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수장 #CEO #경영진 #선택과 의사결정 #경영수업 #진흙탕싸움
깨달은 것 하나는.......(중략) 똑똑한 사람이 세상을 운영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면 그들이 당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실제로 매일 이런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 세상을 운영한다는 사람들은 정말로 당신과 다르지 않아요. 그들이 어떤 분야에 대해서는 조금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와 같습니다. - 스티브 잡스 연설 中에서 -
저는 운좋게도 기업 본사의 영업 총괄 임원으로 근무하면서 CEO뿐만 아니라 고위 임원들을 가까운 곳에서 자주 만날 기회가 많았습니다. 처음 그들과 한 자리에 미팅을 할 때는 그들의 말 한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일거수 일투족에 민감하게 반응을 했습니다. 그 속에 대단한 뭔가가 있을 것만 같았죠. 저는 회의 시간마다 초심을 유지하기 위해 대학노트를 지참했고, 그들의 던진 어록들을 노트에 꼼꼼하게 기록하고 인사이트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삼개월도 채 되기도 전에 대학 노트 두 권이 완성되었죠. 이후에도 저의 편집증적인 기록 습관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배움의 열정을 가졌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기업의 별'이라고 불리는 임원, 그것도 CEO를 비롯한 고위 임원들을 가까이 만나 기업 경영에 관한 세부 전략을 발표하고 논의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일명 '경영 수업'을 공짜로 받고 싶었던 것이죠. 영업 현장에만 잔뼈가 굵었던 저는 예전부터 늘 본사 브레인 집단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제가 회사를 다니면서 취득한 경영학 박사 학위도 이러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로 느끼고 싶었죠.
제가 운좋게도 맡은 본사 영업 총괄 임원이란 직책은 영업 외 상품, 마케팅, 인사, 재무, 이커머스, IT, 테넌트 등 다양한 유관 부서와의 유기적인 협조와 지원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각 부서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이 없으면 매출 성과를 달성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부서에서 진행하는 CEO와의 미팅 자리에 옵서버(Observer)로서 참석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각 부서별로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 실행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부문별 손익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배울 수 있었죠.
처음에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미팅에 참석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부서별 이기주의의 장벽과 진흙탕 싸움을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보다는 CEO의 질문과 챌린지를 면피하고, 자기 부분의 재무적 손익을 지키기 위한 미봉책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다 보니 미팅의 넥스트 스텝(next step, 미팅 이후 도출된 안건들을 정리한 내용)도 점차 많아졌고, 회의는 넥스트 스텝을 받지 않기 위한 부서별 이기주의가 만연했습니다.
왜냐하면 넥스트 스텝이 많을수록 해야 할 과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회의를 위한 회의 자료를 만드는 데 부서 조직의 모든 역량과 에너지가 낭비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었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될 수록 경영진들 간의 말수도 적어지기 시작했고, 이 과정을 기켜보던 저의 경영 수업 또한 그 호기심과 기대감이 거의 사라지면서 실망과 피로감만 쌓여 갔습니다.
예전에 제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기업의 비전, 사명과 핵심 가치 등에 기반한 기업 경영 철학은 회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고객의 가치와 직원의 안녕보다는 주주의 이익과 기업의 손익이 항상 우선이었죠. 가끔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는 의사 결정에도 경영진들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하고 부딪히면서 이전투구(泥田鬪狗, 진흙탕 싸움의 개)하는 광경을 흔치 않게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리스크를 피하기 위한 경영진들의 어려움도 이해하지만 리스크를 떠안고 감당하려는 경영진의 책임있는 태도는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이죠.
무엇보다 '마른 수건을 다시 짜야만 한다'는 최악의 경영 철학은 모든 회의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였습니다. 제가 28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은 기업에는 불황기는 있어도 호황기는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경기가 호황이어서 실적이 좋을 때는 불경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불황기가 도래하면 내실 경영 또는 긴축 경영(비상 경영)이라는 기치 아래 '마른 수건을 다시 짜야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임직원들의 혹독한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죠. 한 마디로 비상 경영이란 말은 직장생활에서 가장 친숙하고 익숙한 단여였던 것이죠.
특히 불황기가 지속되어 생선성과 효율성, 다시 말해 비용과 인건비만을 타깃으로 줄여온 기업의 경우 한계에 봉착하게 되고, 이에 따른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생존만을 중시하고 성장을 중시하지 않는 기업 문화 속에서는 모든 임직원들이 바닥에 납짝 엎드려 그 순간만이 하루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랍니다.
하지만 불황기에 경영의 해법이 숨어 있듯이 위기를 기회삼아 성장 지향점을 목표로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해야만 경쟁 기업과의 격차를 더 벌릴 수 있는데도 경영진들은 이러한 간단한 해법도 소홀히 여기고 마른 수건을 짜는데만 급급해 한다는 뜻이죠. 책임을 질 일도, 책임을 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두려움 마음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알을 피하기보다는 쏟아지는 빗발 속으로 당당히 나아가야 하는데도 아무도 '나를 따르라'고 소리리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비용이나 인력 절감을 통한 단기적인 재무 성과보다는 중장기적인 전략과 계획 수립, 실패와 도전을 장려하는 조직 문화 구축, 트렌드에 맞는 각종 장비와 시스템에 대한 투자와 도입, 기업의 사명과 핵심가치를 바탕으로 한 의사결정 등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임에도 아무도 총대를 매는 경영진은 없었습니다.
경영진들 대부분이 붕괴된 멘탈과 무너진 심리적 저항선을 다시 세우기가 힘들어 보였습니다. 지옥행 설국열차를 탄 모든 임원들은 빨리 미팅이 끝나기만을 간절하게 고대했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shall pass away)'는 솔로몬의 지혜를 입속으로 되뇌이는 것 같았죠.
말만하면 알만한 대기업의 고위 임원을 역임했고,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고, 박사학위도 있는 어느 한 고위 임원의 경우 언론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직장생활에서의 실상은 외부에서 보여지는 이미지와는 크게 달랐습니다. CEO의 실적과 손익, 공격적인 성과 개선에 대한 압박에 소신 발언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부하직원들의 업무적 어려움과 고충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자리 보전에 급급해 직원들 사이에서 하마평이 빈번하게 나돌 때도 많았죠.
하지만 이런 분들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일대일로 만나 대화를 하면 의외로 진솔하고 인간적인 모습에 놀랄 때도 많았습니다. 특히 CEO나 경영진들과 가끔 하는 번개 술자리에서의 그들의 모습은 직장 상사라기보다는 그냥 이웃집 사람처럼 다정다감하고 인간미가 풍기기도 했죠. 술자리에서 경영진으로서의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 토로할 때는 깊은 연민도 느꼈습니다.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직책에 대한 엄청난 책임감과 고독의 무게를 어느 정도 갸늠할 수 있었죠. 만약 제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 정도였죠.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난무하고, 불경기와 불황이 지속되는 요즘 시기에 한 기업의 수장으로서 또는 부서의 책임자로서 고객, 직원, 기업의 이해관계자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는 그들의 업무적 스트레스와 어려움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 것이죠. 또한 그러한 상황에서 소신을 지키고 소신 발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더욱 가까워지면서 그분들 대부분은 제가 아는 여느 직장인들처럼 힘들어하고, 좌절하며,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을 겪고 있기도 했고, 업무 방향성을 잃고 망망대해를 표류하기도 했죠.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너무나 인간적이고 평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죠.
우리는 흔히 CEO나 고위 임원들은 창문이 있는 조망 좋은 곳에 개인 집무실을 가지고 있고, 비서가 있어 스케줄 관리나 복잡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며, 출퇴근 시간이 자유롭고, 자기만의 시간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목도한 그들의 직장생활은 이와는 많이 상이했습니다. 출근 시간은 누구보다 제일 빨랐고, 일주일 내내 업무 미팅이 채워져 있어 사무실에 편히 앉아 있을 시간도 없었으며, 미팅이 없으면 전략이나 각종 회의 자료를 만들기 위해 밤늦게까지 집무실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삶의 여유가 전혀 없어 보였죠.
이런 살인적인 스케줄에도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 휴일까지 반납을 해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당연히 휴가는 언감생시였죠. 회사의 중요한 경영 정보를 많이 알다보니 자연스럽게 부하직원들과 말을 가급적 삼가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니 직원들 입장에서 보면 매우 고리타분하고, 아집이 세보이며,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회사에 자신의 인생을 건 사람들이라고 하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만이 가진 직장 생존 전략과 처세술은 충분히 배울만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요. 그들이 가진 공통적인 처세술을 살펴보면 눈치가 빠르다는 것, 상사에게는 '예스맨'이라는 것, 지독한 '워커홀릭'이라는 것, 자존감이 강하다는 것, 그리고 업무적으로 추진력과 실행력이 뛰어나다는 점입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열 길' 또는 '한 길'에서 '길'은 물건의 높이나 길이, 깊이 등을 어림잡는데 쓰이는 단위입니다. '한 길'은 보통 사람의 키 정도 되는 길을 의미합니다. 물은 아무리 깊어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있지만 얼마 안 되는 사람의 마음은 그만큼 알아내기 힘들다는 말이죠. 한 기업의 CEO나 경영진들은 기업의 생사와 미래를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책임과 역할이 요구되며, 냉철한 판단력과 직관력이 요구되는 자리입니다. 아무나 그 자리에 오를 수도 없지만 만약 그 자리에 올라가면 누구나 멘탈의 붕괴를 경험할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함부로 그 속내를 알기는 더욱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년 간의 본사 임원 생활을 한 후 제가 느낀 점은 최대한 본사라는 감옥을 탈출해 현장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몸은 다소 고되지만 현장에서 부대끼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직원들의 인향(人香)이 그리웠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직장생활을 하면 한번쯤은 본사라는 조직에 근무하기를 희망할 겁니다. 저도 한때는 그랬죠.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가급적이면 한번 정도는 괜찮지만 계속 그곳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오히려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편협하고 고착된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가 말한 것처럼 똑똑한 사람이 경영진으로서 기업을 운영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직접 만나보면 우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스티브 잡스처럼 대단한 사람이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어떤 분야에 대해서는 조금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그들도 다 우리처럼 사는 모습은 그리 별반 다르지 않고 평범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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