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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육수 속으로 첨벙 뛰어든다

순댓국

by 윤이프란츠


아무도 만날 일 없는 저녁, 혼자였다. 바람이 칼을 들고 차갑게 춤을 췄다. 하나둘씩 꺼진 영등포시장 골목, 그 끄트머리 순댓집은 아직 불 끄기 전이다. 솥뚜껑을 닫은 무쇠솥이 거진 마감시간이 되었음을 짐작케 했다. 어서 오세요,라고 명랑하게 발음하는 건 분명 식당 주인일 테다.



임박한 영업종료 시간을 모른 척했다. 태연히 순댓국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드문드문 손님들이 있다. 일인칭 시점으로 순댓국을 꾸역꾸역 먹는다. 무언갈 놓친 사람처럼 캄캄한 얼굴들, 녹색병 하나씩 챙겨서 꿀렁꿀렁 잔을 따른다. 그리고 마신다. 철편 같은 시름들이 속에서 녹을 때마다 꺼억꺼억 소리를 낸다.



테이블 위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영혼을 갈망했다. 간절히 뜸을 태우는 고독한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멀겋게 달아오른 뚝배기 욕조 안에 한 뼘씩 잠겨진, 도톰한 부위들이 고릿 고릿하다. 젓가락으로 한 점 집어 붉은 새우젓에 찍어 먹는다. 떨어진 눈물 같이 짜다. 강직한 땡고추에 쌈장을 듬뿍 른다. 몸살이 난 것처럼 욱신욱신 아프다.



나약한 양파는 씁쓸한 사정을 다. 빳빳한 정구지는 옷자락처럼 구겨졌다. 나이 때문인지 조명 때문인지 들깻가루처럼 흐릿해 보인다. 순대를 먹기 전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갈 떠 마신다. 허기에 온기니 나른함이 쏟아진다. 부속들 갈피에 숨은 순대를 찾는다. 허투를 수 없는 하나, 둘, 셋. 순대 개수를 센다. 그리고 먹는다. 부드럽게 베어문 순대가 입안에서 물컹거린다. 붉은 핏덩이가 애증처럼 씹힌다.



어릴 적 나는 순대가 싫었다. 겨울철 김장하듯 동네 여자들이 한 집에 모여 돼지를 손질했다. 돼지 속에서 끄집어낸 창자에선 김이 새어났다. 구린내와 피비린내가 뒤섞여 진동했다. 더러운 황토물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허연 창자가 주저리 배알을 꼬고선 정결해지길 기도했다. 여자의 손이 기름을 바른 것처럼 미끌거렸다.


여자들은 돼지 창자를 반복해서 주물렀다. 마지막 기름 찌기와 핏물이 나올 때까지. 나는 우두망찰 흔들렸다. 차마 보기 힘든 광경에 넋을 놓았다. 식육, 야만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이 떠올랐다. 흔적을 지우려 머리를 흔들었다. 보깨는 속을 누르려 하지만 생목이 올랐다. 삭이지 못한 것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간이 흘렀다. 난 변했는데도 순대는 그대로였다. 창자는 인생처럼 구구절절 어졌다. 도마에서 난도질되어 단편으로 썰어진 사연. 구붓하다 반듯한 조각들이 칼 끝에서 춤을 춘다. 뜨거운 줄 모르고 입을 댄다. 그리고 데었다. 차가운 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긴다. 알싸한 파동과 짜릿한 전율이 온몸에 흐른다.



내 인생은 따로국밥이다. 나는 너의 육수 속에 첨벙 뛰어들겠다. 다진 양념 같은 고통을 들고서, 주체할 수 없는 콧물이 흐르고, 이마에선 땀이 흥건하다. 후후, 너에게 입김을 불어 본다.



<영등포시장 순대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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