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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Mar 03. 2022

삶의 고통이 찾아올 때

#삶의 본질은 고통 #고집멸도 #싯다르타 #쇼펜하우어 #견딤의 인생

"이미 일어날 일이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면 꽃향기라도 맡아야죠"


영화 <12 몽키스>에서 태어나서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 제임스(브루스 윌리스)에게 강제 동행을 해야만 했던 캐서린(매들린 스토우)이 내뱉은 말이다. 마치 모든 걱정과 번뇌를 벗어난 현자처럼 이왕 죽을 목숨이라면 남은 시간은 마이애미 해변으로 날아가 함께 사랑이라도 나누자는 뜻이었다.





어릴 때 난 혜은이와 최문정이 불렀던 '파란 나라'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즐겨 듣고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정말 순진했는지 노래 가사처럼 보이지 않는 저 너머 어딘가에 파란 나라가 꼭 있을 거란 생각을 했었다. 꿈과 희망, 천사와 맑은 강물이 있고, 울타리가 없는 그런 세상 말이다.


성인이 된 후에도 난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엔 뭔가 특별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던 것 같다. 소위 정답이라고 불리는 대학 진학, 취업, 결혼, 육아, 집 장만 등 고된 삶의 여정에도 불구하고 난 행복의 행렬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젊음과 열정을 갈아 넣으면서 그곳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갔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그곳엔 정작 파란 나라는 없었고, 후회와 걱정으로 도배된 삶의 '허상(虛像)'만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마치 광기를 품고 인생의 환상과 허상을 쫒아다닌 돈키호테가 죽음 전에 느꼈던 쓸쓸한 감정의 결말처럼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단군이래 최대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음에도 삶의 고통은 오히려 우리의 삶을 거침없이 집어삼키고 있다. SNS상에는 사람들의 분노와 욕설이 난무하고, 정신적 우울증과 심리적 허기를 겪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무한동력을 장착하고, 무한궤도를 폭주하는 설국열차처럼 삶의 불평등은 커져만 가고, 세대를 거듭하며 증폭되고 있다. 하루살이 같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루틴한 일상을 되풀이하지만 때론 가혹할 정도로 삶이 산산조각 나기도 한다.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본 사람이면 누구나 인생이 짧다고 말한다. 나 또한 50km의 인생 속도로 설국열차에 탑승해 종착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중이다. 퇴직 후 난 시간적 여유가 생겨 지나간 인생을 잠시 갈무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간 내가 조심스럽게 쌓아왔던 인생의 모든 거품이 빠르게 빠지면서 인생의 실체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삶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인생의 무상(無常)함'이 보았고, 삶의 허상(虛像)에 매달려 반백년을 헛되게 유실했다는 의구심도 들었다. 기원전 약 600년경 젊은 싯다르타가 목도한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이 나의 내면에도 꽈리를 틀기 시작했고, 어렴풋하게 그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인생의 본질은 행복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라는 사실 말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도 그렇고,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삶의 여정도 그렇고, 심지어 삶의 종착지인 죽음조차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돈이 없어서 고통스럽고, 어떤 사람은 돈이 많아서 고통스럽다. 어떤 사람은 결혼을 못해서 고통스럽고,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해서 고통스럽다. 아이가 없어서 고통스럽고, 아이가 있지만 말썽을 부려서 고통스럽다. 취업이 안돼서 고통스럽고, 취업이 되어도 상사와의 관계 때문에 고통스럽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삶이 갑자기 내 인생에 훅 치고 들어와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할 때 사랑의 고통이 생기기 시작한다. 사랑은 헌신과 희생, 인내심을 요구한다. 때론 자존감마저 버려야 할 때도 있다. 충족되지 못한 사랑에 몸부림치기도 하며, 포기하고 싶어도 견뎌온 세월의 무게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도 못한다.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난 후 찾아오는 권태와 지겨움도 고통스럽지만 이별의 상처는 평생을 따라다니기도 한다. 사랑의 결실인 결혼 또한 마찬가지다. 출산, 육아 등 무한적 생애 책임이 뒤따른다.


직장생활은 또 어떤가. 궂은 날씨, 몹쓸 몸상태, 개인적 형편 등은 기본적으로 감내해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루틴한 직장생활에 인생의 1/3 이상의 시간을 불안감, 걱정,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젖은 낙엽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다녀야 한다.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우린 수많은 의미 없는 관계 속에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어렵지 않을 때보다 어려울 때가 훨씬 많은 게 관계의 속성이다. 관계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고통이란 감정이 끊임없이 생성된다.


먹고살기 위해 노력하고, 뭔가를 이루려고 고생하는 것도, 그리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좌절하는 것도 고통이며, 남들이 잘되어서 배가 아픈 것도, 일을 못해 욕을 먹는 것도, 남에게 배신당해서 상처받는 것도, 고통 때문에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도 고통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을 키우는 동력은 사랑이다. 사랑은 고통을 덜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통을 생성하고 증폭시키기도 한다.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말이다.


고통은 또한 악마와 같은 존재다. 간음죄는 남편이 지었는데 고통의 몫은 아내와 자식들이다. 술을 먹고 차로 사람을 치면 피해자와 가족들이 고통을 받는다. 가해자는 심신 미약으로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이 되기도 한다. 악한 사람이 잘 살고, 착한 사람이 가난에 고통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통은 악마처럼 나약한 인간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고통(苦痛)은 사전적 의미로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을 뜻한다. 고통은 원래 우리 몸이 느끼는 통증 감각 중 하나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고난, 아픔, 고뇌, 슬픔, 분노, 번민, 답답함, 쓰라림, 외로움 등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철학적으로는 약간의 결핍, 순간적인 불편,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도 고통에 속한다. 이렇듯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고, 보편적이기까지 한 것이 바로 고통이다.




성인이 된 후 난 자기계발 서적에 자주 등장하던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을 온몸에 장착한 채 세상의 밝은 면만을 보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삶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날 뭔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회사의 직책이 올라갈수록 긍정의 심리학은 더 이상 내게 유효하지 않았다.


생각과 현실의 괴리가 더 커져만 갔다. '번아웃 현상'처럼 현실의 고통을 극복할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었던 탓도 있었다. 마인드셋(mindset) 이상의 뭔가가 필요했다. '삶의 미화와 치장'이라는 포장지를 뜯어서 그 속에 감춰진 민낯의 내용물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난 인생의 본질을 행복이 아닌 고통이라는 관점으로 다시 들여다보고 싶었다. 어쩌면 나의 무명을 광명으로 밝혀줄 수 있을 거란 작은 기대감도 있었다.


만약 인간의 삶이 고해()의 바다에서 허우적 대는 삶이라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러던 중 난 싯다르타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 해답을 어렴풋하게나마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기원전 약 600년경, 그것도 30대 젊은 싯다르타가 얻은 깨달음을 반백년 이상 산 내가 이제야 관심을 가지고 해답을 찾는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기회를 통해 영영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삶의 정신적 결핍과 공허함의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하고 싶었다.



세상은 쓴맛이 났다. 인생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극심한 고통이었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중에서 -


기원전 563년경 인도와 네팔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소왕국의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는 결혼도 하고 갓난 아들도 있었지만 왕위도, 처자식도, 아버지의 기대도 떨쳐버리고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그 당시 싯다르타는 성의 문을 통해 인간의 삶, 거기서 피어나는 생로병사의 온갖 고통의 풍경을 목도하면서 '삶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다. 마음의 번뇌와 집착을 끊기 위해 발우 공양을 하는 수행자들과의 만남에서 그는 출구를 찾게 된다. 그는 영문도 모르고 태어나서 생로병사의 여정을 겪는 인간의 숙명이라는 고통의 순환고리를 끊고 싶었던 것이다.


출가의 뜻을 밝히자 아버지 숫도다나는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제게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길을 알려 주시면 전 출가를 포기하겠습니다."

"그런 길은 없다"

"그럼 전 출가를 하겠습니다"


29세에 출가해서 6년간의 수행 끝에 그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마침내 붓다(깨달음을 얻은 자)가 되었다. 이후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교화를 하였고, 제자들에게 베푼 마지막 설법에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며 부지님의 진리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라)'의 가르침을 남긴 후 80세의 나이에 열반에 들었다. 이후 붓다의 사상과 철학은 네팔과 이도를 거쳐 아시아와 전 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그 후 각국의 철학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지혜의 배를 타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라"


젊은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방황할 때 그의 스승인 알라라 칼라마가 그에게 던진 말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해(苦海)를 건너 깨달음의 언덕으로 가라는 말이었다. 인간의 삶을 고통이 가득한 바다로 묘사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느끼는 모든 고통은 '연기(緣起)'와 '윤회(輪廻)'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무명(無明)'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무명(無明)은 밝은 햇빛이 내리쬐는 대낮에 구름이 태양을 가려서 어둡게 되는 상태로 사물이나 현상의 참모습을 보지 못함을 의미한다.


연기(緣起)는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원리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럴만한 원인과 조건이 있어서 생겨난 것을 의미한다. 윤회(輪廻)는 생로병사의 돌고도는 쳇바퀴를 말하며, 원인과 결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흘러가는 것을 의미한다. 윤회의 진정한 뜻 또한 '인과(因果)'이다. 태어남이 씨앗(因)이라면 죽음은 열매(果)인 것처럼 말이다. 싯다르타는 연기와 윤회의 강고한 연결고리를 끊을 '칼(解脫)'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12 연기(緣起) 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전생의 업(業)에 의해서 태어났고, 태어났기 때문에 늙고 죽게 된다. 업이 생긴 것은 욕심을 부려서 집착이 생겼기 때문이고, 집착이 생기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의 감정은 그 대상과 접촉해서 인식 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이고, 인식 작용이 있는 것은 우리 몸의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감각 기관이 작용하는 것은 몸과 마음의 주체가 있기 때문이고, 몸과 마음의 주체가 있는 것은 바로 '나'라고 하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의식이 있는 것은 행위의 업이 있기 때문이고, 행위의 업이 있는 것은 광명한 지혜를 갖지 못하고, 무명의 어둠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붓다의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진리)의 깨달음'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고(苦)는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말하며, 집(集)은 고통의 원인이 되는 집착과 욕망을 말한다. 멸(滅)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의 경지를 말하며, 도(道)는 멸의 단계에 이르는 수행법을 말한다. 수행법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철학과 수행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의 대표적 종파인 교종교리나 철학을 통해 사유 훈련을 하는 것이고, 선종참선이나 명상을 통해 집착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고통을 유발하는 욕망과 집착의 대상게임, 섹스, 마약, 도박, (추억의) 물건, 업무, 관계, 과거, 다이어트, 음식, 종교, 외모, 취미, 글쓰기 등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예를 들어, 요즘 연인들끼리는 생일, 밸런타인, 화이트데이, 크리스마스, 만난 지 100일, 200일 등 챙겨야 할 기념일들이 엄청나게 많다. 그럼 챙기는 연인들이 그렇지 못한 연인들보다 행복할까? 아닐 수도 있다. 기념일을 챙길수록 집착이 커지게 되고 그렇지 못할 경우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에 관계를 지속하기가 더 힘들 수도 있는 것이다.


자녀 성적이 나빠지면 부모가 불행해지는데 이 또한 집착 때문이다. 외모에 대한 집착이 크면 나이가 들수록 고통도 커진다. 젊었을 때 한 미모 한 사람일수록 노화로 인한 고통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연유로 요즘 연예인들의 성형중독 이슈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만물은 유상(無常, 변하지 않음) 하지 않고, 무상(無常, 변함)하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우주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삶은 한낱 먼지 같은 시간 속에서 아주 짧은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바로 삶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냥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다. 연인 간의 애정도, 자녀의 성적도, 외모도 늘 변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주름과 백발도 멋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감이 필요한 것이다.  



누구보다 불교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희대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또한 삶의 본질을 고통이라고 보았다. 서울대 철학과 박창국 교수가 지은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를 보면 인간을 구제불능일 정도로 이기적인 탐욕 덩어리로 보고 있으며, 세상 또한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는 장소로 보고 있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살아있는 한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고통은 처음엔 물질적 결핍과 이에 대한 걱정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고통을 쫓아내고 나면 인간은 정신적 마비 상태인 '권태'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악전고투 끝에 권태를 극복해도 고통은 다시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므로 인간은 고통을 새롭게 퇴치하기 위한 투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통과 권태 사이을 왔다 갔다 하다가 죽는 게 인생의 본질임에도 인간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이 주는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또한 인생은 전체적으로 보면 비극이지만 부분만 보면 희극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소소한 불행에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퍼하고, 소소한 행운에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 날뛰기도 한다.


그러나 각 개인의 삶이란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물거품과 같으며 현미경으로나마 겨우 볼 수 있는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의 삶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을 엄청나게 생각하면서 야단법석 떠는 희극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해서야 자신의 삶이 헛된 물거품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결국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나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나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하지만 삶이 본질이 생로병사라는 고해(苦海)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극구광음(隙駒光陰)의 삶이라는 것과 고통의 원인이 욕망과 집착이라는 피상적인 내용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ㅠㅠ


*극구광음(隙駒光陰) : 장자가 한 말로 흘러가는 세월의 빠름은 달려가는 말을 문틈으로 보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일컫는 말이다.


#죽음을 통해 삶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삶의 여행과 죽음의 여행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인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한 후 다시 출발지로 돌아올 수 있는 왕복 여행이지만 삶과 죽음의 여행은 출발지로 결코 돌아올 수 없는 편도 여행이다. 삶의 여행이 시작되면 동시에 죽음의 여행도 시작된다. 삶의 여정만큼 죽음의 여정이 가까이 오는 것이다. 이렇듯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는데도 우린 현재의 삶만 생각하면서 죽음을 도외시 여길 때가 많다.


그러므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란 말처럼 죽음은 삶의 여정을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는 도구임은 분명하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것처럼 곧 죽는다는 생각은 외부의 기대, 자부심, 수치심, 실패의 두려움 등의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며, 인생의 중요한 선택과 결정에도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된다고 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 집착은 사랑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의 근원에는 아끼고 집착하는 '갈애(渴愛)'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대사회의 과도한 경쟁이 우리를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몰고 있고,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이 벌려는 바람은 더 큰 집착을 낳기 때문이다. 즉, 세상과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감각에 속고 매달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집착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마음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고통은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진주는 상처와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다. 진주는 탄산칼슘을 이뤄져 있으며, 구슬 모양의 결정 덩어리를 말한다. 조개가 숨을 쉬기 위해 입을 벌리면 이물질이 들어와 조갯살에 상처를 낸다. 이때 조개는 진주핵이라는 미끌거리는 체액을 분비해 이물질을 감싸버린다. 이렇게 수년 동안 수천 겹으로 쌓이면 비로소 작은 진주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물질이 들어와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조개는 곧 썩어 버리고 만다.


#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왔을 때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것보다 고통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편과 아들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낸 후 '먹는 것조차 고통스럽다'라고 표현한 박완서 작가가 '고통을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견디는 것이다"


여태껏 우리는 고통을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했다. 고통은 상처가 발생하면 아물고 새살이 돋는 것처럼 그냥 참고 견디면 되는 것이다. 인생의 바닥까지 가 본 사람이 '더 내려갈 일도 없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바닥을 딛고 올라오는 것처럼 말이다.


# 온몸에 힘을 빼야 한다


온몸에 힘을 주면 매 맞을 때도 더 고통스러운 법이다. 물에 빠졌을 때도 몸이 힘이 들어가서 허우적 대면 물속으로 더 빨리 가라앉는다. 이럴 땐 온몸에 힘을 뺀 후 몸을 뒤집어서 편하게 누워있으면 된다. 마치 고통이 찾아오면 온 몸에 힘을 빼고 그냥 견디는 것처럼 말이다.


두서없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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