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힘을 전부 보란듯이 무력하게 만드는, 자연이 하는 일에 대해 우리는 ‘불가항력’이라 말한다. 이미 자연재해가 발생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어찌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재해가 일어나기 전에 예방하고 최대한 지연시켜야 한다.
유산과 상속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원하지 않아도 물려받아야 하는 것. 부모에게, 멀리의 선조에게서 DNA, 영토, 빚, 기억 같은 것들을 선택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들은 아마 숙명이라고도 불린다. 나를 덮쳐오면 그저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 저항하려 할수록 되려 일이 어긋나기도 하는, 그래서 결국엔 존재 의미를 의탁해버리기도 하는, 제 발로 찾아가 저를 숙명으로 옭아매기도 하며, 그것이 결국엔 가장 ‘나다운’ 일이었노라 하기도 해 버리는 지긋지긋하기도 한 일. 내겐 숙명이 그렇게 느껴진다.
모든 터전에 기억이 남는다고 여기는 일을 좋아한다. 시간이 져버려도, 흔적이 사라져도 언젠가 그곳에 존재했던 이들을 기리는 다양한 인간의 방식이 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몇 안 되는 인간의 습성 중 하나다.
그 일은 영험하기도 하지만,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하기에 가장 경건한 일이기도 하며 누군가를 기억함으로써 결국 나 또한 기억되길 바라는 유치하고도 간절한 욕망에의 발현이라 애틋할 수밖에 없다.
일본에게 ‘재난’ ‘지진’이란 말이 어떤 무게로, 어떠한 숙명으로 다가올지 생각해 보게 된다. 영화를 보며 가장 슬픈 감상이 들었던 때는, 일본을 너무나 사랑하는 감독의 어떠한 소망과 희망이 절절히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가파른 언덕을 맨몸으로 달려 올라가 간절한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재앙이 새 나오는 문을 닫아버리는 모습이었다.
신카이 마코토가 그리는 일본은 정말 아름답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환상적인 풍경은 ‘저세상’이라거나 어떤 은하의 세계도 아닌, 일본 그 자체다. 일본 거리, 마을, 전차, 집, 학교가 그 어느 곳보다 여상하지 않게 아름답고 환상적이게 그려진다. 그런 작화와 연출에서 그 사람이 자신이 그리고 있는 곳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고 또 그 마음에 이입하게 된다.
신카이 마코토는 자신이 사랑하는 곳에 예견되는 불가항력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을 이 영화에 담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난세에도 구원을 기원하는 이들이 있고 그 구원을 현실로 실현하고자 자처하는 이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믿는 것이다. 그 구원자는 비록 영화 속에만 존재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보이지 않는 곳에 구원의 존재는 있다고 믿는 것이 막연한 내일을 살아가게 한다.
스즈메는 말한다. 눈앞에 펼쳐진 재앙과 어둠을 털어내는 방법은 우선, 그 앞의 내일을 먼저 마주해 보는 것이라고. 그래도 내일이, 다른 날처럼 웃고 누군가를 그리워할 날이 하루 정도는 더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단 하루일지라도, 내 미래를 채우고 있을 그 하루에 대해 한 공간에서, 한 세월에서 같은 아픔을 겪었을, 그리고 그대로 남겨두고 떠나야만 했을 이들에게 감사와 경외를 표해보는 일이라고.
어머니의 유품인, 커서는 앉지 못할, 어려서는 몸에 꼭 맞았던, 이제는 고장 난 의자가 있다. 그리고 그것에 꼭 구원자의 혼이 깃들어버린 것은 희망의 깜찍한 발현으로, 보는 내내 웃음을 잃지 않게 해 준 좋은 장치였다는 생각도 든다. 소중한 것은 제대로 간직해 놓으면 언젠가 꼭 힘이 되어준다는 부분은 가끔은 물체와도 교감할 수 있는, 또 하나 사랑하는 인간의 습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약하고 나약하지만 날 지켜줄 힘이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고 믿어보는 것도 거대한 재난을 막지 못할지는 몰라도, 나 자신을 잠시간 구할 수는 있다. 숙명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방식, 같은 숙명을 지고 있는 이를 위로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한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