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비가 온다.
운치 있는 비가 아니다.
세상의 먼지를 걷히고 땅을 비옥하게 하는 비도 아니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친다.
속절없이 쏟아졌다 기약 없이 그쳐버린다.
먹구름은 재앙 같고
빗소리는 호통 같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이들은 발이 묶이고
몸이 젖은 채 메뚜기처럼 웅덩이를 피해 뛴다.
교통은 마비되고 갈길이 바쁜 오토바이들은
아슬한 주행을 멈추지 못한다.
앰뷸런스 소리가 바빠지고
활짝 열렸던 창들은 굳게 닫힌다.
사방은 삽시간에 어두워지고
공기는 축축하게 내려앉는다.
빗소리를 좋아하는 아버지도 이런 비엔
문을 걸어 잠그고 티브이 볼륨을 키운다.
시기를, 절기를, 한 해를 가늠해주던 비가
이제는 때를 모르고 온다.
저 천체의 기운이 마음을 파고들게
무시무시한 비가 계속 온다.
커튼이 날리고
보일러로 비가 들이치는 소리에 잠을 설친다.
하늘이 번쩍번쩍.
좁은 방안이 삽시간 밝았다 어두워진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비명소리도 들려오는 듯하다.
어릴 때 비가 오면 집 베란다에 나가
구경하던 재미가 있었다.
태풍이 온다면 휴교 문자를 기다리느라 가슴이 뛰었다.
길가에 뿌리째 뽑혀버린 나무를 보고도
신기한 구경이다 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이 '재해'였음을 인지하고 있으므로.
비가 예전 같지 않다.
자연의 선물 같았던 비는 자연의 경고 같아졌다.
이 비가 행성 차원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내리는 비라면
무언가 사라져야만 그치는 비라는 생각 역시 그치지 않는다.
이 그치지 않는 비는 분명히 한다.
이것은 재해라는 것을.
너는 반드시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내일의 날씨는 더 이상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