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 중순의 노쇠한 몸으로 여전히 구십 넘은 남편을 정성껏 돌보시며 마음 고생이 심한 어머니를 위해 저와 짝꿍은 하루 날을 잡아 어머니를 모시고 대구 인근 유명 사찰인 동화사로 봄 나들이를 떠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미리 주간 기온을 확인한 후 봄 기운이 완연한 날짜로 선정을 했죠. 당일 아침 일찍 우리 부부는 부모님 집에 들러서 어머니를 태운 후 팔공산 동화사로 향했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께는 잠깐만 나갔다 오신다는 핑계 아닌 거짓말을 둘러 댔습니다. ㅠㅠ 미안함도 잠시였습니다. 차를 타고 달리는 내내 어머니의 표정은 소풍으로 들뜬 어린 소녀처럼 밝고 화사했죠. ^^
원래 어머니는 정성껏 기도하는 사람의 소원 한 가지씩은 들어준다는 '기복신앙지(祈福信仰地)'인 팔공산 갓바위 절의 독실한 불교 신자지만 갓바위까지 오르는 힘든 여정을 현재 체력으론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이제는 자식들이 함께 동행하지 않으면 못 가시는 상황에 이르셨죠. 그래서 저는 주차도 용이하고, 절까지 오르는 거리도 가까워서 팔공산 동화사를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동화사 진입로에는 '팔공총립 동화사'라는 크게 쓴 출입구가 성문처럼 세워져 있는데 입장료와 주차료를 징수하는 매표소가 함께 위치해 있습니다.
동화사 입장료 - 입장료 : 어른 3,000원, 청소년/군인 2,000원, 어린이 1,500원 * 단체 : 청소년/군인 1,500원, 어린이 1,000원 * 무료 : 만 70세 이상 & 국가 유공자 - 주차료 : 소형 2,000원, 2.5톤 이상 & 16인승 이상 버스 5,000원
동화사 참배 안내도
팔공산 동화사, 오동나무꽃(桐華)이 만발해서 붙여진 이름!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팔공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가람(伽藍, 승려들이 사는 사찰 등의 건축물)은 동화사(桐華寺)입니다. 팔공산 자락에는 동화사 이외에도 파계사, 은해사, 부인사, 갓바위 등 이름난 사찰이 많습니다. 동화사는 신라 21대 소지왕 15년(493년)에 승려 극딜이 신라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유가사(瑜伽寺)'란 이름으로 창건했습니다. 참고로 유가(瑜伽)란 '아름다운 절'을 의미합니다. 이후 832년 왕사 심지(心地)가 중창하였는데 그때가 겨울철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桐華]이 만발해서 지금의 동화사(桐華寺)로 고쳐불렀다고 합니다.
동화사는 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 무인집권기 시대에는 부인사와 동화사의 승려들이 신라 부흥을 꾀한 경주별초군 민란에도 가담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경상도 지방의 대표 사찰로 자리매김합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사명대사가 왜군을 물리치기 위한 승군사령부 기지로 사용을 하였습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 대부분은 영조 때 중창된 건축물로서 대웅전(大雄殿) 천장의 극락조(極樂鳥)는 일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극락전(極樂殿)은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앞뜰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이 있는데 두 탑이 모두 고준하고 경쾌한 감을 주며, 옥개석 네 귀에 풍경이 달려 있는 등 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동화사의 지정문화재로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로암 삼층석탑, 마애여래좌상, 당간지주 등이 있는데 이 중 동화사 입구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은 입구 주차장의 바른쪽에 있는 큰 암벽에 새겨진 불상으로 상당히 높은 곳에 조각되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바위가 튀어나와서 불상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섬세한 수법과 부드러운 감각, 자비로운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구름무늬의 대좌는 표현이 지극히 사실적으로 신라 흥덕왕 때 심지가 조각한 것으로 전합니다.
동화사 입구에 있는 마애여래좌상 (출처 : 네이버 지식 백과)
이 절은 한때 유정이 영남도총섭으로서 승군(僧軍)을 지휘하였던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의 역할을 하였고, 민족항일기 시대에는 55개의 사찰을 거느렸던 대본산이었으나, 현재에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청도군·칠곡군·성주군의 4개군의 사암(寺庵)을 관장하고 있습니다. 절의 주위에는 무심봉(無心峰)의 흰 구름, 제천단(祭天壇)의 소낙비, 적석성(積石城)의 맑은 달, 백리령(白里嶺)의 쌓인 눈, 금병장(金塀莊)의 단풍잎, 부도암의 폭포, 약사봉(藥師峰)의 새벽별, 동화사의 종소리 등 공산팔경(公山八景)이 있으며, 약수암 앞 수숫골과 폭포골 사이에는 구세약수(救世藥水)가 있습니다.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맑고 찬 이 약수는 간장병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평일이라 주차장은 매우 한산했습니다. 절에 이르는 초입길은 다소 경사도가 완만한 길이고, 팔공산 자락이라 걷기에 매우 쾌적했습니다. 길 좌측 편에는 계곡물이 시원한 물소리를 내며 봄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었죠. 가다보면 좌측 편에 통일대보와 성보박물관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이지만 우리들은 대웅전으로 발길을 향합니다. 용머리 계단을 오르면 큰 나무와 마당이 펼쳐지는 가람 광장을 만나게 됩니다. 계단이 끝나는 우측 입구에는 '인악대사 나무'라고 불리는 500년 수령 가까이 되는 느티나무가 위엄있게 서 있습니다. 어머니는 설법전 위에 세워져 있는 사명대사성상(四溟大師聖像) 앞에서 거친 숨을 고르신 후 잠시 합장을 올립니다.
광장 입구에는 옹호문이 보입니다. 옹호문(擁護門)은 사천왕을 모시는 천왕문(天王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사찰과 불법을 수호하고 잡귀를 내쫓는 역할을 합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잡귀가 떨어지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찰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광장의 한쪽 편에 있는 약수터로 이동해 잠시 목을 축입니다. 대웅전으로 진입하기 전 봉서루(鳳捿樓)라는 누각이 보이는데 직역하면 '봉황이 서식하는 누각'이란 뜻입니다. 동화사의 위치가 알을 품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봉서루에 오르는 계단 입구에는 큰 암반과 봉황알 형상을 본딴 돌 세개가 함께 어우러진 '봉황포란형'이 있는데 봉황알을 만지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합니다. 잠시 만지면서 소원을 빌어 봅니다.
봉서루 상단에는 황금빛 소원성취 연등이 풍경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금빛을 반사하고 있습니다. 봉서루를 지나면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大雄殿)이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은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아미타불, 우측에는 약사여래불이 놓여 있습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불교에서 말하는 서방극락세계에 거처하며 법을 설파하는 부처를 의미하며,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은 중생의 질병을 고쳐주는 약사신앙의 대상이 되는 보살을 의미합니다. 참고로 동화사는 약사신앙의 대표적인 사찰이어서 몸이 아픈 신도들이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그럼 흔히 우리가 말하는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란 주문의 뜻은 무엇일까요? '나무'는 산스크리트어로 '귀의한다'란 뜻이며, '아미타불'은 '극락세계를 담당하는 부처'를 의미합니다. 고로 '나무 아미타불'은 '극락세계를 담당하는 아미타불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이죠. 그리고 '나무 아미타불' 뒤에는 항상 '관세음보살'이란 말이 따라 붙는데 그 이유는 관세움보살이 끝없이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은 '괴로움을 없애주고 행복하게 살게 해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극락세계를 담당하는 아미타불께 귀의하니 괴로움을 없애주고 행복하게 살게 해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저도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조용하게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칩니다.
대웅전에 들어선 어머니는 가볍게 합장을 하신 후 부처님께 큰 절을 올립니다. 불교에서는 큰 절을 '오체투지(五體投地)'라고 부릅니다. 오체투지는 고대 인도에서 행해지던 예법 중 하나로 상대방의 발을 받드는 접족례(接足禮)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불·법·승 삼보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방법으로,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절하는 방법은 먼저 합장한 자세로 두 무릎을 꿇고 합장을 풀어 오른손으로 땅을 짚은 후 왼손과 이마를 같이 땅에 댑니다. 그리고 두 손을 뒤집어 손바닥으로 공손히 부처의 발을 받드는 동작을 합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인도의 오체투지(五體投地)가 왜 한국에서 공식적인 절이 되었는지 불분명하지만 그 속에 절복(折伏)과 간절(懇切)한 염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머니의 오체투지를 보면서 저는 숙연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아 합장 기도를 올립니다.
대웅전 뒤 편으로는 산신각(산신을 모셔놓은 당우)과 조사전(역대 방장들의 영정을 모신 당우) 가는 길이 보입니다. 조사전 옆에는 칠성각(수명장수신을 모신 당우)도 보입니다. 우리들은 봉서루를 나와 뒷쪽 계단을 올라 영산전(靈山殿)으로 이동합니다. 영산전은 팔상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석가 삼존불을 중심으로 석가의 제자인 16나한상들이 좌우로 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나한들은 다양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나한과 눈이 마주치면 그 나한과 닮은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결혼한 주부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자주 찾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영산전 마당에서 올려본 하늘은 구름 한점 없는, 티없이 맑고, 투명한 하늘색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찌나 파란지 저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서 쳐다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카메라에 그 풍경을 담았습니다. 봉서루 오른쪽에는 통일범종루라 불리는 종각이 보이는데 이름으로 추정컨데 한반도의 통일을 기원하는 듯보입니다.
내려오는 길에 계묘년을 맞아 신도들이 적은 소원성취 나무 앞에 멈춰서서 메모 내용들을 잠시 읽었습니다. 건강과 재물, 시험합격 등을 기원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죠. 저도 잠시 올해 소망을 마음 속에 새겨 봅니다. 소나무와 동자승 캐릭터에 앉아서 사진도 찍었는데 어머니께서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 동화사 서쪽 비로암의 대적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비로암 삼층석탑은 보물 제24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기단의 각 층에는 네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습니다. 꼭대기에는 노반과 복발 보주가 올려져 있으며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작품입니다. 어머니는 석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십니다. 무슨 소원이 그리 많으신지 탑을 돌며 소원을 비는 탑돌이를 또 하십니다.
우리들은 갔던 길을 되돌아와서 다시 통일대전으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통일대전을 가기 위해서는 108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108계단이라고 하지만 어머니를 부축해 올라가야 해서 일일히 세어보지는 못했습니다. 계단을 오르니 커다란 광장에 33m의 초대형 통일약사여래대불이 세상을 굽어보듯이 서 있습니다. 1992년 남북통일과 세계평화의 염원을 담아 세워졌다고 합니다. 통일약사여래대불의 왼손에는 약단지가 들려져 있으며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의 형상을 취하고 있습니다.
** 시무외인(施無畏印) : 부처가 두려움을 없애 주기 위해 나타내는 형상으로 팔을 들고 다섯 손가락을 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물건을 주는 모습을 일컬음
예로부터 팔공산은 신라시대부터 영산이자 이상세계를 염원하는 약사신앙의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약사여래불을 여느 지역보다 많이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통일약사여래대불 앞에는 국내 최대 규모인 17m 석탑 2기가 놓여져 있으며 그 뒷쪽으로는 거대한 석등이 각각 1기씩 설치되어 있습니다. 통일약사여래대불 안에는 미얀마정부로부터 기증받은 부처님 진신사리 2과가 소중하게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지하 1층 선을 테마로 하는 체험관인 법화보궁 가는 길에 12지신이 세워져 있으며, 통일약사여래대불 뒷편에는 호법무사들이 조각되어 근엄한 표정으로 부처와 중생들을 지키고 있는 듯보입니다.
어머니는 통일약사여래대불을 알현하신 후 또 다시 소원을 빌며 오체투지를 행하십니다. 저는 조용히 어머니를 지켜보며 홀로 합장을 합니다. 잠시 후 향초를 사서 부처님 전에 불을 밝히시며 공양을 하십니다. 불교에서 초를 피우는 이유는 초가 자신을 태워 남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뜻합니다. 자신을 태워가며 주변을 밝히는 초의 불꽃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욕심, 집착, 관습 등 삼독을 모두 태워 무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 자리이타(自利利他) : 자신을 이롭게 한다는 자리(自利)와 남을 이롭게 한다는 이타(利他)가 합쳐진 말로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한다는 뜻임
모든 일정을 마친 후 우리들은 사전에 검색해 놓았던 식사 장소로 이동을 합니다. 맛보다는 분위기를 선택했습니다. 동화사 입구에 위치한 올바릇 나사리식당이었죠. 평일 점심 때라 손님도 그다지 없었고, 분위기도 아늑하고 평온합니다. 메뉴는 해물칼국수, 해물부추전, 꼬막 충무 김밥 세트로 주문을 했습니다. 솔직히 맛은 기대만큼 좋지 않았지만 가성비와 분위기는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식사량이 부쩍 줄어들어 밥맛이 없으신 어머니께는 나름 색다른 메뉴였던 것 같습니다.
일차를 마친 우리들은 이차로 다시 옆집인 투섬플레이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커피를 잘 못드시는 어머니께는 고무마라떼, 짝꿍은 카모마일, 저는 뜨아(뜨거운 아메리카노), 그리고 함께 먹을 디저트로 금가루가 쌀짝 뿌려진 블루베리 요커트 생크림 케익을 주문했습니다. 금가루가 묻어있는 블루베리를 어머니 잎에 넣어드리니 너무 좋아하시네요. ^^ 커피를 마시는 동안 어머니의 삶의 못다한 얘기들을 한참동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구순이 넘으신 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어머니의 고충을 공감하고, 또 경청하며 들었습니다.
육이오 참전장교 출신인 아버지는 그때 당시 아버지들이 다 그랬듯이 아내인 어머니를 잘 챙기지 못하셨습니다. 나이들면 두고보자던 어머니는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려 아버지를 삼시세끼 챙겨주며, 밤낮주야로 돌봐야 하는 신세가 되신 것이죠. 제가 볼 때 요즘처럼 부모님 두 분이 잘 지내신 적은 없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도 구순이 넘으시니 모든 걸 내려놓으시고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지를 해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어쨌든 자식으로서 보면 어머니께서 몸은 힘드시지만 부부가 서로 백년회로하면서 사이좋게 사시는 모습이 너무나 고맙게만 느껴집니다. 형제자매들 모두가 부모님 덕과 복을 오히려 많이 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저와 짝꿍, 그리고 어머니가 함께 한 행복한 봄 나들이 일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마당에 심은 매화나무 고목에 매화가 만개했네요. 겨우내 못 보던 꿀벌들도 붕붕 소리를 내며 열심히 꿀을 채취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봄봄스럽습니다. 어머니는 오늘 동화사 길을 걸으면서 내내 몸도 발걸음도 이렇게 가벼울 수 없다고 말씀 하십니다. 아버지 모신다고 제대로 나들이도 못 가셨으니 충분히 그러실 것 같습니다. 조만간 벚꽃이 만개할 때 부모님 두 분을 다 모시고 행복 봄 나들이를 다시 갈 에정입니다. 퇴직 후 가장 좋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시간을 내서 부모님과 함께 하는 봄나들이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삶의 여유가 없더라도 한번쯤은 부모님과 좋은 시간 가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