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일기장에 썼던 것도 같지만
나도 수능을 본 날이 있었다.
수능 며칠 전부터 심한 불면을 앓고 있었고
과민한 대장을 가진 탓에 수능날 아침에는 배가 살살 아파왔다.
유달리 동네에서 먼 고사장에 배정된 나는 낯선 동네, 낯선 학교, 낯선 자리에서 시험을 치게 됐다. 아마, 불수능이었던 것 같다. 오류도 적지 않게 발생했던 수능이었다. 특히 국어가 어려웠는데 1교시 국어가 끝나자마자 나는 분명히 들었다. 내 영혼이 빠져나가는 소리를. 친구들은 아무도 안 믿어줬지만 분명히 보았다. 휘이. 하고. 눈앞으로 연기도 아닌 것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그렇게 기억과 영혼이 증발된 채로 수능을 마치고 고사장을 나오자 부모님이 마중을 나와 계셨다. 아버지의 카니발을 타고 창문에 머리를 기대니 이마가 깨질 듯 차가웠다. 어김없는 수능 한파였다. 창밖은 보랏빛이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부모님은 차마 "잘 봤어?"란 간단한 인사조차 쉬이 건네지 못한 채 모두가 침묵을 지키며 집으로 향했다.
저녁이 차려지고 가족 셋이 모였다. 아버지는 늘 그렇듯 반주를 하셨고 나는 아직 결과가 나오지도 않은 시험을 망쳤다는 생각에 싱숭생숭한 마음을 얼굴에서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소주잔을 건네셨다. "한 잔 할래?" 나는 머뭇거리다 그 한잔을 받아 들어 꼴딱 한입에 집어삼켰다. 목구멍에 일렁거리던 시큰함과 함께 쓰디쓴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눈물이 터졌다.
엉엉 울었다. 아마, 시험을 망쳤다. 보단 수능이란 시험 하나만 보고 달려온 시간을 망쳤다. 는 생각에 서러움이 몰려왔던 것 같다. 그러자, 뜻하지 않게 부모님은 웃음을 터뜨렸다. 19살 딸이 소주 한잔 먹고 아기처럼 우는 모습이 가엽기도 우습기도 했을 만하다. 그럼에도, 웃는 중에 어머니 아버지의 눈가가 촉촉해졌음은 우리 셋 다 못 본 척하기로 했었다.
망쳤다고 생각한 시간은 허무하게 휘발되는 소주 한 잔처럼 그렇게 흘러갔다. 나는 수능 그날의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의 나이가 되었고, 소주 한 잔으로는 성에 차지도 않는 어정쩡한 준어른이 되었다.
올해는 이례적으로, 비가 온 수능날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지, 가늠이 되면서도 그를 능가할 마음들에 따뜻한 온기라도 쬐어주고 싶다.
어른들은 말한다. 수능은 네가 인생에서 넘어야 할 수많은 산들 중 아주 작은 산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 수능이라는 산이 내가 넘어온 산 중 결코 작은 산이 아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12년이라는 시간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바친 산은 결코 낮지도 작지도 않다.
그러니, 힘에 부치는 게 당연했다고. 조금은 노력이 부족했어도 괜찮았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은 여러분 곁에 그저 소주 한 잔 건네줄, 한마디 타박하지 않고 마냥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함께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