 당장 집을 갖고 싶지도, 아이를 낳고 싶지도, 남자보다 잘 살고 싶지도, 여자라서 못 살고 싶지도 않다. 완벽한 오독(誤讀)의 정치를 몸소 체감한다.
누구는 쉽게 말하기도 한다. 위기가 기회라고. 사회가 붕괴되어도 어떻게든 솟아날 구멍이 있지 않겠느냐고. 젊은 세대가 그 몫을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갑자기 구멍도 찾고 솟기도 해야 하는 입장에선 앞이 깜깜하고 원망의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견고해야 할 것들이 파괴되고 견고하면 안 될 것들의 장벽은 점점 높아진다.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는 제3의 영역은 붕괴되고, 사람들은 갈등한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건, 세상은 늘 파괴와 재건을 반복해 왔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소신과 기대를 가지고 투표장으로 향했다. 세상이 예기치 못한 모양으로 분열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럼에도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 생각했기에.
처음 헌혈을 했을 때가 떠오른다. 고등학생 때 헌혈버스에서였다. 모든 문답을 작성하고 헌혈을 하는 동안 나는 어쩐지 두려웠다. 내 혈액에 나도 모르는 바이러스가 있어 누군가의 몸에 주입되고 문제를 일으키면 어쩌지. 그 막연한 공포는 몇 cc의 피를 몸에서 뽑아낸 대가로 어떠한 자부심이나 보람보다도 앞섰다.
기표소 안에 들어가 투표용지 앞에 서서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내 표가 또 다른 인재(人災)를 야기한다면, 나의 권리로 누군가의 권리를 해하는 것이라면 어쩌지. 그것은 막연하지만 보다 현실적인 공포였다. 예견된 자책감 혹은 부채감은 국민으로서의 주권을 행사했다는 인지보다도 앞섰다. 그래도 나는 기어이 도장을 찍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3000원짜리 참치김밥을 한 줄 사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이름보다 성별보다 나이보다 앞선 나의 '자력自力'을 느꼈고, 밥을 먹으면 힘이 난다는 단순한 원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안엔 아직 힘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 20대에게 ‘공정’이란 무엇인가. 용어의 남발로 외계어로 들릴 지경인 ‘공정’은 이제 ‘공생’과 닿는다. 어떻게든 살아나가는 것.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 없이 모두가 가시화되는 것. 그래서 밟고 올라서지 않고도 함께 살아나가는 방법을 모색해보는 것. 가지고 있는 모든 이름으로부터 억압받지 않는 것. 그것이 20대를 지나는 나의 공정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MZ와 상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