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문기사를 검색하다가 친한 선배 한 명이 기업 정기 임원인사 소식란에 고위 임원 발령 소식으로 대문짝만 하게 사진과 이름이 실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기사를 캡처해서 카톡으로 축하 메시지와 함께 보냈는데 '기약(?)도 없는 식사 제안'으로 답장이 왔다. 그렇게 규모가 큰 기업도 아닌데도 각종 언론매체에 도배가 되어 있는 것을 보니 대기업 계열사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은 '샐러리맨의 꽃'이라고 부르는 임원도 달기 어려운 세상에 고위 임원이라니...... 내심 살짝 부럽기도 했다. 나도 신문에 나올까?라고 검색을 하니 조각 기사로 정말 조그맣게 나오긴 나왔다. ^^;
한 달 후 선배로부터 저녁 식사를 하자는 카톡이 먼저 왔다. 원래 인사 치례로 던진 저녁 약속을 챙기려고 선톡까지 오니 내심 고맙기도 했다. 약속 당일 여의도 생갓역 인근 토속음식점에 만나기로 하고 지하철로 이동했다. 막상 도착해보니 인기 맛집이었던 토속 음식점은 코로나를 극복하지 못하고 미나리 삼겹살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잠시 후 깔끔하게 고급진 양복을 입고, 머플러에 포마드로 단정하게 머리는 넘긴 선배의 모습은 이전의 덥수룩한 모습과 달리 직책에 맞게 외모도 위엄 있고 멋있게 변해 있었다. 고위 임원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비굴하지만 '충성'을 때리고, 두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자세를 풀어라'는 선배의 말에 바로 민간인 모드로 바로 돌아왔다. 음식점이 바뀌었는지 몰랐다면서 선배는 멋쩍게 껄껄 웃었고, 다른 음식점을 찾기도 귀찮아 그냥 미나리 삼겹살집으로 들어갔다.
한우나 일식처럼 값비싼 음식을 충분히 사줄 수 있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삼겹살이 뭐냐고 핀잔을 줬더니 바로 삐쳤다. 농담이라고 얼른 달래고 예의 바르게 고기를 먼저 불판에 올렸다. 오랜만에 솥뚜껑 불판에는 봄의 전령사인 봄 미나리의 향이 가득 퍼졌다.
묵은지와 무친 콩나물, 새송이 버섯이 항정살의 치이익 굽히는 소리와 함께 식욕을 자극했다. 목 넘김이 좋게 제조한 가벼운 폭탄주를 한잔씩 말아서 바로 건배를 했다. 원샷은 원래 한 번에 털어야 하는데 선배는 반이상 남겼다. 눈을 크게 떠서 경고를 하니 이제 고위 임원이라 건강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시 코로나 컬처 쇼크(?)가 술과 인간과의 친밀한 관계를 많이 단절시킨 것 같다.
나는 정성스럽게 굽힌 항정살, 묵은지, 버섯을 가위로 정성스럽게 잘라서 선배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원래 직장생활은 위계질서가 명확한 곳이라 이렇게 직장 예절이 매우 중요하다. 어느 정도 직장생활의 경력이 쌓이면 '그놈이 그놈이라' 아무래도 정을 많이 내거나 예의 바른 놈에게 정이 더 끌리는 법이다.
직장생활에서 오랜 기간 몸으로 체득한 이런 예의 바름은 임원이 된 지금도 선배나 상사를 만날 때면 자동적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습관적 행동이다.회식자리에서 항상 나오는 '상사의 무용담이나 장기자랑처럼' 고위 임원 자리까지 오르게 된 선배의 영웅담이 짧은 시간 삼겹살을 먹으면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었다. 오랜만에 듣는 선배의 근황은 항정살과 봄 미나리처럼 맛있고 흥미로왔다.
매우 프라이빗하지만 연봉도 살짝 물었다. 처음엔 망설이다가 계속 재촉하니 겸연쩍게 대답하는 '액수와 세금'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죽음과 세금은 절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전용차도 국내 최고급 세단이고, 각종 복리후생은 역대급이었고, 대리운전은 서울과 부산까지도 이용 가능하다는 얘기에 나는 무기력해지기까지 했다. 나와 비교해서 말이다. 심지어 3~4년만 더 직장을 다니면 노후생활도 무리가 없다는 얘기에 나는 배까지 아파왔다. 급여보다도 퇴직금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도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자괴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술이 한잔씩 들어가면서 취기가 오르자 맘속에 있던 말들이 조금씩 튀어나왔다. 사실 화려한 임시 직원인 '임원'은 '임불이년(임원은 이년을 넘기지 못한다)', '임전무퇴(임원이 되면 전부 모조건 물러날 준비를 한다)', '상전벽해(상무든 전무든 벽에 부딪히면 해고)'라는 우스갯소리가 남 얘기가 아니라고 했다.
10년 임원 생활에 남은 임원은 나 혼자뿐이고 나머지는 다 집에 갔다고 말하는 선배는 그간 벌어진 적장 생존의 직장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에 대해 담담하게 말을 했다. 하지만 얼마 전 승진하자마자 벌써부터 생존게임을 다시 하고 있다고 씁쓸하게 얘기했다. 그래서 지금 잘 알고 있는 헤드헌터를 통해 규모가 작은 기업 대표 자리를 틈틈이 알아보고 있다고 말이다.
'피터의 법칙(Peter's Law)'이 있다. 수직적 계층 조직에서는 직무수행 능력이 부족한 직원들이 조직 내 고위직을 차지하게 된다는 법칙이다. 그러다 보니 막상 임원이 되더라도 그에 맞는 책임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조직이 망가지고, 본인도 단명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직장인들은 임원을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올라가면 감당이 안될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임포자'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별'을 달기도 어렵지만 본인 스스로 임원이 되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다. 엄밀히 말하면 자기 위안적인 생각일 뿐이다. 직장에 다녀본 사람들은 다 안다. 자기가 안 달고 싶어도 능력이 뛰어나면 달 수 밖에는 없는 것임을 말이다. 하지만 일부 기업에서는 만년 부장들을 대상으로 임원을 달아주고 2년 후 해고시키는 인력 출구 전략으로 임원 승진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요즘 젊고 스마트한 직장인들 중에는 수십 년간 직장에 충성하더라도 절대 부를 이룰 수 없다고 하면서 오르지도 못할 임원이 될 바에는 일찍부터 주식, 부동산 등을 공부해서 부자아빠가 되는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맞는 얘기임은 부정할 수 없다.
선배는 많은 직장인들의 부러움을 받는 자리인 만큼 임원들 간 자리와 권력을 지키기 위한 암투와 권력 투쟁은 매우 난무하고, 업무와 정신적 스트레스는 심각할 정도로 크다고 말했다. 최근 일 년간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너무 심해 밤잠도 못 자고 식은땀, 가슴 두근거림 등이 심하게 나타났고, 체중까지 너무 빠졌다고 한다. 걱정이 되어 한의원에 가보니 한의사가 '맥박이 안 잡힌다'면서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하는 일을 더 하시면 건강이 매우 위험할 수 있다"라고 경고를 했다고 한다.
겁먹고 한의사의 권유에 백만 원이 넘는 보약도 구매했다고 했다. 사실 그 사건 이후로 어느 정도 마음을 비우고 일을 하지만, 성격 탓인지 쉽지 않다고 말을 하면서 사실 퇴직도 진지하게 고려했다고 말을 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나이도 얼마 남지도 않았고, 야망도 여전히 크다 보니 한편으로는 지금보다 작은 기업의 최고경영자로 가고 싶다며 아는 헤드헌트에게는 조심스럽게 연락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나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얘기했더니 내 나이 때 임원 자리는 다 그렇다면서 잘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퇴사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하자 "은퇴 후 계획은 있는지?" 물었다. 나는 "특별한 은퇴계획은 없고, 다만 현금흐름을 조금 더 만들어 노후에는 일 안 하고 편하게 살고 싶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남자는 일을 안 하면 안 된다면서 정 힘들면 이직도 고려해 보라고 했다. 대부분 현재의 직장을 떠나는 것이 두려워 도전하고 있지 않는데 지금의 선배는 그러한 도전을 통해서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렇다. 나는 여태껏 선배처럼 적극적인 이직 노력도 하지 않고 단지 이직해도 받아줄 데가 없다고만 불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배의 따끔한 한 마디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은퇴 후의 어떻게 살 것인지 대한 얘기가 진지하게 오고 갔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은퇴 후 내가 가진 모든 배경이 다 없어지기 때문에 직장에 다니면서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고 얘기했다. 제일 먼저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당구나 골프는 잘 치지만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직장생활과 인간관계에 필요해서 하는 것뿐이라고 얘기를 하면서 최근에 자신이 진짜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것저것 등 마음이 가는 것 위주로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선배는 퇴직의 준비 조건으로 노후준비가 가장 중요하지만 취미생활, 인간관계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니 직장생활 동안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직장생활 때 항상 좋아하는 후배들을 챙기고, 모임을 만들어 주기적으로 친목을 도모하라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업무 때문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억지로 만나왔다면 은퇴 후에는 내가 좋아하고 만나고 싶은 소수의 사람들하고만 인연을 지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말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이전 직장 사람들과도 20년 이상을 꾸준하게 연락하고 안부도 묻고 주기적으로 술도 한잔씩 한다고 했다. 나는 무엇을 했을까 고민이 많았다.
나는 요즘 최고 경영자들과 고위 임원들을 만나면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들이 있다. 모두 똑같은 샐러리맨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외롭고, 힘들다. 상의하거나 말할 대상이 없고, 책임져야 할 역할과 책임이 더 커지다 보니 느끼는 스트레스와 불안감도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사실 임원 중에 힘들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 상의할 상사나 후배가 있을까? '군종 속의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다.그 자리에 오르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것들이 많다. '피터의 법칙'처럼 그 직무에 필요한 역할과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조직에서 바난을 받고 퇴사하는 임원들을 많이 봐왔다.
오랜만에 선배와 만나서 그간 궁금했던 얘기도 많이 했고, 차마 다른 사람에게 꺼내지 못할 치부 같은 은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오십 대가 되니 경상도 남자인 나와 선배도 말이 많아진 것 같았다. 격정적인 충고에 가끔씩은 입안에 씹던 미나리와 삼겹살 덩어리가 간혹 튀어나오곤 했다. 물론 여성 호르몬의 증가도 한몫했겠지만 말이다. 임원 생활 동안 힘들거나 어려워도 상담할 상사나 동료가 없었는데 금번 선배와의 자리는 매우 유익했고, 얼마 남지 않을 직장생활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최근 나는 나만의 동굴에 칩거하면서 붕괴된 멘털을 스스로 치유하고 있는 중이었다. 헤어질 때 선배는 내게 혼자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자주 연락하면서 살자고 말을 던졌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오늘 먼저 연락 줘서 고마웠습니다'라고 선톡을 날리며 형수와 주말에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별다방 쿠폰 세트를 카톡으로 보냈다.
혹시 여러분도 혼자만 겪으면서 말하지 못하고 있는 스트레스나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경우가 많은가? 고만고만한 동료나 후배보다는 잘 나가는 선배를 한 번씩 만나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그 직책을 먼저 경험한 선배면 더 좋을 것이다. 아무래도 삶은 먼저 경험한 선배들의 경험과 조언을 통해 내가 앞으로 겪게 될 시행착오를 줄이고, 현명하게 대처함으로써 불필요한 시간적, 정신적 소모를 최대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 고민만 하지 말고, 선배에게 먼저 선톡을 날리면 어떨까? 덤으로 무료 식사와 인생 코칭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