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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Mar 22. 2022

사는 게 피곤한 성격, 뒤통수 한방 날리기로 결정하다!

#백수 과로사 #과부하 #뒤통수 #제주도 한달 살기 #방향과 속도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이따금 말에서 이따금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고 한다. 이는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라고 한다. 


퇴직 후 오십 대가 되어서야 난 난생처음 말로만 들었던 시간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다른 말로 돈 없는 시간 부자가 된 것이다. 돈이 많다고 돈을 흥청망청 쓰는 부자들이 별로 없듯이 나 또한 시간 부자라고 시간을 허투루 쓰진 않았다. 오히려 시간 부자가 된 이후 시간이 더 남아돌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라는 말이 우스개 소리인 줄 알았는 데 내게도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늘 부족한 시간을 이리저리 쪼개서 자기 계발뿐만 아니라 남들이 도전하기 어렵다는 박사학위까지 도전해 취득했던 나로서는 사긴을 의미 있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8년간 이어진 고된 석박사 학위 취득 과정 후에도 난 멈추지 않고 새로운 삶의 도전 목표를 비전보드(vision board)로 만들어 매일같이 들여다보면서 베트남어 공부와 관련 책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고, 책 출판 도전을 위한 글쓰기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내게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건 마치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같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 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데자뷔 같은 직장생활의 분주함 속에서 무엇보다 시간이 절실하게 부족하다는 걸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십 대 직장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퇴직, 노후, 죽음 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뭔가 사전에 준비해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기생충처럼 내 뇌 속을 점령해버린 탓도 있었다. 




두려움과 걱정은 곧 현실이 되었다. 오십 대 퇴직을 하게 된 것이다. 퇴직을 늘 염두에 두고 나름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도 난 막상 퇴직을 하고 나니 지금까지 뭘 했나 하는 생각에 똥줄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대충 살진 않았는데도 남은 시간 뭔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꿈꾸던 것과 달리 퇴직 후에도 내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바쁜 직장생활과 마찬가지로 하루 일과를 계획하고, 루틴을 만들어 더 가열차게 지키기 시작했다. 아침 6시 30분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나 공백상태로 프리바이오틱스 알약 한 개를 물 한 모금으로 삼킨 후 씻고 바로 피트니스를 하러 간다. (사실 운동 중독이다) 유산소 30분, 웨이트 40분, 샤워 10분 등의 시간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사과, 고구마, 샌드위치, 커피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바로 서재로 출근을 한다. (5초 소요) 


오전에는 부동산 재테크 서적을 탐독하고, 점심식사 후에는 일반 서적을 읽거나 글쓰기를 한다. 퇴근 시간을 정함이 없기 때문에 가끔은 저녁을 먹고도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잦다. 평일을 물론 주말도 루틴을 지킨다. 그리고 주 1회 짝꿍과 경매학원을 함께 다닌다. 벌써 4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루틴이다. 겨울철 냉수마찰을 할 때 하기 전에는 너무 귀찮고, 번거롭지만 막상 하고 나면 몸에 열이 나면서 뭔가 해냈고, 건강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처럼 난 퇴직 후에도 여전히 뭔가를 하고 있다는 뿌듯함을 위안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의 깐부, 아내는 이런 나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뭔 퇴직자가 하루도 안 쉬고 직장생활보다 더 힘들게 일을 하냐고, 그리고 퇴직을 했으면 폐인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당분간은 아무 생각 없이 늦잠도 자고, 게으름도 부리면서 느긋하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면 될 텐데 왜 그렇게 조급하게 자신을 옭매고 옥죄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소중한 시간을 하루라도 허투루 보내고 싶진 않았다.


얼마 전 인생을 즐기는(?) 유형의 절친 부부와 술을 한잔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친구는 퇴직 후 평소 내가 지키고 있는 루틴 얘기를 아내를 통해 들으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곤 내게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푹 쉬란 소리만 반복해서 말했다. 만약 자신이 내 입장이면 무조건 주어진 시간을 여행을 하면서 알차게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간 부자인 나를 엄청 부러워했다.


친구 얘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천천히 생각해 보니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회의가 갑자기 들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할 때 그토록 시간 부자가 되고 싶었는데 말이다. 21세기의 진정한 부자는 바로 시간 부자가 아니었던가. 물론 돈까지 있다는 금상첨화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항상 신은 공평하게도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주지 않는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시간이 줄어들고, 개인의 자유시간을 즐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트레이드 오프(trade off) 관계처럼 인생의 천칭 저울은 돈과 시간을 저울질하면서 항상 잔인하게 균형점을 맞춰가고 있었다. 


서로 간의 균형점을 깨기 위해선 노동력 제공과 같은 전근대적인 돈벌이 방식보단 투자나 사업과 같은 위험하고 무모한 도전을 시도해야만 한다. 가길 꺼려하는 길이거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다. 그래서 퇴직 후 난 출퇴근과 월급통장 대신 미래에 대한 나의 꿈을 품고 사는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그려진 못했지만 말이다. 




친구의 말을 복기면서 내가 시간 부자가 되면 예전부터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를 머릿속에 그려봤다. 속도의 저항을 만드는 물리학의 법칙처럼 하고 싶었던 위시리스트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살고 있는 거처를 떠나 자유롭게 산책도 하고, 낯선 곳도 다니면서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는 여유와 느림을 즐길 수 있는 활동! 그건 바로 제주도 한달 살기였다. 아내와 상의를 했더니 바로 '콜'이 들어왔다.  


여행 일정은 경매학원 4개월 과정이 모두 끝나는 4월 초부터 시작하기로 정했다. 출발지는 제주도와 가장 가까운 녹동항으로 결정했고, 일사천리로 숙소도 제주도 한달 살기 어플을 통해 예약을 마무리했다. 4월 초가 되면 모든 현실의 걱정 보따리를 잠시 치워놓고, 제주도 푸른 밤을 체험하러 이곳을 떠날 것이다. 


친구 말대로 당분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푹 쉴 예정이다. 가지지 못한 것(돈)보다는 가진 것(시간)에 집중하고 감사하고, 그것을 한껏 누릴 예정이다. 피 터지게 일했으니 이젠 잠시 삶의 쉼표와 게으름이라는 선물도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단지 결심만 하면 되는 것을 말이다. 


우린 항상 인생에 정답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인생의 정답이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후회로 범벅된 과거에 얽매이고, 다가오지 않을 미래를 가불해서 살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나 빛나는 인생을 살아갈 순 없다. 자신의 속도와 방향대로 의미 있게 살았으면 그걸로 된 것이다. 후회로 범벅된 과거든 가불해서 쓰는 걱정 가득한 미래든 잠시만 내려놓고 현재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앞으로 내게 대단한 사건도 기적도 없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 또한 내가 직접 써 내려가는 나만의 특별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간 사는 게 개피곤한 내 인생에 뒤통수 한방을 날린다. 봄을 맞은 4월 제주도의 푸릇푸릇함이 너무나 기대된다. 


(못 가시는 분들껜 너무 죄송합니다. 하지만 서렌디피티(serendipiti, 우연히 얻게 되는 좋은 경험이나 성과)를 잡을 기회가 있을 겁니다. 다만 저처럼은 아니길 바랍니다)


https://youtu.be/-qoQZ98kMW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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