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ners maketh man #주도 #술자리 예절 #칠사제 #품격
신입사원 시절 난 직책이 오를수록 직장생활이 편하고, 꽃필 줄 알았다. 사실 내가 신입사원 시절에는 어느 정도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과장급 정도의 중간 간부만 되어도 하는 일없이 그냥 결재 도장이나 싸인만 하면 되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그 당시 조직관리에 있어 가장 큰 동기부여는 바로 술자리였다. 그러니 퇴직 후 술자리가 허구한 날 이어졌다.
그 당시 신입사원으로서 인정받는 길은 업무적 능력보다는 술자리에서 살아남는 강인한 체력, 그리고 선배들의 마음을 헤어리는 주도(酒道, 술자리 예절)에 의해서 크게 좌우되었다. 특히 얼마나 많은 선배들과 술자리를 참석해서 인간관계와 인맥을 맺었는지가 개인의 평판으로도 이어졌다.
당시 S그룹은 '신경영'이라는 기치 아래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하는 '칠사제'라는 제도를 구현했는데 원래 취지는 정신이 맑을 때 일에 집중하고, 일찍 퇴근해 운동이나 취미활동 등의 자기 계발을 강화하자는 취지였다. 오후 4시만 되면 사무실을 강제로 '셧다운'까지 하니 퇴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워라벨'을 추구했던, 그리고 시대를 앞서갔던 제도였다.
남들이 한창 일하는 시간에 퇴근해서 술자리가 시작되니 그야말로 술자리의 흥은 배가 될 수밖에 없다. 스트레스가 많은 업의 특성상 '부어라 마셔라' 하다 보면 1차에서만 인당 2병 정도는 기본이었다. 그렇게 2차, 3차까지 이어져도 시계를 보면 오후 9시가 넘지 않으니 이게 무슨 조화인지, 술자리는 이전보다 더 많아졌고, 주량은 더 늘어갈 수밖에 없었다.
군 장교생활을 하면서 배운 주도(酒道)는 그 당시 술자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요즘은 코시국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와 비대면 트렌드로 술자리가 거의 없지만 그 당시만 해도 술자리는 삶의 중요한 일부였기 때문에 주도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것은 인간관계와 인맥을 만들고, 구축하는데 유용했다.
한 번만 알아두면 직장 또는 사회생활에서 연장자들과 술자리를 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구시대적 유물이지만 오늘 잠시 주도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썰(說)을 풀도록 하겠다.
술자리를 할 때 제일 먼저 윗사람이 앉는 자리부터 확인해야 한다. 술자리에서 상석은 종업원이 음식을 서빙할 때 불편함이 없는 자리 즉, 출입구에서 볼 때 벽을 등진 안쪽 자리의 중간이 되시겠다. 그 자리에 앉으면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알 수 있고, 좌우의 많은 사람들과 골고루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술자리의 기본은 상사가 앉을자리를 사전에 확인하고, 올 때까지 비워놓아야 하며, 오면 옷을 받아주고 안내하는 센스가 있어야 한다.
술을 따를 때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잔을 드리는 것이 예의다. 술을 따를 때는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따르면 된다. 위 사람에게 술을 권할 때는 오른손은 상표가 안 보이도록 잡고, 왼손으로는 술병을 받친 후 공손하게 술잔의 70% 정도까지 따르면 된다. 참고로 상표를 가리는 이유는 값싼 술이기 때문이며, 술잔의 70%를 따르는 것은 원샷의 부담을 줄이려는 배려 차원이다.
상사로부터 술을 받을 때는 양손으로 잔을 받쳐서 공손하게 받은 후 잠시 입술에 잔을 댄 후 식탁에 올려놓으면 된다. 만약 상사가 먹던 술잔을 내게 건넨다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두 손으로 술잔을 공손하게 받은 후 식탁에 놓지 말고 바로 잔을 비운 후 다시 그 잔을 상사에게 건네면서 술을 따르면 된다. 상사와 건배를 할 때는 상사보다 잔의 위치를 낮추어야 하며, 술을 마실 때에는 고개를 돌려서 마셔야 한다.
술을 못 먹거나 못 마실 상황이라도 상사가 주는 술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그럴 경우에는 일단 잔을 받은 후 탁자에 올려놓았다가 건배가 있을 때마다 함께 잔을 들어 건배를 외친 후 바로 식탁에 놓지 말고 잔에다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살짝 떼는 시늉만 한 후 잔을 내려놓으면 된다. 나 때문에 술자리의 분위기를 깨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안주를 시킬 때는 연장자에게 먼저 물어본 후 시키면 된다. 가급적 연장자가 좋아하는 안주를 알아두는 것이 좋을 때가 많다. 만약 찌개나 탕류가 나오면 연장자가 불편하지 않도록 앞접시에 들어서 건네주는 것도 팁이다. 안주빨을 너무 세우면 안 된다. 술값 계산 때 결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장자 앞에서 절대 취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주도를 잘 지키더라도 취하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만약 취기가 오르면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말고, 잔에 입만 갖다 대는 식으로 분위기만 맞추면 된다. 상사가 술값을 계산할 때도 옆에서 상사의 카드를 대신 계산하거나 아니면 계산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면 좋다.
마지막으로 술자리가 끝난 후 대리운전까지 챙기면 모든 게 끝난다. 술자리는 잘하면 덤이요, 못하면 견공이 된다는 얘기가 있다. 직장에서든 사회생활에서든 연장자를 만날 때 주도를 알면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되니 위의 주도가 너무 고인물 세대의 이야기라고 치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그의 수필집 《사랑과 지조》에 '주도유단(酒道有段)'이라는 수필을 쓰면서 주도에도 바둑처럼 엄연히 단(段) 있다고 말하면서 "술을 마시면 누구나 다 기고만장하여 영웅호걸이 되고 위인 현사도 안중에 없다. 그래서 주정만 하면 다 주정이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을 주력(酒曆)과 주력(酒力)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MBA 과정에서 조사한 설문에서 CEO의 성공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인으로 93%가 '대인 관계의 매너'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매너는 그 사람의 품격이고 인격을 말하며, 상대를 존중해주고, 배려하는 진실한 마음가짐을 말한다.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을 보면 주인공 해리(콜린 퍼스)가 멋진 클래식 슈트를 착용한 후 펍을 문을 잠그면서 한 명대사가 있다. "Manners maketh man. Do you know what that means?" 전문직이나 교수처럼 배웠다고 다 매너가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매너는 '같은 옷 다른 느낌'을 만드는 자신만의 스타일과 멋을 만들어주는 고유한 무기(unique weapon)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