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이름의 기원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일주일에 한 번쯤 달걀을 삶아 찬물에 식힌 후 아침 식사용으로 간단히 챙겨 먹는다. 계란프라이를 하느라 기름을 튀기지 않아도 되니까, 창문을 열어 환기시킬 필요가 없다.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난 아이들에게 삶은 달걀 좀 먹으라고 했다. 시골에 살았을 때 '겨란'이란 말이 입에 붙어서인지 촌스러운 줄 알면서도 나는 자꾸 달걀을 '겨란'이라 말한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그걸 약 올리기도 하고, 숫제 일부러 "겨란, 잘 먹겠습니다!"라며 따라 한다. 어이없는 계란에 민망하지만 그렇지 않은 척했다. 내가 살던 시골은 충청북도에 인접한 곳였다. 지역은 경기도지만 말끝마다 '하는 겨', '아닌 겨' 등 '겨'자를 구사하는 충청도식 사투리를 사용했다. 그래서 계란도 '겨란'이었을 것이다. 표준말을 쓰는 지금도 나는 달걀만큼은 방언이 익숙하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공식문서에 한글이 표기되면서 우리말 표기에 관한 고민이 시작됐다. 서툰 표기를 통일하고 표준을 제시하기 위해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마련했다. 아직 표준어라는 게 낯선 상태에서 우리말 사전을 위한 준비도 있었다. 주시경 등은 광문회를 조직해 <말모이>라는 국어사전 편찬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영화 <말모이>를 보면, 전국의 방언을 수집하고, 방언의 뜻을 밝히는 과정 등을 유쾌하게 보여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말에는 표준어나 사전이 없어 지역말을 이해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삼킨 후 조선인을 신국 백성이라며 일왕을 섬기도록 강요했고,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어린아이들은 우리말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민족의 하나 됨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말을 모아 국어사전을 만들고 표준어를 정립하는 게 절실했다. 그래서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을 모았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말모이>는 여러가지 이유로 결국 발행되지 못했다. 이후 우리말 사전편찬은 1957년이 되어서야 완성된다.
언어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은 일상에 대한 삶의 태도이자 정신력이고 물리적인 힘을 갖기도 한다. 유사한 단어와 비슷한 문장이더라도 무엇이 말끝에 달렸는지, 그런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이해할 때 비로소 참 뜻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낱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달걀의 경우도 그렇다. 달걀이란 말의 근원을 찾기 위한 시도는 있었지만, 글쎄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달걀을 닭의 알로 전제해 놓고 그 풀이 과정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우리는 달걀을 당연히 닭의 알로 이해하지만, 사실 달걀이 닭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란 건 추측에 불과하다.
오리알, 메추리알, 타조알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면, 닭의 알은 닭알이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계란(鷄卵)을 달걀이라고 부른다. 달걀은 경남, 전남에선 닥알, 제주에선 독새끼, 그 외 지역에선 달구새끼, 돌알 등으로 불렀다. 그렇게 계란을 지칭하는 말들이 다양했던 건 지역마다 풍습과 환경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에 사용했던 다채로운 말들 대부분이 우리 기억에서 사라졌다. 역사의 중요한 페이지가 찢어진 채 공백으로 남은 것이다. 그러한 공백을 애써 채우려는 건 정답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일 것이다.
잘 알지 못했던 것을 들여보거나, 상상을 하는 일은 익숙했던 걸 낯설게 보게 만든다. 물론 알지 못해도 일상을 사는데 지장은 없다. 일상은 늘 인지되지 않는 것들에 파묻혀 있고, 부조화스러운 것이 도출되면 잠시 이목을 끌 뿐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어떤 것의 근원을 밝힌다고 해서 일상이 급변하진 않는다. 그리고 그런 존재를 탐색하는데 관심을 갖는 사람도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닭의 알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게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몰라도 사는 게 일상이고, 일상은 참 담담하다.
닭은 달걀을 품고 살아간다. 그것은 달걀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닭은 달걀을 품는 동안 달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달이 떠오르는 밤마다 하얗게 꿈을 꾸며 달에 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닭은 자신 이름에서 'ㄱ'자 모양의 부메랑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러다 부메랑은 되돌아와 자신이 품던 알 옆으로 떨어졌다. 달걀은 닭이 낳은 알이 아니라, 달이 되고 싶었던 닭의 이야기일지 모른다. 달이 되고 싶어 하늘로 부메랑을 던졌던 닭. 그러나 닭은 달을 보고 싶어도 어둠이 자욱이 깔리면 잠자리에 들었다. 달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 없고 잘 모르지만, 닭에게 달은 삶의 일부분을 채워주는 소망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가 낳은 알에 달을 새겨 넣고 달걀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나의 상상일 뿐이다. 작가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시간을 어떤 상상으로 채울 수 있을 테다. 그래서 나도 브런치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잠시잠깐 상상 같은 걸 해본다. 아무래도 작가적 상상력은 논리적이긴 보다 직관적이다. 비록 우리는 달걀이란 말을 한글로 쓰고 읽는데 지장이 없지만, 달걀은 닭의 알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말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선 다른 것과 끊임없이 구분되어 불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이름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계속 불려지면 좋겠다. 그러면 나 또한 달을 가슴에 품고 살 것이다. 일정 기간을 이 땅에 머물렀다 사라지는 이름이 아니라, 세상을 떠난 후에도 달이 차오를 때마다 돌아온 'ㄱ'의 부메랑처럼, 기억해 주는 이름이면 좋겠다. 닭이 낳은 알을 달걀로 부르면서 달을 떠올리듯, 내가 부르는 이름들도 정월대보름 달처럼 환하게 빛났으면 좋겠다.
<참고자료>
* 박영준 외 <우리말의 수수께끼>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 사진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