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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May 11. 2021

느슨한 인간관계가 대세다

#아이러브스쿨 #동창회 #첫사랑 #불륜 #피천득의 인연

예전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이 매우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전국 곳곳을 뒤져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인연을 찾아준 프로그램인데 많은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곤 했다. 2000년대 초반 TV의 감동을 온라인으로 옮긴 인터넷 사이트가 있었는데 바로 '아이러브스쿨'이라는 학교 인맥 찾기 사이트였다. 당시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많이 보급되지 않은 시절이라서 PC 인터넷을 통해서만 가입이 가능했다. 


'첫사랑에 불륜까지 아이 러브 스쿨'이라는 신문기사의 내용처럼 추억 속 친구들을 현실에서 조우하는 것이 매우 설레고, 흥분되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에 동창생들을 다시 만나 결혼까지 이른 사례도 많았다. 지금은 네이버 밴드, 카카오톡 오픈 채팅,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클럽 등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지만 그 당시만큼 뜨거운 열풍은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유행을 따라 아이러브스쿨의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가입을 했고, 오랫동안 친분 관계를 유지했던 '불알친구들'과 함께 동창회 모임을 나갔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동창생들 대부분이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서 나타난 모습에 나도 처음에는 흠씬 놀랐다. 물론 나도 역변한 것을 인정한다. 어릴 때 기억 속에 매우 새초롬하고 도시애처럼 예뻐서 말 한디도 못해봤던 한 여자 동창생은 어느새 중년의 중후함이 깊게 묻어났고, 나와도 스스럼없이 가벼운 스킨십을 하면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 동창회 모임에서는 여전히 여자 애들과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하는 예전의 부끄럼 많은 아이가 되어 있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가자 일부 술에 취한 동창생들의 험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나이와 품격에 맞지 않는 어린 시절의 육두문자 대화가 오가면서 나는 중간에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는 절대 동창회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의 <인연>이라는 에세이처럼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는 말이 계속 귓속에 맴돌았다. 그렇다. 어찌 보면 어릴 때 추억은 특히 기억과 가슴속에 묻었을 때 오히려 더 소중한 인연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생애사에 있어 인관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어릴 때부터 우리들은 얕은 인간관계보다는 깊은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소리를 자주 듣고 자라왔다. 하지만 최근 전문가들은 깊은 관계보다는 얕은 관계에 주목하라는 메시지를 많이 던지고 있다. 즉 관계의 '깊이'보다는 '폭'에 집중하라는 의미이다. 


사회학자들은 인간관계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강한 유대관계(Strong ties)''약한 유대관계(Weak ties)'가 바로 그것이다. 강한 유대관계는 가까운 친구, 가족, 연인, 직장 동료 등과 같은 사람들을 말하며, 약한 유대관계는 페이스북과 같은 사회관계망이나 동호회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처럼 이름과 얼굴 정도만 아는 사람들을 말한다.




얼핏 보면 우리는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위해주고, 성장시켜주는 사람이 강한 유대관계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나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편하기는 하지만 관계적으로 속박하는 경우가 많고, 내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경우에도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축하해주는 것보다는 이전의 각인된 이미지로 계속 소통하려는 경향이 높아 소통이 단절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악동뮤지션이라는 유명한 현실 남매 두 명을 TV에서 보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현재의 성장한 모습이 아닌 단지 예전의 편하고 어렸던 모습에 기반해 막 대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이것이 바로 강한 유대관계의 단점이다.


야, 너 용 됐네, 원래 하던 대로 해!


성인이 된 후 멋진 '역전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 만나면 오히려 "야, 너 용 됐네. 그러지 말고 원래 하던 대로 해"라며 업그레이든 된 친구를 완전히 무장해제시키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친구라는 명분 하에 충고나 훈계를 넘어 마음의 상처가 되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하는 경우도 있다. 관계에 대한 피로와 스트레스가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약한 유대관계의 경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과거의 다른 나의 발전된 모습을 새롭게 각인할 수 있다. 즉 리셋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또한 뜻하지 않게 관계 확장의 기회를 얻는 경우도 있다. 요즘은 오히려 사회관계망을 통해 우연히 알거나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선뜻 도움의 손길을 건네거나 응원과 격려 메시지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이질적이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느슨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새롭게 세팅할 수 있고, 과거와는 다른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요즘은 느슨하고 약한 유대관계가 오히려 대세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 최소 8개 정도의 정기 모임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느슨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말한다. 사적인 부분도 모두 공유하고 마음을 깊이 나눌 수 있을 만큼의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만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만나면 힐링되는 관계가 바로 바람직한 관계가 아닐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힘이 되어주고 위로해줄 수 있는 정도의 친밀함이면 더욱 좋다.



시장 전문 조사기업인 엠브레인이 2019년 전국 15세에서 59세까지 성인 1천 명을 대상으로 '모임' 관련 인식조사를 실시한 결과 10명 중 4명(38%)이 학연에 의한 동창모임의 중요성이 감소했다고 답변을 했다. 이유는 개인의 삶을 살기에도 바쁘다는 것이었다. 또한 10명 중 6명은 학연과 지연이 한국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문화라고 답변을 했다. 10명 중 7명은 느슨한 인간관계를 선호한다고 대답했다. 일부 친한 관계를 제외하면 약한 유대관계를 지향하는 태도가 뚜렷해졌다는 얘기다.


예전에는 출신학교가 사회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고, 그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벌과 학연이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사회 전반적으로 동창 모임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가장 전형적인 모임 형태에 염증을 느끼고 벗어나고자 하는 태도가 커졌다는 뜻이다. 반면 약한 유대관계를 지향하는 태도는 더욱 증가했다. 개인의 취양과 관심사가 관계 확장의 주요 이유이다. 많이 참여해보고 싶은 모임의 유형은 여행 동호회, 스포츠, 외국어, 봉사활동, 영화 , 글쓰기 순이었다.

 



이러한 트렌드는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및 모임 제한, 비대면 트렌드가 지속되고, 바쁜 일상 속 친구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고 보는 시각이 뚜렷하다.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쫓기듯 바쁜 시간 속에서도 취향과 관심사를 중요한 삶의 가치로 인식하고, 이를 기반으로 가입한 모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물론 부, 지위, 성공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학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지금 삶이 팍팍하고 힘들다 보니 불편한 인간관계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는 목소리는 적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는 혼자서 무언가를 할 때 죄를 지은 것처럼 남의 눈치를 많이 봐야 한다. 그래서 혼자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술을 먹으면 뭔가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타인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발적 고립을 선택해서 식사, 여가 생활 등을 홀로 즐기는 '나 홀로 문화'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펜데믹 확산 이후 사회적 거리 및 모임 제한 등이 강화되면서 타인과의 관계가 아닌 혼자만의 일상생활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



[Epilogue]


팬데믹 확산으로 미래사회로 가는 속도가 매우 빨라지고 있다. 김난도 교수가 말한 것처럼 방향이 바뀐 것이 아니라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을 몸소 느낀다. 이제 우리들도 관계의 깊이보다는 폭을 넓히는데 관심을 가져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참고로 페이스북 관계 강도 조사에서 보면 약한 유대관계 사람들의 글을 공유, 추천하는 경우가 강한 유대관계 사람들보다 2배가 높았다고 한다. 약한 유대관계 구축이 SNS시대에 매우 유리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그러니 기존의 전통적인 모임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를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모임을 찾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사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전의 나와 다른 캐릭터(부캐)를 만들 수도 있고, 그에 맞는 환경설정과 리셋을 하고 싶다면 느슨하고, 약한 유대관계에 집중해야 한다. 물론 관계의 폭과 넓이에 대한 균형감도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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