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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따코 Apr 30. 2022

태우는 젊음

비관적 낙천주의자 

 삶은 얼마나 안주하기 쉽고 젊음은 그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뒷담화만큼 맛있는 안주가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최상의 ‘guilty pleasure’가 아닐까. 아르바이트를 하며 은근한 반말과, 아래위로 훑는 눈빛,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말투와 행동, 전형적이고 악랄한 부분에서 많은 자질을 갖추었던 아무개를 질긴 곱창 마냥 소주 안주로 얼마나 씹었던지. 2018년을 떠올리면 그 친구 얼굴이 어렴풋 떠오를 정도다. 


    알바를 했던 가게에는 5년을 그곳에서 쭉 일한 매니저가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이 작은 가게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내심 한심했었다. 왜 더 나은 곳을 찾아가지 않는지 의문이었고 사장 없는 가게에서 사장 노릇을 하려는 것이 같잖기도 했다. 한창 경멸로 바라보면서도 순종의 얼굴을 하는 일을 배울 때였다.  


    그때의 그 매니저의 나이가 되어버린 나는 그때의 경멸의 눈길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다. 


    있는 자리에서 발을 떼기 어려운 것은 인간 의지를 벗어난 물리적 차원의 일이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선배들이 그랬고, 전례를 들라면 100년이 모자라며, 예상된 미래라는 것이 뻔히 보인다고. 관성이란 것을 거역할 수 있을 줄 아느냐고. 지금의 네가 최선의 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한다. 뭐든 할 수 있다고 부추기기만 하던 목소리들이 이제는 좀 주제를 알라는 목소리들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젊음은 사실 별 거 아니다. 과대 포장이다. 단지 지나가는 시간에 의해 보다 덜 소모되었다는 것을 빼면 남는 게 별로 없다. 그 사실은 젊음을 만끽함과 동시에 뒤통수를 강타한다. 그래, 젊다. 그리고 뭐? 젊음은 영구적이지 않다. 실수와 합리화는 짝꿍이고, 자기 성찰은 미덕이며, 자격지심은 습관이고, 피해의식은 동반자다. 젊음이라고 삶의 특성 앞에 결코 무릎 꿇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시답지 않은 일에도 사사건건 충돌하는 모순들에 골이 땡길 지경이다. 아직 선택하는 일에 요령이 없어 그렇다.  


    그래도 나만은 다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고, 희망할 수 있는 패기. 그것이 아마도 젊음이란 것이 유발하는 환각이다. 그래서 젊음에 취하지 않는 일은 힘들다. 취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가 가장 취한 것처럼 젊음을 부정하는 이일수록 깊은 환각에 취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누군가는 뛰어난 현실감각으로, 누군가는 성실함으로, 누군가는 무모함으로, 누군가는 체력으로, 누군가는 재능으로, 누군가는 무력함으로. 그러한 젊음의 환각을 이겨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젊음이란 누려야 하는 것이 아닌 필히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힘을 내다가도 힘을 잃고, 힘이 없다가도 힘을 얻기도 한다. 불만, 또 불만. 끝없는 불만 속에 만족을 추구하고 또 추구하게 된다. 쾌락을 좇고 나 밖의 것들에 의존하며, 기대하고 욕망한다. 고속으로 충전되고 쉽게 방전되는 요즘의 값비싼 핸드폰처럼 까무룩 꺼졌다 번뜩 켜진다. 

그러다 한 번쯤, 0점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겪게 된다. 운동과 저항의 힘이 동률을 이룰 때. 그럴 때 비로소 젊음을 느낀다. 무중력의 상태로 저 하늘로 날아갈 수라도 있을 듯, 당장 솟아오를 날개로 날개뼈 언저리가 간지러운 그런 무시무시한 가능성의 괴물이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 그러한 상태는 순간적이다. 받는 저항에 비해 운동의 힘이 턱없이 모자라기에 그렇다. 젊음이란 것이 그렇듯 변덕스럽게 금세 좌절하고 실망해버리기 때문이다. 같잖은 좌절과 실망은 발에 차이도록 잦고 흔해서 어디서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젊음의 덤이다. 


    그래서 젊음이란 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 
    그 자체로 충분한 동력이 되는 것이 맞는가. 
    우리는 젊음으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가. 
    잔혹한 경기에 도박하기 좋아하는 누군가의 간악한 부추김은 아닌가. 


    질문하고, 의심하며 계속 반복해간다. 어제의 것을 복기하고, 내일 할 것을 준비하며 어찌 됐든 더 나은 ‘미래’라는 것을 맞이하기 위해, 우린 젊음이 지나간 자리에 가난이나 고독사가 남지 않기를 바라며 젊음을 태운다. 


    소모하고 소모하는 것. 결국 스스로 소모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 그것이 젊음의 책임이며 딜레마가 아닌가. 소모하는 것에 지쳐버린다면 젊음은 젊음이지 않게 된다. 그것은 삶에 안주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핍을 충족하려 하지 않고, 처지를 개선하려 하지 않는 것은 젊은이로서는 방관이며 죄악으로 여기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태되는 일은 너무나 쉽다. 우리에겐 당장 먹을 쌀이 없지 않고, 당장 누울 자리가 없지 않다. 환경적 질의 차이일 뿐이지 생존의 문제에 있어서 간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3평방에도 보일러는 돌고, 옥탑이라도 아래로 내려가 길을 건너면 편의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취한 몸을 누이면 어떻게든 내일이란 것을 맞을 수 있다. 얼어 죽지 않고, 굶어 죽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의 젊음은 다른 차원의 생존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의. 식. 주. 혹은 번식 같은 것이 더이상 생존의 동력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존재가치의 부재는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얼마나 많은 젊음들이 지고 또 진 이후에야 정의될 수 있을까. 너무 많은 것들이 고갈되고, 병 들어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듯하다. 포화상태에 이른 세상에서, 자신이 왜 굶주린지 모르는 채 굶주려하는 이들이 있다.


    삶은 얼마나 안주하기 쉽고, 젊음은 그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젊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젊음에 기대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결국 모두 몸의 몫이다. 관념이란 것들은 일상을 괴롭게 할 뿐, 정신 빠진 육체를 굴리는 일에 익숙해질수록 생존확률은 높아진다. 삶에 안주한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과신일 것이다. 안주할 만큼의 삶은 주어지지 않는다. 절대 만족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그렇다. 너의 그 나태한 젊음도 벌써 지고 있으며, 결국 너의 곁에 남지 않을 것이므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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