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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Jan 01. 2023

이제 점집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점집을 가는 이유 #불길한 예감 #점쟁이 리더십 #바넘효과 #플라세보

매년 새해만 되면 철학관과 점집이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팬데믹 이후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고, 삶의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증가하고 있는 시점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는 전화, SNS, 화상 상담 등과 같은 비대면 운명 상담이 이전보다 증가하고 있다고 하죠. 점이나 사주팔자, 타로점이 미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보러 가는 이유 중 하나는 진로, 결혼, 취업, 궁합, 이직, 시험, 사업, 투자 등 인생의 중대 사건과 맞닥뜨릴 때 자신의 결정이 옳은지를 알기 위해서일 것 습니다.


만약 펼쳐질 운명이 좋다면 받아들이면서 자기 확신을 강화하면 되는 것이고, 나쁘다면 피하거나 아니면 개선 노력과 좋은 선택을 통해 좋은 운명으로 바꾸고 싶은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라는 감정을 담보로 운명 상담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습니다. '운명을 그렇게 잘 안다면 본인의 운명부터 바꾸는 게 맞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퇴직 후 인생이막의 중대 기로에서 어떤 진로를 선택해야 할지에 대한 결정 장애를 경험하게 되자 저와 짝꿍은 유명한 점집을 한번 찾아가 보면 어떨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서로 합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훨씬 점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던 짝꿍마저 그런 결정에 동참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당시 상황이 우리 부부에게 얼마나 심각하고 진지했는지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마침 지인을 통해 부산에 용한 점집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시점이기도 했죠.


그렇게 둘은 오랜만에 꽃단장을 하고 차를 몰아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김에 부산 구경도 할 참이었죠. 예약을 한다고 해서 전화를 했더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잘 못 선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갑자기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점집은 도심 한가운데 이층에 위치한 철학관이었습니다. 코미디언 류담과 같은 인상을 가진 철학관 주인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컴퓨터 화면을 보니 주식창이 열려있었습니다. '잘못 온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불안한 예감을 늘 틀린 적이 없다는 노래 가사처럼 결국 주인장은 자신이 투자한 주식 얘기, 그리고 저의 사주팔자에 얽힌 각론만 잔뜩 설명하며 한 시간 반이란 소중한 시간을 몽땅 써 버렸습니다. 결국 얻은 건 내년 3월부터 사업을 시작하되 과한 욕심은 부리지 말라는 것이었죠.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하면 좋을 것인지에 대한 조언도 없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용하다고 소문난 한 군데 점집을 더 들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오후 세시인데도 이미 문이 닫혀 있었죠.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그곳을 찾았습니다. 들어서자마자 주인장은 당신은 이런데 올 필요 없다며 다만 수성구로 집을 옮기지 말라는 말만 하면서 돈도 안 받을 테니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분은 그닥 나쁘지 않았죠. 덕분에 그 돈으로 맛난 음식을 사 먹었으니깐요. 이렇게 1박2일 부산 점집 투어는 별 소득 없이 막을 내렸습니다.


영화 <관상>의 한 장면


기술과 과학문명이 여느 때보다 발달한 지금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점집들이 영업을 하고 있으며 평소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저처럼 점집을 찾고 있습니다. 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점집을 계속 찾게 되는 것일까요? '점쟁이 리더십'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수동적일 때 편안함은 느낀다고 합니다. 점쟁이는 이런 사람들의 속성을 잘 이해합니다. 대뜸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거야!"라고 단정적으로 말이죠. 단정적일수록 편안함을 느끼게 되고, 점쟁이는 용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사살이 한 가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나게 된다는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점쟁이의 말을 현실로 만들어줍니다. 정말 동쪽에서 귀인을 만나게 된 것이죠. 우리들은 흔히 인생이 불확실할 때 누군가 조언을 해주길 원합니다. 점쟁이는 오랜 기간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인간의 나약한 심리를 잘 파악하고, 상황에 맞는 점괘를 시의적절하게 던짐으로써 더 용하다는 명성을 얻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수동적일 때 편안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에게 우리가 끌리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우리 뇌는 몸무게의 2% 정도밖에 안되지만 에너지는 25%를 사용하기 때문에 평소 사용에 매우 인색합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지를 찾는 일은 뇌의 '목표 지향 영역(goal-directed)'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가급적 일상적이고 수동적인 일을 하는 '습관 뇌 영역(habit system)'을 사용하도록 뇌는 종용합니다. 에너지를 아끼려는 전략입니다. 바로 인지적 구두쇠인 뇌의 이런 속성 때문에 우리들은 점집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면 편하기 때문입니다.




미신에 잘 빠지는 사람들의 경우 보편적인 성격의 특성을 자신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바넘 효과(Banum effect)'가 잘 먹힌다고 합니다. 바넘 효과는 무작위로 관객을 불러내 성격을 맞추는 신통력을 발휘해 인기를 끌었던 미국의 유명한 서커스 단장 바넘의 이름에서 딴 용어입니다. 1949년 바터넘 포러(Bertram Forer) 교수가 UCLA 심리학과 학생들 39명에게 성격검사를 받게 하고, 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똑같은 결과지를 나눠준 후 '검사 결과가 얼마나 자신의 실제 성격을 묘사했는지'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학생들 평균은 5점 만점에 4.26점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듯 일반적인 사람들의 성격, 특징에 대한 보편적 서술을 자기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심리적 경향을 '바넘 효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점쟁이들 하는 말은 얼핏 보면 상대방을 간파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애매모호한 내용이 많고 어느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또한 바넘효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답답한 마음에 점집을 찾았다고 결국 후회를 하게 되었지만 말이죠. 하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출처 : Pixabay


미신에 종사하는 무속인들 사이에서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다고 합니다.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 위약효과)가 잘 나타나는 유형, 즉 가짜 약을 진짜 약이라는 의사의 말을 굳건히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부적을 써 준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부적을 써주면 진짜 실현될 것처럼 믿고 행동하기 때문에 현실화될 확률이 높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죠. 반면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부적을 써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심리게임, 아니 영업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바로 용한 점쟁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점집을 찾는 사람들의 심리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방향성을 찾고 싶을 때 점쟁이를 찾아감으로써 심리적 위안을 얻고, 또한 긍정적 메시지에 대해 자기 충족적 예언을 덧붙임으로써 원하는 결과물을 얻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돈값은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정적 메시지라면 삼가 행동하는 것도 나름 도움이 될 테니깐요.




최근 인기리에 종영되었던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빈 양철 회장이 어린 막내 손자인 도준에게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노?"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말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진도준을 보고, 너도 다른 애들과 똑같구나라는 말을 하죠. 사실 진회장은 반도체를 미래 먹거리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현실은 미국과 일본의 값싼 반도체 경쟁에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겁니다. 집으로 돌아간 진도준은 경제지를 보다가 할아버지가 말한 속뜻을 알게 되고,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지만 할아버지는 바그다드로 출장을 가신 상황이었죠.


할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언제 돌아오냐는 질문에 10월 29일이라는 대답을 듣고 문득 칼기 폭발 사고를 떠올리게 됩니다. 국가기관에 전화를 걸지만 장난전화로 오해를 받자 할머니에게 뛰어가 할아버지와 꼭 통화를 하고 싶다고 얘기하고 비서를 통해 그에게 메모를 남깁니다.


할아버지께서 내주신 퀴즈, 정답을 이제야 알았어요. 고래 싸움에서 새우가 어부지리로 이기는 법, 새우 몸집을 키우는 거죠.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지 않을 만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시간은 새우 편 아닐까요? 영진반도체 매각 시한은, 29일 오후 5시입니다. 이 메모를 보시면, 항공편을 변경하실 거라고 저는 믿어요. - 진도준의 메모 내용 -


결국 칼기 폭발 사고는 터졌고, 순양가는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죠. 하지만 진회장은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고 심지어 영진반도체도 인수했습니다. 출발하기 전 결재서류 사이에 있는 도준이의 메모를 발견하고 비행 스케줄을 변경한 것이죠. 이후 진회장은 도준이를 만나자 무섭게 추궁합니다.


"니 혹시 미래를 알고 있는 거 아이가? 단일화가 깨질 것도, 노태우 후보가 당선될 것도, 또 칼기가 폭발할 것도, 다 알고 있었지. 맞나 대답해 봐라."


이때 진도준은 잠시 망설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미래가 아니라, 할아버지 마음을 알고 있었어요. 고래 싸움에 새우가 어부지리로 이기는 방법 같은 건 없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무모한 도전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한테 퀴즈를 내신 거죠. 정답이 아니라 지지와 응원을 구하는 마음으로요. 제가 알고 있었던 건, 할아버지의 그 마음입니다.


진회장은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겁니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지만 두 아들과 딸이 그토록 반대하던 미래 먹거리인 반도체 사업을 누군가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죠. 그 대가로 진도준은 분당 땅 5만 평을 선물로 받습니다. 훗날 미라클 인베스트먼트 신화의 쌈짓돈을 이 과정에서 얻습니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스틸컷


여기에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는 건 점쟁이도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불확실한 미래나 인생의 중대한 사건과 맞닥뜨릴 때 가장 필요한 건 다름이 아닌 바로 자기 확신과 주변의 지지일 것입니다. 진양철회장이 가족들에게 정말 원했던 대답인 것이죠. 함께 가야 외롭지 않고, 오래갈 수 있고, 멀리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신년 운세를 보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굳이 값비싼 복비를 치르지 않았으면 합니다. 결국 인생의 모든 해답은 자신의 마음속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2003년 계묘년 쿨의 운명처럼 신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사 NO, 음정/리듬 OK)


쿨 Cool - 운명 Official 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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