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집중호우를 동반한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미명도 없는 새벽마다 밀려들었다. 습한 바람이 새벽어둠 속에서 장대비를 후드득 떨어뜨렸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풀더미가 젖은 솜이불처럼 늘어졌다. 빗방울에 난타당한 것처럼 흙탕물이 사방으로 튕겨졌다. 그리고 장맛비가 넘치는 골목길에선 물냄새가 비릿하게 났다.
머리숱을 하얗게 태울 것 같던 작렬한 태양이 장마전선에 갇힌 채 모습을 숨겼다. 잠시 주춤했다고 해서 무더위가 물러난 것은 아니다. 도리어 대기 상태는 습식 사우나실이 되어 육수 같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게 했다. 구름 뒤에 가려져 있어도 태양은 적외선과 자외선을 방출시켜 반쯤 마른오징어처럼 피부 탄력을 상실시켰다. 얼얼하게 달아오르던 얼굴은 낮술 한 것마냥 괜스레 붉어졌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땐, 구름 한 점 없이 개운해진 하늘이 해오름 직전에 있었다. 며칠간 희마리 하나 없던 동네 수탉이 홰치는 소리를 냈다. 숲에 사는 새들은 모처럼 활기를 찾고는 떠들썩했다. 인왕산 중턱에 있는 사찰에서 타종을 했다. 범종의 깊고 나직한 소리가 물결처럼 공중으로 번졌다. 그것은 본래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처럼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자유로웠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고는 야구 모자를 눌러썼다. 인기척을 느낀 큰애가 눈꺼풀을 비비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산책 나갈 건데 같이 갈래?" 나는 사실 그럴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혹시나 해서 말했다. 큰애는 대꾸도 없이 쪼르륵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엷은 이불자락 끝에 삐져나온 발가락들이 귀엽게 꼼지락거렸다.
나는 윤동주 문학관을 지나 초소책방을 찍은 후 다시 백사실계곡 쪽으로 돌아왔다. 곳곳엔 커다란 바위들을 주춧돌처럼 세운 가옥들이 보였다. 북악산과 인왕산은 화강암으로 이뤄진 바위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부터 이곳에 널려있던 돌들을 그렇게 활용했을 테다. 뜨락에 삼계동이 흐르고 비밀의 정원을 숨긴 서울미술관 역시 건물 한쪽을 커다란 화강암에 기대고 있었다.
꼬리 잘린 뱀처럼 삐져나간 한양도성의 성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누군가의 집에서 옹벽이나 담장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을 것이다.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돌들은 기꺼이 자연에게 자신의 공간을 내주고 있었다. 아무리 협소한 공간이라도 나무와 풀은 빽빽이 들어차 긴 목을 하늘로 뻗었다. 도시에선 모든 게 정확한 틀에 따라 공간이 정해지고 자신과 타인의 영역이 엄밀히 구분되지만, 골목길에서 마주친 것들은 자기 영역을 주장하지 않고 공생하며 다붓하게 살고 있었다.
여기저기 자르고 뜯어낸 흔적들이 그대로 남은 돌들은 오래전부터 여기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자연을 기억하고 있다. 생채기처럼 거칠어진 표면과 점점이 박힌 검은 무늬들이 장맛비에도 씻기지 않고 남아 그득그득 차오르는 건, 아직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려는 것일 테다.
구름 사이로 가냘픈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가느다란 햇살이 돌틈에 부딪혀 그리움처럼 박힐 것만 같았다. 보드라운 기운이 내 뒤를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돌담 위에 머물러 있던 간들바람이 새들처럼 날아와 귓가에 속삭였던 것 같다. 갑자기 목덜미가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돌담 밑에서 나는 무언가 그리운 걸 새겨 넣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