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했던 추억이 담긴 향에 대해
몇 개월간 해오던 알바를 그만둔 후 백수인 상태로 집에만 박혀 있었다. 다들 취업에 성공해 열심히 근무할 시간에 나는 한가로이 누워 휴대폰만 만지고 빈둥대고 있는 현실이라니, 부모님께 죄송했다. ‘몇 십 년간 나를 위해 투자한 돈이 아까우시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죄책감이 들었다. 노력하지 않는 내 모습에 자기혐오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방에만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뇌 깊숙이 자리 잡고 파고들어 나를 괴롭혔다. 잘못된 행동임을 알면서도 잘못을 인정하기 부끄러워 회피하고 우겨버리는 어린아이처럼 현실을 회피하고 덮어버렸다. 그러고 나니 내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지 근본적인 삶의 이유조차 잊어버리게 되었고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기 시작했다.
뭐든 시작하면 열심히 하는 성격이지만 항상 시작이 어려워 미루고 미루다 결국은 안 하게 된다. 이런 내가 한심하고 멍청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책한다고 바뀔 현실이었으면 이미 바뀌었겠지, 달라지는 건 없다며 마인드 컨트롤을 해본다. 이런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일상 속의 작은 행동이라도 실천으로 이어 나가 성취감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무조건 하루 한 번 30분 이상 산책하기. 일상 속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첫 번째 목표였다. 목표를 세우자마자 집 밖을 나섰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상쾌한 공기와 시원한 바람은 날 활기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한 20분 걸었나, 어디선가 달달하고 싱그러운 향이 은은하게 나길래 둘러봤더니 아카시아 꽃이 펴있었다. 이사를 온 후 이 동네엔 아카시아 나무가 없어 거의 잊고 지냈는데 향을 맡자마자 10년 전 옛 동네에서의 기억이 생생하게 났다.
초등학생 시절 내가 살던 집은 학교 바로 뒤에 위치해 있었다. 학교에서 1분 거리에 있어 등·하교할 때 매우 유리했고 대문을 열면 푸릇푸릇한 잔디에 놓인 돌다리를 폴짝 뛰어 집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냉장고엔 엄마가 깎아 놓은 참외와 한 입 크기로 잘라 놓은 수박이 락앤락 통에 가득 차 있다. 더위에 지쳐 녹기 일보 직전인 나는 과일들을 꺼내 허겁지겁 먹고 머리가 띵해질 때까지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다.
초등학생의 하루는 꽤나 바쁘다. 아침에는 학교 가랴 저녁에는 친구들이랑 동네 탐방하랴 하루가 40시간이라도 모자랐다. 대충 요깃거리로 배를 채우고 나면 다시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동네를 뛰어다녔다. 긴 나무 막대기 하나를 주워 동네 뒷산에 올라가 친구들과 땅을 벅벅 긁으며 땅 속에 박힌 돌멩이들을 빼내거나 동네 탐방이 지겨워질 때면 학교 운동장에 가 사방치기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하루는 친구들 없이 혼자 동네를 걸어 다닌 날이 있었다. 그날따라 새로운 길로 가보고 싶었고 처음 가보는 길을 따라 쭉 걸어갔다. 그곳엔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주변으론 풀이 우거져 있었는데 나무에는 하얗고 길쭉한 아카시아 꽃이 활짝 펴 있었다. 당시 좋아하던 아이가 있었던 나는 이파리를 하나 떼어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한다 안 한다로 점치다가, 안 한다가 나오면 이파리 하나를 더 떼어 어떻게든 좋아한다가 나오도록 했었다. 그땐 참 귀엽고 순수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지. 이파리를 하나씩 떼어가며 결과를 기다리던 어린 나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완벽한 아지트 같았던 장소를 친구들과 공유하기 위해 다른 날 그곳에 친구들을 데려갔다. 친구들을 데려갔을 땐 나무 위에 벌들이 집을 짓고 있었는지 우리를 침략자로 간주한 벌들이 미친 듯이 윙윙거리며 우리에게 날아왔다. 친구들과 나는 뒤도 안 보고 줄행랑을 쳤고 우린 그 이후론 그곳에 발도 디딜 수 없었다. 분명 트라우마로 남을 만큼 무서웠던 순간이었는데 내 머릿속엔 그곳에서 좋아하는 아이를 떠올리며 이파리로 사랑점을 치던 내 모습이 더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이런 작은 에피소드 하나에도 웃음이 나고 행복해지는데 우울해하고 자책만 하던 시간이 아까워졌다. 작은 행복 조각을 하나하나 모으고 쌓아 우울의 우물에서 벗어나야지.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삶의 이유를 찾아야지. 작은 실천을 통해 얻게 된 교훈은 내게 너무나도 소중했다.
산책하며 본 아카시아 나무는 이제 막 꽃 피우고 생생해 ‘꼭, 꽃이 다 지기 전에 다시 와야겠다.’라고 다짐했었는데 시간이 너무 빠른 탓일까. 향이 잊힐 때쯤 다시 간 곳에는 꽃은 지고 이파리만 무성한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다시 꽃이 필 내년을 기다려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