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나는 주말에 뚝배기로 계란찜을 만들었다.
마른 감나무에 걸렸던 붉은 까치밥을 따내듯, 단단한 껍질을 깨서 달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봉긋하게 솟은 폭신한 노른자를 나무젓가락으로 콕콕 터트렸다. 그리곤 흰자와 노른자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까지 골고루 저었다. 곧바로 쨍한 노른 빛이 흰색 물감을 섞은 것처럼 엷은 파스텔톤으로 변했다. 창문 밖에선 아침해를 기다리던 까마귀 한 마리가 아쉬운 소리를 내며 급하게 사라졌다.
나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이게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얼마나 맛있는 줄 아냐고, 혼잣말로 속삭였다. 흰자와 노른자의 섞임 상태를 확인하고선 차가운 우유를 냉장고에서 꺼내 뚝배기에 부었다. 우유와 달걀의 비율은 1대 1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우유는 맹물만 넣었을 때보다 계란찜을 더 고소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다. 그러고 보니 계란찜이란 게 닭과 젖소를 결합해서 만든 콜라보 음식인 셈이다.
학창 시절 우유급식이란 게 있었다. 단백질 음식이 부족했던 그 시절, 우유는 성장기에 있던 아이들을 위해 정부차원에서 싸게 공급되었다. 매월 일정액을 지불하기만 하면 아침마다 흰색 종이팩에 '서울우유'라고 녹색글씨가 박힌 신선한 우유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많은 우유 중 하필 서울우유만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초등학교 우유급식이 지역마다 다른 것 같은데, 배달과 운반, 운송 인력, 보관과 폐기 등의 문제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우유가 아니더라도 아이들 성장기에 필요한 단백질이 풍부한 급식이 무상으로 이뤄져 우유급식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진 못하는 것 같다. 집에서도 고기반찬이 부족하지 않은 오늘날에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무엇을 더 먹여야 하는지 보다, 무엇을 덜 먹여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처지다.
잘 저어진 계란물에 소금을 조금 넣어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일상은 소금처럼 반짝 빛날 수도 있을 테니까. 생생한 대파도 쏭쏭 썰어서 집어넣으려다 말았다. 파의 향긋함이 달걀의 비릿한 맛을 잡아주고 입맛까지 돋우지만 막내가 싫어하는 까닭이다. 나도 어릴 적 그랬기 때문에 막내에게 모라고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단지, 싫다고 하는데도 굳이 굵은 파를 집어넣은 계란찜을 난 먹기 싫었을 뿐이다. 나중에 아이가 좀 더 크게 된다면 달큼한 파향을 지금의 나처럼 좋아하게 될는지 모른다.
냄비 속 물에 뚝배기를 반쯤 잠기게 해 놓고선 센 불로 가열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뚝배기가 냄비 바닥에 부딪히면서 요란하게 손뼉 치는 소리를 냈다. 다닥다닥, 리드미컬한 박자에 맞춰 계란물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이렇게 중탕으로 끓여야 바닥이 타지 않고 계란찜 전부 다 먹을 수 있다. 뜸을 들이는 중간중간에도 숟가락으로 찔러 익힘 상태를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
뜨거운 열기를 견뎌낸 계란찜은 정말로 완벽하다. 간단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더할 나위 없이 온전한 식단이 준비되는 것이다. 크게 부풀었다가 다시 쪼그라져도 계란찜은 말캉말캉 부드럽기만 하다. 따뜻할 때 흰쌀밥에 얹혀 놓고 숟가락으로 살짝 비벼서 먹으면 끝내주지만, 막내는 좀 더 식혀지길 바란다. 큰애는 푸딩을 떠먹는 것처럼 듬뿍 떠서 한입에 먹었다.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 나왔다면서 좋아하는 큰애가 오늘 아침이 참 든든하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맛있게 계란찜을 먹는 모습만 보아도 나는 그냥 배가 불렀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은 충분히 견딜만하고 분주한 것일 테다. 때때로 뜨거웠다가 차갑게 식기도 하겠지만, 일상에서의 소박함은 우리를 즐겁게 만들고 몸과 마음을 든든하게 할 때가 많다. 아무리 힘들고 귀찮아도 내가 주말마다 계란찜을 만드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래서 나는 '계란찜'을 만들어 놓고, '겨란찜'을 얼른 먹으라고 아이들을 재촉한다. 오늘도 간절한 소박함이 뜸을 들이며 내 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