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 영역 #컴포트 존 #트리거 #석사 #박사 #은혜는 겨울에 자란다
그래서 나는 '컴포트 존(comfort zone)'을 벗어날 '트리거(trigger)'를 만들기 위해 뇌의 '목표 지향 영역(goal-directed system)'을 활성화시키기로 결심했다. 예전에 대학시절 ROTC 생활을 하면서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달래고 싶었다. 바로 학위 취득이었다. 공부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공부의 속성상 나만 열심히 하면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아마 대기업에 종사하면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조직관리의 어려움을 익히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석사학위부터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후배 중 한 명이 바쁜 업무 속에서도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고, 나 또한 그 후배의 주경야독의 삶이 부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바쁜 점장 역할에도 불구하고 난 개인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봄학기 석사과정에 입학하게 되었다. 일단 발을 담그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원래 의도와 다르게 약 50명이 등록한 봄학기 석사과정에 기수 회장으로 뽑히게 되었다. 학기 등록을 하기도 전에 선배 기수 회장들에 의해 지명 임명이 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입사원 기수 회장은 선배 기수 회장단들이 지명을 해서 뽑는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점장 역할에 대학원 기수 회장까지 맡게 되니 그 당시 난 멘붕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직장생활보다 대학원 생활에서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이 더 막중했던 것이다. 거의 일주일에 3~4회 이상을 대학원에 가서 선배 기수 회장들과 대학원 일정을 챙겨야 했다.
기수 회장으로 뽑히면 수백만 원의 회비도 내야 하고, 가끔은 수업을 마친 후 동기생들에게 술도 한잔씩 사야 하니 유리지갑인 샐러리맨의 뻔한 월급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기에 큰 경제적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윗 기수 네 명의 회장들 모두가 기업체 대표였으니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자존심이 있는지라 힘든 내색하지 않고, 묵묵하게 5학기를 견뎌냈다.
기수 회장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는 공부가 아니라 원우들의 불만과 불평을 해결하고, 동기애를 만들어 각종 행사에 참여율을 높이는 것이었다. 또한 행사와 술자리 모임도 어찌나 많은지 회사생활보다 석사과정이 더 바쁘고 힘들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엇보다 사십 대 초반이었던 나보다 연세가 높으신 50대 이상의 원우들이 절반 정도이다 보니 기수 활동을 하더라도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연륜과 품성이 뛰어난 오십 대 부회장들의 도움과 협력으로 5학기를 어떤 기수들보다 잡음 없이 잘 운영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학원 석사과정 기수 회장을 하면서 사회생활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어지간한 규모의 행사도 여러 번 성공적으로 진행하기도 했고, 또한 그 지역에서 정말 잘 나간다는 선후배들도 자주 만나면서 인생의 어떤 시기보다도 인간관계를 폭넓게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석사과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갈 때쯤 난 군중 속의 고독감을 갑자기 느끼게 되었다.
아마 바쁜 직장생활과 정신없는 대학원 생활로 인해 번아웃이 찾아온 것 같았다. 늘 그렇듯 빨리 대학원 생활을 끝내고 그냥 직장생활에만 전념하고 싶었다. 아무리 직원들이 이해한다고 하지만 혹시나 대학원 생활로 인한 직무 태만의 우려도 어느 정도는 있었기 때문이다. 과유불급의 뜻을 가진 '계영배(戒盈杯)'가 주는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대학원 졸업시절 난 기수 회장으로서 공로상과 우수상을 받으며 그 간의 대학원 생활을 훈훈하게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박사과정에 입학하기 위해 난 먼저 지도교수님과 상의를 했다. 박사과정 입학 면접에서 난 기수 회장으로서 평소 교수님들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던 터라 큰 잡음 없이 합격을 할 수 있었다. 박사과정은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진행되었고, 글로벌 과정과 통합되어 있다 보니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매주 주어지는 영어 논문과 과제 발표 준비는 석사과정과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수업시간도 평일에 진행되었고, 수업 진행 방식 대부분이 과제 발표와 토론식으로 진행되었다. 석사과정과 달리 박사과정은 과제 분량도 더 많았고, 발표 내용도 까다롭게 리뷰가 되었다. 전문 용어로 가득한 영어 논문을 주별로 6개 이상을 번역해 요약하고, 또 발표까지 해야 하니 삶이 순탄하지 않았다. 퇴근 후부터 잠들 때까지는 매일 논문을 해석하고, 번역하고, 정리해야 했다. 발표자료의 경우 많을 때는 수십 페이지가 넘는 경우도 허다했다. 내 인생의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박사과정에 갈아 넣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힘들었던 수업은 통계였다. 학위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통계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통계 수업은 정말 따라가기 어려웠다. 이해도 어려웠지만 과제 발표와 시험도 쉽지 않았다. 방학 기간에는 매일 영어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박사 수료에 필수과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든 4학기를 무사히 마쳤지만 또 하나의 관문이 있었다. 바로 졸업시험이었다. 여태껏 배운 모든 과목과 책 전체가 시험 범위였다. 특히 통계 시험은 치팅(cheating)도 허용되지 않아 퇴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렵게 졸업시험을 통과해 박사과정을 수료했지만 학위 취득을 위해 가장 어려운 관문이 남아 있었다. 바로 학위 논문 작성이다. 박사과정 수료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학위 논문 작성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일부 풀타임(full time) 과정의 전업 박사과정 학생(선생님으로 호칭함)들도 2년 이내에 취득하기가 어려울 정도니 말이다. 나처럼 파트타임(part time) 박사과정 학생들은 최소 3년, 최대 무기한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난 학위 취득에 다시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뭐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논문을 한 번도 제대로 써보지 않았던 터라 감이 전혀 없기도 했다. 지도교수님으로부터 간단하게 논문 주제 선정에 대한 과정을 설명받은 후 본격적으로 주제 선정을 위한 과정에 돌입했다.
지금 얘기하지만 박사 수료 후 박사학위를 도전할 때 지도교수님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 되어 있었다. 밥 한 끼는 물론이고 사적인 관계도 전혀 갖길 원치 않으셨다. 학위 논문에 대한 프로세스를 철저하게 리뷰하고, 따르도록 내게 요구하시기도 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연구 질문(research question)'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박린이(초보 박사학위 도전자)'의 경우 신뢰도 높은 연구 배경과 연구 질문이 필수였다. 그래서 국내 논문보다는 저명한 해외 논문 위주로 연구 배경과 모형 등을 요약하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망망대해에서 조난을 당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나 스스로 준비하고 연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지도교수님께서 내가 유통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학술적 연구보다는 실용적 논문 주제를 선정하기를 원하셨다. 매월 찾아뵙고 리뷰하기를 6개월째 진행하면서 전혀 진도가 나아가지 않았다. 직장에서 주 1회 휴무를 하는데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학교를 가서 교수님을 뵈면서 논문 주제를 리뷰해야 하는데 진도까지 안 나가니 내 몸과 마음은 완전 탈진이 되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해외 논문 250편 이상을 읽고 요약하다 보니 시력도 나빠져 백내장 증상까지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포기할까 고민하던 중 하늘이 도우셨는지 우연히 유통업과 관련된 최신 연구가 저명한 학술지에 실려있는 걸 확인하고, 그 연구 배경과 연구 모형을 빌려와 내 논문 주제로 선정하기로 결심했다. 한 가지 어려웠던 점은 그 논문의 연구 배경과 모형을 적용한 논문이 국내, 해외 논문에도 거의 없어 주제로 선정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도교수님께서 그것과 관련된 주제에 흥미를 보이셨고, 교수님의 도움으로 후속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늘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한 속담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 이후 논문의 서론과 문제 제기, 연구 목적 등을 순차적으로 정리해 나갔고, 교수님께서도 내 논문의 부족함을 보완하기보다는 계속해서 논문을 완성해 나가도록 코칭을 하셨다. 교수님의 배려 덕분에 난 일 년 만에 거의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퇴고와 마지막 수정과정까지 모두 마친 후 논문 심사 발표가 이어졌다.
세 차례 논문 발표 과정과 5인 심사교수님들의 리뷰와 수정, 그리고 교수님들의 최종 서명이 끝나야 논문이 최종 통과를 하게 된다. 결국 난 모든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고 48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내 평생 이렇게 어렵고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취한 데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직원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금테가 둘러진 박사학위 논문이 출간되자마자 교수님께 한 부 갖다 드렸다. 그리고 마침내 학위 수여식이 도래했다. 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졸업식장에 도착했고, 교수님께 가족을 소개드렸다. 잠시 후 총장님께서 직접 한 명 한 명 호출해서 박사학위를 수여하셨다. 내 차례가 도래했고, 난 교수님께 가볍게 인사를 드린 후 단상으로 올라갔다. 마침내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선배 박사 한 분이 내게 "박사 학위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로 권위 있는 자격증이다"라고 한 말이 기억에 난다. 박사학위를 취득하면 지성인의 산실인 4년제 교수도 될 수 있을뿐더라 각종 방송에 나가서 권위자로서 인터뷰나 토론도 할 수 있다. 심지어 대학교수 중에 장관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박사학위란 활용만 제대로 한다면 매우 폭넓게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 박사학위란 그냥 자아실현 욕구의 산물 정도로 판단된다. 이것을 가지고 뭔가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도전하고 취득하고 싶었던 것뿐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퇴직을 했지만 현역 시절에는 명함 뒷면에 박사학위를 새겨서 명함에 들고 다녔고, 사람들과 명함 교환 때 당당하게 건넸다. 박사학위 취득! 인생의 가장 큰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은혜는 겨울에 자란다(Grace grows in the winter)'는 말이 있다. 종교적인 의미지만 시련을 통해 그 결실이 맺어진다는 의미이다. 인생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시작과 도전,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모두 바쁘다는 핑계로 소중한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그냥 허투루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혹시 인생이 무료하거나 뭔가 도전이 필요한 분들이 내 글을 읽고 조금이나마 자극과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Nothing comes from nothing(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