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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진실, 그리고 사랑의 이해 (@흔희)

드라마 사랑의 이해 완주한 지금의 마음을 담아

by 땡비

네 명의 남녀가 있다. 아침을 맞이하는 풍경이 그들의 계급을 보여준다. 은행에서 청원경찰을 하고 있는 정종현은 인스턴트커피를 마신다. 서비스직군으로 예금과 출금이라는 한정된 업무만을 보는 안수영은 물을 끓이고 드립 커피를 내린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해 가계가 곤란해진 상황에서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하상수는 강남 8 학군 출신이다. 명문대를 졸업한 그는 은행에 수석으로 채용되어 계장으로 근무 중이다. 그는 캡슐 커피를 마신다. 대기업 회장을 아버지로 둔 박미경은 특혜를 거부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대학 장학금을 타고 커리어를 만들어가며 은행에서 대리로 근무 중이다. 그녀는 커피 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상태에 놓이는 경향성은 내 의지와 무관하다. 마음을 거두고 싶지만 마음이 자꾸 간다. 그 사람이 보인다. 안수영과 하상수는 아마 처음부터 서로에게 끌림을 느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기는 하지만 상수와 수영에게는 극복해야 하는 환경적 제약이 있다. 그 벽이 상수보다는 수영에게 좀 더 높을 뿐. 벽을 늘 마주하며 살며 선택을 해야 할 때 둘은 주저한다. 대상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상수는 힘겹게 노력하지만 어느 정도는 성취해 내는 삶을 살았다. 수영도 있는 힘껏 노력한다. 조금만 더 하면 평범함이란 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변부에 서성인다. 수영에게 허락되는 것은 그 정도까지다.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 많은 것들을 감내하고 애써야 하는 고단함을 수영과 상수는 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다. 수영은 감정을 부정하고 상수는 감정은 인정하나 행동으로 끌어내지 못한다. 상대의 반응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행동의 기준을 내가 아니라 상대의 반응에 둔다.


수영에 대한 커져가는 마음을 상수는 표현한다. 자신의 마음을 꺼내보기로 하고 수영과 약속을 잡는다. 관계에 대해 매사에 진지한 상수는 수영의 손을 잡기에 앞서 망설인다. 누군가를 내 삶 속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 자체를 끌어안는 일이다. 우여곡절이 많은 수영의 삶을 끌어안아야 한다. 수영에게 가던 발걸음을 멈춘다. 주저한다. 그러곤 이내 마음을 먹고 수영에게 달려간다. 허겁지겁 도착한 자리에 수영은 없다. 먼저 도착했던 수영은 망설이는 상수를 봤고 실망한다. 자리를 떠나버린다. 상수에게는 망설였지만 결국은 수영에게 간 ‘행동’이 중요하지만 수영에게는 망설인 상수의 ‘마음’이 중요하다. 이를 기점으로 둘은 계속 어긋난다.


자신이 기대하는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을 부정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오류이다. 예를 들어 꽃을 선물해 주는 상대의 행동에서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꽃을 선물해주지 않는다고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가 생각하기에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행하고 사랑의 경향성을 유지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수영의 인지적 오류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자신에게 달려와주는 그의 모습을 기대했으나 상수는 수영의 이상에 백 프로 부합하지 못한다. 인생은 사건의 연속이고 그 속에서 우리는 사실과 진실을 구분해야 한다. 사실은 우리 삶에서 일어난 사건 그 자체이다. 그리고 진실은 우리가 겪은 경험(사실)에 내가 부여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지탱해 나가는 것은 무수히 겪고 스쳐가는 사실이 아니다. 경험이 점과 같은 개념이라면 삶은 그 점들이 무수히 모여 이루어지는 선적인 개념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점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선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서 점을 조망해야 한다. 전체와 부분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며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할 때, 우리는 삶의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고 내 인생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부여할 수 있다. 소망하고 기대했으나 좌절되어 버린 경험들이 많았던 수영은 경험에 하나의 명제(의미)를 부여한다. ‘갖지 못한다면 내가 먼저 버린다.’ 망설이는 상수의 모습에서 수영은 전체를 조망하는 시야를 닫아버린다. 선을 보지 못하고 점에 매몰되어 관계를 회복하고자 다가오는 상수를 매몰차게 거부해 버린다. 망설였지만 결국 수영이 있던 곳으로 갔던 상수의 선택을 보지 못한다. 망설임 이후 수영에게 다가온 상수의 발걸음에 수영이 시선을 두었다면 둘의 관계는 아마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영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노력한 만큼 손에 쥐어주지 못한 사회의 견고한 벽을 탓하고 싶다. 상수가 수영보다는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도, 수영이 소극적이나마 상수를 밀어내는 선택을 통해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내고자 했던 것도 결국은 그들이 겪어온 삶의 경험과 궤적을 같이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종현에게는 그러한 선택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수영과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종현은 주체적인 결정을 할 기회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종현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지는 수영은 오히려 종현과의 관계에서는 주도적이다. 관계의 시작, 지속, 끝이 모두 수영의 선택이었으며 종현은 그저 수영의 선택에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청원경찰을 하며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종현은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제대로 시험에 집중할 수 없었다. 수영에게는 그나마 허락되었던 기회들이 종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손에 무언가를 쥐기는커녕 노력조차 제대로 시작해보지 못하는 삶, 그것이 종현의 삶이었던 것이다. 관계에서의 수동성은 그 삶에서 기인한다.


반면에 미경은 관계에서 가장 주도적인 인물이다. 자신에 대한 감정이 백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며 상수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미경은 감정에 충실하다. 상수에 대한 호감을 느낄 때도, 수영을 마음에 두고 있는 상수를 보며 불안할 때도 미경은 온 마음을 다해 관계에서 최선을 다한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불안해한다. 끝내 이별을 고하는 상수의 사과에 미경은 관계가 끝이 났음을 납득하고 지나간 시절을 마무리한다. 해외 파견근무를 신청하고 이별의 사유를 장거리 연애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이별의 유책이 상수에게 있으나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뒷말이 많이 도는 은행 조직에서 끝까지 상수를 배려하며 그를 파괴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장한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 또한 아빠처럼 자기가 편한 방식으로 상대에게 사랑을 주고 있지는 않았나. 늘 돈으로 때우려는 아빠의 사랑이 불만이었고 자신에게 따라붙는 부자라는 꼬리표를 극복하고자 발버둥 쳤던 미경이다. 그녀는 상수와의 사랑을 통해 깨닫는다. 아빠의 사랑 또한 사랑이었음을. 자신도 상수에게는 아빠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음을. 나의 미숙한 부분과 마주하고 그런 나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빠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며 불완전한 나를 다듬어나간다.


관계에 있어 종현은 수동적이었고 수영은 방어적이었다. 상수는 우유부단했으며 미경은 주체적이었다. 이들의 차이는 그들이 처한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네 인물들은 자기 인생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현실에 주저앉지 않는다. 수영의 배신에 대한 상처로 자신을 파괴했던 종현은 수영이 선물해 준 시계, 수영이 찍어줬던 수험표 사진을 보며 연민 또한 사랑이었음을 이해한다. 수영과 상수는 놓쳐버린 기회와 타이밍을 되돌아보며 지나간 시절에 대한 감상과 가능성들을 성찰한다. 미경은 수영과 마주하며 감정을 덜어내고 관계를 다독인다. 타인에게 매몰되어 있던 감정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내 삶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일은 일어난 것이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 해석이 나를 파괴하는 방향이 될지, 커가는 방향이 되게 하는지 또한 내가 결정한다.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으나 그 현실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삶을 꾸려나가는 네 인물들의 행보가 찬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이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경찰이 된 종현이 신호등 아래에 서 있다. 길을 가다 멈춰 선 수영은 그런 종현을 바라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긴다. 등을 지고 걸어가는 수영을 보던 종현은 수영에게 경례를 한다. 경찰이 되면 제일 처음으로 수영에게 경례를 하겠다는 약속을 지킨다. 각기 다른 이해(利害)를 가진 이들이 서로를 만나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이해(理解)한다.


만남은 한 시절이었고 삶은 이해의 연속이다. 그렇게 삶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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