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정도상의 낙타를 읽었다.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死者와 함께 고비사막을 여행하며 추억과 바람을 엮은 중편소설이다.
대학에 떨어졌다. 빡빡 머리를 깎고 다니던 머리가 졸업 후 삼 개월이 되니 밤송이처럼 부풀어 올랐다. 잡히지 않는 더벅머리를 부여잡고 고민에 빠졌다. 거친 머리카락을 삼 개월은 인내해야 머리를 손질할 수 있듯이, 시간을 덧대고 그 위에 바람이 스치면 청춘의 아픔은 아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직 그 길뿐이었다.
⌜“유목의 본질은 여행을 하듯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이동하는 삶이다. 유목의 핵심은 자유인데 진정한 자유란 고독을 견디는 정신의 힘에서 비롯된다” ⌟
처지가 같은 친구 두 명과 하루치 식대만을 손에 쥔 채 목적지 없는 여행을 떠났다. 동내인 청량리역에서 중앙선 기차를 타기로 하고 밤 10시에 모였다. 시발지에서 가장 가까운 정차역인 망우리까지 완행티켓을 끊은 이유는 청량리 역사가 높은 것도 있지만, 첫출발은 떳떳하고 근사하게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망우역까진 기차표를 제작하는 비용보다도 싼 요금이었다. 우린 깃털 같은 기찻삯을 내고 부산 갈매기를 만날 수 있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입시 공부는 쥐똥만큼 하고 상향 지원한 대학을 운 좋게 붙을 것으로 망상했던 것처럼. 낙방의 아픔을 치유하러 간다고 했지만, 출발 기적소리와 덜커덩거리는 궤도의 흔들림에 심장은 시험지를 받아 든 수험생처럼 마구 뛰고 있었다.
삶은 계란 장사가 몇 번을 오갔고 그 판매원의 구수한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꼴깍’ 거리며 침 넘어가는 소리와 ‘꼬르륵’ 대는 배속 거지들은 먹을 것을 달라며 아우성쳤다. 첫 번째 난관에 부딪힌 것은 앞칸에서 검표하는 모습이 창 너머 보였고, 우린 십 분이면 도착되었을 망우역을 이미 한 시간 이상 지나 원주역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이 처음인 두 친구는 어쩔 줄 모르며 여행을 주도한 나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코끼리 같은 두 녀석을 민들레꽃처럼 구겨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다행히 검표원은 그냥 지나쳐 갔고 우린 앞으로 2시간쯤 마음 편히 여행할 수 있었다.
영주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멘트가 선잠을 깨웠다. 국사 시간에 귀가 닳도록 배운 부석사가 생각났다. 배흘림기둥으로 만들어진 대웅전과 그 앞에 의상대사가 쓰던 지팡이가 살아서 지금도 잎을 피운다는 역사 선생의 말을 확인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별처럼 쏟아져 내렸고, 그 사이에 우리도 나무 울타리를 별똥처럼 어둠의 경계를 넘어섰다.
보통 큰 사찰은 개울이나 계곡을 지난 후 매표소가 있고, 일주문이 시작된다. 그것은 절에 들어오기 전 개울을 건너면서 속세의 찌든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들어오라는 뜻이다. 하지만 무전여행을 하는 우리가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는 것은 사치였다. 우린 계곡에 난 개구멍을 통해 악귀처럼 기어 들어갔다. 마음의 죄를 씻어 내려고 경내를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법도도 모르는 채 신도의 행동을 곁눈질 하며 삼배를 올렸다. 공양간에서 무료로 주는 점심도 배불리 먹었다. 미션스쿨을 다닌 터라 학교에서 배운 주기도문을 부처님께 정성 다해 봉헌해 드렸다. “하늘에 계신 부처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규는 물었다. “두 마음을 가질 수 있어?”
“누구나 마음을 잘 알 수 없어. 마음이란 원래 그런 거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것이지.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세상이라는
그물망의 한 코로 존재하는 거지. 그것을 관계라고 해”
규는 바람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행객들은 노을보다 먼저 이곳을 빠져나갔는지 버스 종점에는
어둠이 막차보다 미리 와 있었고, 주머니는 부처님 말씀처럼 텅 비어있었다. 도착한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은 스님 한 사람뿐이었다. 바랑엔 무엇인가 가득 차 있었다. 비워야 할 것이 욕심이라면 지금 갔고 들어가는 것은 비움을 위한 것인가, 채움을 위한 것인가.
예비대학생인데 경비가 바닥났다며 어차피 빈 차로 갈 거니 태워달라고 억지 사정을 했다. 차장은 아버지뻘 되는 운전기사에게 우리의 처지를 이야기했다. 삼배의 기도발이 먹힌 것 같다.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버스에서 피곤한 친구들은 노을에 기대어 잠이 들었고, 나는 세 살 위인 차장 누나의 이야기를 진한 커피 마시듯 듣고 있었다. 남동생이 우리와 같은 나이라고 했고 중학교를 마친 후 서울로 갔다고 했다. 학비를 대준다고 했지만 차장질 하는 누나가 창피하다며, 무작정 상경하여 2년째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눈물을 훔쳤다. 텅 빈 버스엔 박인희의 ‘방랑자여’ 노래가 늘어진 테이프를 통해 계속 흘러나왔다.
싸늘하게 식은 태양은 이미 어둠에 묻혔고 잠잘 곳은 막막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그녀는 자취방을 내어주었고, 동료 기숙사에서 잤다. 아침까지 먹고 나오니 꼬질꼬질한 땀 냄새 배어 있는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 주었다. ‘어디서든 열심히 살라’는 한마디 말를 던지곤 쏜살같이 버스에 올라타는 그녀의 뒷모습에 동생이 업혀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m’이란 이름 석 자가 지금도 샛별처럼 반짝거린다.
⌜아들 규는 자신을 뛰어넘고 싶었지만 결국 너무 큰 허영에 빠져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고비사막을 넘을 수 있는 낙타의 힘을 가르쳐 주었더라면 춤추는 별로 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합동 여행은 사흘 만에 끝났다. 도둑 열차를 타다 걸리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튀자고 이야기 한지 채 한 시간이 되지 않아서였다. 서로 뿔뿔이 헤어진 후 한 명은 집으로 또 한 명은 포항까지 갔고, 나머지 한 명만이 부산 갈매기에 꿈을 실어 보냈다. 그 이후 친구들은 여행 행적에 대해서 서로 함구했다. 같은 아픔이 위로도 되었지만, 마음의 상처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아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들판을 지나고 산을 넘어 바다에 다다른 여행은 유리잔 같이 여린 가슴에 큰 용기를 담아왔고, 그 경험이 지금껏 살아가는 디딤돌이 되어, 노을 진 해변을 찬란한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후 지난날 침만 삼켰던 가난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사발을 벌컥 들이켰다.
“올 여행은 암각화를 찾아서 고비사막을 넘어볼까?” 희끗거리는 머리카락이 사막 위 하닥처럼 휘날렸다. -끝-
하닥: 사막에 돌탑(어워)을 쌓고 그 주변에 걸어 놓은 오색천의 깃발
오색천의 의미-남색(하늘) 적색(태양) 황색(땅) 녹색(초원)
백색(말젖)-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