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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Sep 16. 2021

나는 낀 세대다

#꼰대 #고인물 #낀 세대 #어른 #성장통

나도 어느새 꼰대가 되어버렸다


나도 어느새 지금 시대의 아이콘인 MZ세대들에게 '꼰대'와 '고인물'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녹녹지 않았던 내 삶의 여정에서 내가 경험하고 터득한 삶의 지혜와 통찰이 MZ세대들에게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을 의미한다. 특히 내 자녀들과의 인식의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그 간극(Gap)이 더 벌어지고 있다. 어느덧 나의 모든 삶의 방식과 태도, 생각과 언행들은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나 통용될 법한 그런 고전적인 스토리가 되어버렸다.


60~70년대에 걸쳐 유년시절을 보낸 내게 있어 가난과 결핍을 극복하는 모든 삶의 여정은 생존이라는 단어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가난과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절박하게 몸부림치면서 내가 해왔던 모든 노력과 도전, 그리고 그 결실에 대한 자서전적이고 교훈적인 성장 스토리들은 가난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내 자녀들에게는 마치 제3세계의 가난한 나라에서나 일어날 법한 고전적이고 진부한 이야기로 치부되어 버렸다. 왜 이렇게 세대 간 간극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유년시절 가난과 결핍에 대한 깊은 깨달음(각성)을 얻다


어느 정도 자의식이 싹트는 유년시절에 나는 가족과 함께 대도시에서도 한참 외곽지역인 개발제한구역의 한 외딴 동네로 이사를 갔다. 제대로 된 살림살이도 없었던 우리 여섯 식구는 부엌도 없는 두세 평 남짓의 단칸방에서 힘겨운 셋방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 당시 아버지는 어디로 가신지 알 수도 없었고, 네 명의 자식들을 챙겨야 하는 어머니는 집에서도 아주 먼 거리에 있는 농산물 가공 공장으로 자식들을 떼어놓고 새벽같이 일을 하러 나가셨다. 차비 한 푼이라도 아끼시려고 매일같이 그 먼 길을 걸어서 왕복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난다. 밤늦게 여성의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오는 길이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막내인 나를 제외하고는 형과 누나들은 모두 학교에 다녔고, 나는 하루 종일 마당 한켠에 있는 우리 속의 토끼와 대화하면서 하루종인 어머니만 오시길 기다렸다. 그 길고 긴 하루라는 시간들을 허기와 그리움으로 달래야만 했다. 밤늦게 오시는 어머니는 나를 위해 항상 토끼풀을 한 움큼 뜯어서 품에 안고 오셨는데 하루 종일 외롭게 토끼만 보면서 어머니를 기다리던 막내를 위한 당신만의 작은 배려였다. 밤늦은 시간에도 어머니는 젖은 수건으로 막내인 나의 몸 이곳저곳을 깨끗하게 닦아주셨다. 나는 내 몸 이곳저곳을 닦아주시던 어머니를 졸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이내 졸음을 못 이기고 쓰러지곤 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가난이 싫고 부끄러웠다. 지독한 가난을 경험하면서 자란 나는 어른이 되면 절대 내 자식들은 집 없는 설움을 경험하지 않게 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을 했다. 가난과 결핍은 내 마음의 근육을 키웠고, 내 삶의 남은 여정을 더욱 단단하고, 성장하게 만들었다. 어찌 보면 삶이란 끝없이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결핍과 마주하는 과정이다. 결핍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으면 행동의 기제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줄곧 어른이 되면 좋은 집에서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어쩌면 좋은 집은 내 삶의 여정에서 가장 큰 소망이었다.



집을 향한 삶의 고단한 여정이 시작되다


한국 전쟁 후 가장 인구가 증가한 때가 60~70년대이다. 그 당시 한해 출생인구는 100만 명이 넘었다. 학교에서는 한 반에 60명은 기본, 심지어 80명이 넘는 아이들이 함께 공부를 했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더불어 새마을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고, 대한민국의 경제가 고도성장을 하면서 부동산 시장 또한 상전벽해를 맞게 되었다.


90년대는 대기업에 입사해 딴짓 안 하고 열심히 일하고, 아껴서 저축하고 돈을 모으고, 대출을 조금 받으면 소형평수대의 아파트 한 채를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지금처럼 아파트의 인기도 높지 않았던 시점이다. 나 또한 대기업에 취업을 했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후에는 정신을 차리고 미래에 태어날 아이들의 안정적인 보금자리를 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아끼면서 열심히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내가 아는 유일한 재테크 방법은 저축뿐이었다.


큰 애가 다섯 살, 둘째가 세 살 무렵 나는 드디어 도심권 외곽지역에 대출을 끼고 23평대의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다. 그때의 기쁨은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얼마 되지 않은 대출금액이지만 레버리지라는 개념이 없었던 그 당시에는 빚이라는 왜곡된 생각 때문에 심적인 부담이 엄청 컸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행히 우리 자녀들은 내가 경험한 가난과 결핍을 경험하지 않게 되어서 내심 너무 뿌듯했다.


나와 궁합이 맞는 집을 마침내 찾다


집에 대한 집착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대출을 갚고, 적금 만기로 목돈이 생기자 나는 대범하게 이전보다 훨씬 큰 금액의 대출을 받아서 예전부터 꼭 살고 싶었던 고층의 30평대 주상복합 아파트로 주거지를 업그레이드하게 되었다. 물론 이전보다 훨씬 큰 대출 금액 때문에 아내가 펄쩍 뛴 것은 당연했다. 이사하고 가장 좋아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아내였다. 넓은 주방과 거실, 두 개의 화장실 등은 아내를 사로잡기 충분했다. 아이들 또한 방마다 이어진 베란다 통로를 계속 뛰어다니며 깔깔대며 좋아했다. 아래층이 오피스텔 동이어서 층간 소음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아파트로 이사한 후부터 그간 꼬여만 가던 내 삶의 실타래가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직장과 도보 삼분 거리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출퇴근도 매우 편리했다. 직장에서는 좋은 평가로 급여도 올랐고, 유통의 꽃이라고 불리는 점장으로도 승진을 하게 되었다. 용기를 내서 투자한 펀드 수익률도 단기적으로 매우 좋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 욕심 없이 가지고 있던 비상장주식도 기업공개(IPO)를 하면서 목돈까지 생기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집에서 가족들과 보낸 시간들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집도 사람과의 궁합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내가 살고 싶었던 집이 내게 준 삶의 선물들은 어쩌면 집과 나의 좋은 궁합의 결과였던 것 같다.



역마살을 만드는 아파트를 만나다


그 이후로도 집에 대한 나의 집착은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 멈추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난 출퇴근하면서 눈여겨보던 아파트가 할인 분양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를 꼬드겨 집 구경을 하러 갔다. 또 무모하게 뒷수습도 생각하지 않고 계약을 체결해 버렸다. 물론 자금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아내는 펄쩍 뛰며 반대를 했다. 아이들 또한 중학교,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라 쉽지 않은 이사 결정이었다. 하지만 나의 고집과 집착을 꺾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사를 한 후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기존 아파트가 제 때 팔리지 않아 은행에 무리한 대출까지 받게 되었고, 이자 또한 감당되지 않아 월급이 동나기 시작했다. 급매로 내놓은 기존 아파트가 제값에 팔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원금을 갚으려고 하니 대출 중도상환 수수료까지 과도해 손해가 이만저만 적지 않았다. 그 집을 만난 후 난 역마살이 끼었는지  10년 넘도록 대전, 서울, 부산 등지로 발령을 받게 되어서 전국을 떠돌게 되었다. 어쩌면 그 집과 난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내 삶은 집 장만의 여정이었다


어쩌면 내 삶은 내가 원하던 집을 마련하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해도 될 만큼 집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집은 내 삶의 치열했던 삶의 여정과 말 못 한 숱한 사연들이 담겨 있다. 그 삶의 고단한 여정이 지금 내 자녀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진 않겠지만 말이다.


내게 있어 집은 가족의 보금자리이자 경제적 자산이었고,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게 하는 그런 수단이었다. 하지만 자녀들에게 집은 더 이상 가족의 보금자리가 아닌 개인의 공간, 개인의 취향을 반영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집에 대한 나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개똥철학은 어쩌면 내 자녀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무용담이 되어 버렸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대학교 시절에 잘박하게 사회 준비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위도식과 안빈낙도의 걱정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자녀들을 볼 때마다 난 나처럼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밀려왔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식사자리에서 내 인내심의 한계를 참지 못하고 분노의 훈계질(?)을 몇 번 하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공감을 하지 못하면 그건 잔소리가 된다고 하지 않은가. 나의 잔소리를 참다못한 아내는 가족의 분위기를 저해하는 나의 불성실한 행태에 매스를 들게 되었고, 결국 나는 침묵을 선택하는 것이 가족의 행복을 지키는 일임을 전쟁터의 패잔병처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끼인 세대다


어쩌면 50대인 우리 세대는 부모를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고, 자식까지 돌봐야 하는 첫 번째 세대가 되었다. 지금처럼 집값이 천정부지를 뚫고 치솟는다면 취업을 하더라도 내 자녀들은 부모의 도움 없이는 아마 영원히 내 집 장만을 할 수 없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대학만 졸업하면 독립을 시키겠다는 부모의 오랜 가르침 때문인지 자녀들은 얼마 남지 않은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매우 걱정하고 있다.


출처 : 셔터 스톡


'N포 세대'


'N포 세대'라는 말이 있다.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오포 세대(취업, 내 집 마련)를 넘어 칠포 세대(인간관계, 희망)라는 말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구포 세대(건강, 외모관리)라는 말까지 생겼다. 꿈도 희망도 없는 삶에 비관해 '삶'까지 포기한다고 십포 세대라는 용어까지 생겼다. 하나하나 부르기에도 힘들니 이 모든 것을 합쳐 'N포 세대'라고 부른다. 정말 'No money, No hope'라는 뉴욕시의 한 거지의 구호가 생각난다.


외식을 하면서 자녀들에게 물어보니 둘 다 결혼도 안 하고, 집 장만도 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우리 자녀들처럼 미래를 위한 집 장만을 하지 않으니 아마 오늘을 사는데 더 많은 돈을 쓰고, 그것이 어쩌면 지금 세대의 욜로(YOLO)의 가치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지금의 세대는 역사상 부모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그런 불우한 세대일 것이다.


국토교통부 주거실태를 보면 내 집 마련을 포기하겠다는 대답이 30% 이상이 넘었다고 한다. 만약 요즘 시대에 내가 다시 태어났다면 아마 집 장만하는 것을 영원히 포기했거나 아니면 집 장만하느라 평생을 노역하면서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삶의 가치와 기준이 다른 세대에게 구 세대의 삶의 가치와 기준을 들이댄다면 아마 그것이 바로 꼰대이고 고인물이라고 생각한다.


MZ세대, 그들만의 세상!


지금의 MZ세대들은 우리들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 때는 기가 세고 목소리가 커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MZ세대는 성격이 부드럽고 기가 세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그런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꼰대 같은 잔소리를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하게 된다. 그들의 얘기를 많이 들어주고, 혹시 못 도와주더라도 옆을 지키면서 힘이라도 되어 주어야 한다고.


우리 세대는 참 이기적이다


난 항상 대학교만 졸업시키면 부모로서 모든 책임과 역할이 끝났고,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은 자녀들의 몫이라고 말해왔다. 아이들도 그런 나의 태도가 단호했는지 이제는 담당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대학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두 명의 자녀들이 최근 졸업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서로에게 하는 대화를 엿들으면서 나는 그간 해왔던 정신 교육의 효과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한편으로는 흐뭇해했다.


우리 세대는 30년을 일하더라도 남은 40~50년간의 세월을 견뎌야 하는 잔혹한 현실과 조만간 조우하게 될 것이다. 우리 부모님들과 달리 지식들에게 보살핌을 받을 수도 없는 그런 세대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녀들에게 원치 않은 독립을 강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와 달리 자녀들에게 매우 이기적인 부모가 된 것이다.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얼마 전부터 알게 된 금융권 선배 한분이 자녀들 얘기를 하면서 내게 던진 한마디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아이가 태어난 것도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었고, 또 그 아이가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하고, 아이를 빨리 내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의 도리가 아니라고 따끔하게 충고를 했다. 만약 대학에 못 들어가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내가 데리고 살면서 작은 가게라도 챙겨주면서 끝까지 돌보겠다고까지 말했다. 아이들에게 무조건 강한 독립심만을 강요했던 내게 큰 화두를 던지는 의미 있고도 충격적인 충고였다.


아버지는 사랑은 외(外) 사랑이 아니라 내(內) 사랑이라고 누가 그랬던 것 같다. 아버지로 살다 보니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매우 서툴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지만 세렝게티와 같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만 하고, 또 강하게 키우고 싶은 것이 어쩌면 아버지의 욕심이자 바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욕심과 바람도 이제 나이가 드니 자꾸만 약해진다. 내 아이들도 언젠가는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내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 것이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만 자식을 이겨서라도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그들을 최대한 시행착오나 후회가 없도록 이끌고 싶은 것이 지금의 솔직한 내 심정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쩌면 내가 우리 부모님에게 저질렀던 카르마(Karma) 나와 내 자식들 간에도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들아, 딸아! 아빠는 너희들이 하루빨리 삶의 극적인 변화를 맞을 수 있는 깨달음과 각성의 시간이 빨리 오길 바란다. 그리고 항상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혹시 힘들면 다시 와서 기대도 된다. 함께 잘 헤쳐 나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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