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저학년들이 학원 버스를 기다리며 어린이 놀이터에서 모래 장난을 하고 있었다. 모래 속에 빛바랜 진주알처럼 묻혀있던 백 원짜리 동전이 얼핏 보였다. 바이올린 가방을 멘 친구에게 ‘백 원짜리 돈이다. 줍자!’ 태권도 도복을 입은 친구가 말했다. “내가 거지냐, 너나 주워.”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자리들 떴고, 장난 투로 던진 친구도 무안했던지 반대편 학원가로 사라졌다. 나는 잿빛 하늘색 동전을 주워 들고 ‘참 큰돈이었는데!’ 속삭이듯 말하며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이스~케키~~”
땅에 질질 끌릴듯한 아이스-케이크 통을 어깨에 짊어지고 온 동네가 떠나갈 듯 목청을 돋우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서울의 끝자락인 면목동에 둥지를 틀었을 때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새로 전학 온 볼품없는 나를 따듯하게 맞아주던 친구가 싱글거리며 무료 급식으로 나눠준 소보루 빵을 내게 던져 주었다. 이런 빵은 이제 안 먹는다는 듯이. 그러곤 가방 속에서 크림빵을 꺼내 맛있게 먹으며 ‘너도 사 먹을 수 있어!’라고 강한 호기심으로 나를 끌었다.
학교를 파하고 친구 따라 아이스크림 보급소에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낡은 미닫이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갔다. 콩당 거리는 가슴을 안고 초조하게 주위를 살펴보니 내가 가장 어렸고 작았다. 미리 온 5~6학년 형들 네댓 명이 지도를 보고 각자의 구역을 나누며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보급소에서 가깝고 인파가 많은 곳을 선점하려 총무와 밀당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좋은 노루목은 무거운 짐을 멀리 들고 가지 않고 녹지 않은 신선한 제품을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에서 신속히 공급할 수 있는 자리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해온 일이라 장사 기법을 경험치로 알고 있었고, 군중 속의 창피함이나 남의 이목쯤은 책가방에 넣어 둔지 오래된 것 같았다.
하지만 처음이었던 나는 집에서 가장 먼 중곡동이 최적지라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도 잘 익은 수박처럼 속은 꽉 차 있어, 창피는 몰랐지만 집에 계신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했고, 자존심 강한 엄마가 알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애 첫 아르바이트는 나무통에 가득 찬 아이스크림을 어깨에 짊어진 채 낯선 거리에서 시작되었다.
한 개에 일원씩 하는 아이스-케이크(얼음과자)를 오십 개 주고 삼십 삼 원만 입금시키면 된다고 시꺼멓게 그을린 총무가 야릇한 미소를 띠며 이야기했다. 두 손으로 셈을 하지 않아도 꽤 짭짤한 돈벌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나도 돈을 벌 수 있다니. 하굣길 교문 앞 구르마(리어카)에서 해삼과 멍게를 사 먹는 친구들을 보며 매번 목젖만 적셨는데, 기쁨은 이미 마음속 깊이 꽈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똑바로 나 있는 신작로를 피해 빙 돌아가는 논둑길을 택하여 중곡동에 도착했다. 열 살 나이에 오리 길은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그 거리는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생물처럼 변해가는 아이스-케이크도 딱딱한 체형을 유지하기엔 버티기 어려운 거리였다. 햇살은 지글지글 대지를 뜨겁게 달구었고, 시작도 전에 나무 박스 틈으로 아이스-케이크의 붉은 색소가 콧물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린 얼음 몇 조각과 나무통 안을 스티로폼으로 둘러싸아 만든 박스로는 면도칼 햇살을 2시간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그래도 처음 20개까진 그럭저럭 잘 팔리는 듯했으나, 3시가 넘어가자 뜨거운 볕에 나다니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한참 지나 어린아이를 손잡고 나온 아줌마는 가여운 나를 보며 적선하듯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점점 앙상해지는 아이스케이크는 내가 봐도 팔 수가 없는 상태였다. 눈치를 보며 두 개를 주었다. 그래도 통통한 한 개가 될까 말까 하였다.
시간 날 때마다 매번 몇 개를 팔았고 몇 개가 남아 있는지, 돈은 제대로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느라 날씨만큼 작은 뇌도 열이 났다. 어느 땐 몇 개가 남았는지 뻔히 알면서도 확인차 뚜껑을 열어보았고, 그때마다 참을 수 없는 유혹에 손이 가곤 했다. 어차피 열일곱 개는 내 것이라는 빠른 셈으로. 이제 열 개만 더 팔면 된다는 안도감에 가장 많이 녹은 것을 손님이라도 된 양 또 맛나게 핥다 먹고 있을 때였다.
‘아이스-캐키 있니?’ 퉁명스럽게 물어보는 더벅머리 한 중학생 형들이 무서웠지만 한편으론 무척 반가웠다. 그들이 한 개씩 먹을 때마다 정답을 맞힌 시험문제처럼 마음은 가벼워졌고, 목마른 돼지처럼 순식간에 열 개를 다 먹어 치웠을 때 나는 입금해야 할 돈을 모두 채웠다며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잘 먹었다. 꼬마야.’ 하며 그냥 가는 것이었다.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돈을 달라고 가방을 잡았고 그들은 돈 대신 나의 뺨을 후려갈겼다. 별을 꿈꾸며 찾아온 곳에서 별이 번쩍 스쳤다.
초경에 놀란 소녀의 순수한 울음을 보듯 코피를 닦으며 울고 있는 나를 담장 뒤에서 훔쳐보던 친구는 ‘이 동네 깡패야’라며 빨리 피하자고 어깨 끈을 심하게 잡아당겼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엉겁결에 그 자리를 피해 나왔지만 시선은 억울한 현장을 계속 뒤돌아 보았고, 당장이라도 미안하다며 돈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붉은 콧물을 훌쩍이며 남아 있는 아이스-케이크를 번갈아 보며 또다시 셈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몇 개 되지도 않았고 그나마도 팔 수 없을 만큼 많이 녹아 있었다. 최소한 십 원은 더 벌어야 하는데.
당시엔 넝마주이가 많았다. 대나무로 통발처럼 만든 바구니를 등에 메고 긴 집게를 갖고 다니며 돈 되는 고물들을 닥치는 대로 주워 담았다. 지금은 파지나 고물을 재활용센터에 내놓지만 그 당시엔 집안에 모아 놓았다가 엿이나 물건으로 교환했었다. 총무가 마대자루를 준 것도 장사가 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한 방책이었다. 이제 입금액을 채우는 방법은 고물을 줍는 것뿐이었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마대자루를 채워야 했다.
당시 중곡동은 말이 서울이지 경기도와 접한 깡촌이었다. 시골일수록 대낮에 문을 잠그는 집은 별로 없었고 나는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 채 남의 집 마당을 기웃거렸다. 병과 쇳조각을 모아 마대자루를 반쯤 채웠을 땐 그림자가 내 키보다 두 배나 길어져 있었다. 코피가 말라비틀어진 것 같은 빈 나무통을 한 어깨에 둘러메고, 또 한 어깨엔 묵 지룩한 마대자루를 질질 끌 듯 짊어지고 사막을 넘어서는 낙타처럼 보급소로 향했다. 논둑을 지날 때 개구리는 자지러지듯 울어 댔고 난 개구리를 잡아 멀리 내동댕이 치며 화를 허공 중에 토해냈다.
절반 정도 채운 마대자루를 보며 나름 계산해 보았다. 이 정도 무게에 마대자루를 가득 채웠다면 십 원은 족히 쳐줄 것이다. 그렇다면 입금액은 채웠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확신하며 보급소 미닫이문을 힘껏 열었다. 하지만 총무의 고물 계산법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리 박했다. 이것저것 따지더니 현금과 합하여 총 이십팔 원뿐이 안된다며 엎드리라고 했다. 일원에 한 대씩 맞으라며 엉덩이를 굵은 나무로 내리쳤다. 겁에 질려 아픈 줄도 몰랐다. 내일 다시 와서 못 채운 오원을 입금시키라고 했다. 그곳을 빠져나오니 엉덩이의 아픔보다 처음 느껴보는 알지 못할 서러움에 한여름 땀방울처럼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요즘엔 백 원으로 살 수 있거나 단독적으로 써먹을 것이 없다. 그래서 백 원은 아이들도 쉬이 보아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는다. 떠나가는 세월의 흐름만큼 돈 가치도 뚝뚝 떨어졌다. 당시 나에게 일원은 한 대씩 매로 대신한 고귀하고 눈물겨운 가치였다. 백 원을 매만지며 그때보다 백 배는 더 성장했어야 할 나를 돌아보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땀보다 눈물을 더 많이 흘렀던 어릴 적 여름날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