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한자를 찾아보니 소통의 한자는 '疏通'으로,
'소통할 소(疏)'와 '통할 통(通)'의 합성어로, 뜻이 서로 통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간혹 불통을 넘어 우리를 하소연할 소(訴) 양동이 통(桶)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 듯하다.
나는 최근 협력 부서 중 한 분에게 컴플레인을 받았다.
제대로 된 브리핑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3주 가까이 특정 인원의 갑작스러운 퇴사로 누구에게 백업을 받을 수 있는지,
누구에게 앞으로 소통을 해나가면 될지, 브리핑을 해야 할지조차 확인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중요 미팅 이틀 전 오후 갑작스럽게 이 미팅을 도와주기 위해 배정된 이는 자신이 어디 소속이고 어떤 일을 담당하는지 소개조차 없었고,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팅을 준비하기 위해 간략한 배경과 미팅의 어젠다를 메일로 공유한 상황이었다.
사실 그 인원이 배정되기 전까지 협력 부서의 여러 사람으로부터 이 미팅에 대한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고 그에 대해 하나하나 답을 드렸지만
상대는 왜 이 질문을 하는지 어떻게 도와주기 위해 이런 정보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
나는 성심성의껏 답변했지만 그 이후 상대는 그저 ‘무응답’일 뿐이었다.
물론 그 이유 중 하나가 그 누구도 이 일을 자신의 일로 만들고 싶지 않아,
나의 답변에서 ”이유“를 찾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도움이 필요했기에 한 분 한 분 도움을 주실 수 있는지 미팅에 대한 배경을 설명 제공했다.
그런 노력과는 무색하게도 돌아온 컴플레인 메일에는
나의 매니저 그리고 상위 매니저를 포함한 내가 모르는 이들이 여럿 들어있었고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이후에도 이 컴플레인을 보낸 상대는 업무 메신저를 통해 장문의 업무 협조를 요청했는데,
그 내용은 아주 일방적인 자신의 ”업무 방법“을 주입하는 식의 내용이었다.
보내주신 내용에 대해 나의 생각과 의견을 묻는 제스처를 취해도 그는 그만의 독백을 이어갔다.
나는 이 불통이 나로 인한 것인지.. 성찰하기 위해 지속해서 내가 쓴 메시지를 다시 살펴보고 그다음 답변을 여러 차례수정하며 소통을 시도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그의 길고 긴 독백에 마음이 점점 답답해진 나는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쓴 문장에 폭력적이거나 옳지 못한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 왜 나는 자꾸만 누가 내 목을 조르는 느낌인 걸까?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나와 ‘소통’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나를 ‘하소연 양동이’따위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업무 습관과 방향성,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냥 쏟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지난 시간 동안 내가 간혹 프로젝트의 리더로서 왜 ”무섭다 “, ”숨이 막힌다"라는 피드백을 받았었는지 깨달았다.
나 또한 목표‘만’을 중심으로 소통이 아닌 내 생각을 쏟아내기에 바빴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게 타인에게 얼마나 폭력적인 행동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진짜 ’ 역지사지’의 순간이다.
이제 나는 그의 독백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상황을 다시 돌아보았다.
나는 계속 이 독백을 상대하며 그의 ‘하소연 양동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의 무례함에 맞서 싸울 것인가?
나는 그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며,
본래 퇴사자의 조직에서 백업 플랜이 만들어져 지속성 있는 서포트가 가능하다면
우리가 본래의 업무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그의 ‘도움의 손길‘을 내려놓았다.
가끔은 필요 없는 전쟁을 피하는 것이야말로 업무에 필요한 외교적 스킬이다.
짧지만 인상 ‘깊은’ 그와의 전쟁 같은 한 주를 끝내고 집에 돌아온 나는 Leo에게 ”난.. 지금 사람의 형체조차 보고 싶지 않아..”라며
찔리고 질려버린 내 마음을 Leo는 따듯한 체온으로 덮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