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롯의 거미줄>에서 회색거미는 거미줄로 멋진 글자를 만들었다. 샬롯 덕분에 꼬마 돼지는 근사한 돼지가 될 수 있었다. 주인공 거미와 같은 이름을 가진 강아지 샬롯과 아침 산책을 했다. 샬롯은 어느 개농장에서 구출되어 울산의 유기견보호센터에 위탁되었던 강아지였다. 구출 과정에 대해 소상한 전후 사정은 모르지만 농장주로부터 학대를 받았다고 들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샬롯은 사람들을 공포심과 적개심으로 대했다. 그래서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살가움 없이 뾰족한 꼬챙이 같았다. 삐죽함을 세운 경계심에 온몸의 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런데 지금은 경계심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두려움을 거두어낸 갈색 눈동자에선 오히려 달달함마저 느껴졌다.
샬롯이 우리 집에 온 건 아이들이 간절히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샬롯이 이쁘고 귀엽다며 샬롯 주인에게 며칠만 같이 있게 해달라고 졸라댔다. 샬롯이 집에 온 날부터 아이들은 곁에서 매미처럼 종일 붙어 있었다. 아이들은 샬롯이 좋아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고, 하도 쓰다듬는 바람에 샬롯은 어리둥절 부담스럽다. 샬롯 덕분에 아이들은 하루가 참 멋지다고 말했다.
"믹스견이 무슨 뜻이야?"
샬롯의 허연 배를 만지던 막내는 궁금했다. 옆에서 큰애가 품종이 서로 다른 강아지가 섞인 것이라고 말했다. 막내는 품종이란 단어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 품종의 뜻을 모르는 막내가 또다시 물었다.
"믹스견이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믹스견이란 게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지."
"꼬맹아, 섞는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알아?"
"그럼, 남의 것을 뺐는다는 말이잖아."
"무얼 뺐는 건데?"
"사탕 같은 거지."
막내는 섞음의 의미를 달콤한 사탕 뺐어먹기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남의 사탕을 내 것인 양 빼앗고 내 것을 남에게 뺏기는 행위라 여기는 것 같았다.
믹스견은 잡종견을 말하지만 잡종이라는 말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마치 아무렇게나 불순물이 뒤섞인 것. 싸구려처럼 취급해도 될 것 같다. 순종론자 입장에선 잡종의 삶은 뚜렷한 목적 없이 태어난 것이다. 순도가 낮은 물건은 가치도 떨어지니 잡종은 그냥 생긴 대로 그만큼만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강아지 스스로는 순종이나 잡종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크거나 작을 뿐이고 혈통을 내세우지 않는다. 증서가 없어도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문제가 없다. 다만, 인간은 그것을 구분하기 위해 기준을 만들었다. 순종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인위적인 교합을 반복하고, 기질적 특징을 유지하기 위해 결함을 지닌 순종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순수한 오리지널리티란 게 있을까?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과거로부터 존재한 물질, 언어, 시간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창조주가 아닌 이상 무엇도 홀로 유일할 수 없고, 오리지널리티라는 것도 담보될 수 없을 것이다. 카오스를 통해 세상이 만들어져 모든 게 자연적으로 뒤섞여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별들만큼 거리가 있고, 삶은 별빛이 우주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우리 삶에서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건 다른 별을 만나는 것이기에 언제, 어떻게 만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랑은 시련과 난관이기도 하며 때로는 블랙홀과도 같다. 모든 것을 강렬하게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감정과 물질이 뒤섞여 하나가 되고 하나의 체온으로 남는 게 사랑이다.
순종(純種)을 사랑했다고 해서 그것의 순종(順從)까지 얻었다는 건 착각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본연의 순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순종이라고 믿었던 것도 사실은 순종이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