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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 브라우니

스코프(SCOFF)

by 윤이프란츠


추운 주말 아침, 빵을 사기 위해 부암동주민센터로 이어진 경사길을 올랐다. 서울미술관 옆을 지나는 동안 찬 바람이 뒷통수를 잡을 것처럼 내 뒤를 졸졸 쫓았다. 노란색 외벽을 가진 엔틱숍 창문으로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쓴 내 모습이 투명하게 비쳤다. 계단처럼 통나무를 쌓아 올린 카페 외벽에선 벌목공이 쓰다가 버린 녹슨 외날톱이 묘하게 걸려있었다. 그리고 바닥에서 무언가 반짝반짝 빛나는 게 보였다. 그것은 궁지에 몰린 백 원짜리 동전이었다. 나는 무심코 동전을 주우면서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스코프 빵집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가자 훈훈한 공기가 내 주위를 둘러쌓다. 순식간에 바깥 추위를 잊을 만큼 따뜻했다. 빵 굽는 대형 오븐에서 빠져나온 열기와 습기로 가득했다. 예전에 영국인 남편과 한국인 부인이 매일 열심히 빵을 구웠던 모습이 생생하다. 하지만, 규모가 커진 탓에 주인장을 볼 수 없고 젊은 직원들만 보였다. 그래도 오랫동안 맡아온 고소함이 듬뿍 담긴 빵냄새는 익숙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부러 맛있냐고 누군가에게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맛이었다. 한 동네에 오랫동안 정착해 같은 곳에서 운영되는 단골집은 그래서 편하다.


방금 구워진 영국식 빵들이 채 식기도 전, 직원들은 이름표에 따라 가지런히 빵들의 줄을 맞췄다. 빵 종류가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름은 몇 개 있다. 그 외 빵들은 그저 내 눈을 즐겁게 해주는 눈요기에 지나지 않는다. 무언가 이름으로 기억된다는 건 내게 각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름들을 나지막이 부를 때면 저절로 떠오르는 인물이나 풍경이 있다. 마치 라디오로 음악을 듣다가도 나도 모르게 따라 흥얼거리는 것처럼. 그렇게 일부러 들추지 않아도 각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잘은 몰랐지만 세상엔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이 참 많다. 달콤하고 텁텁한 맛을 싫어하는 나는 초콜릿을 배어물 때마다 느껴지는 갈증이 마뜩잖다. 몸이 지칠 때엔 어쩔 수 없이 초콜릿 범벅의 과자나 파이를 찾기도 하지만 그건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이들은 초콜릿이 들어간 모든 걸 사랑하고 좋아한다. 그래서 스코프에서 빵을 살 때엔 초코 브라우니를 빼먹지 않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초코 브라우니만 사기에는 늘 좀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좋아하는 스콘도 같이 챙겼다. 스콘은 삼각김밥처럼 생겨 웬만해서 헷갈리는 법이 없다. 가게엔 나 말고도 등산복 차림의 손님이 서너 명 더 있었는데, 아침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한산하게 가게를 구경했다.


네모 반듯한 브라우니를 포크로 잘라먹던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브라우니를 입에 집어넣고 맛을 보았다.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몬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나도 한 조각 떼어서 먹었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달달한 초콜릿과 폭신한 질감이 부드럽게 씹혔다. 나는 어깨를 살짝 올렸다 내리며 아무 이상이 없다는 제스처를 취한 후 머그잔에 우유를 따랐다. 그러자 아이는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빠, 초코 브라우니는 원래 쫀득해야 하는데, 이건 푸석하잖아!"


아이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그리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황급히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마침 가게에서 찍은 사진들을 확인했다. 아뿔싸, 초코 브라우니와 비슷한 '초코 브라우니 케이크'이란 게 있는 줄 몰랐다. 또렷하게 새겨진 이름표 뒤로 아이가 먹고 있는 빵들이 보였다. '케이크'라는 낱말이 하나 더 들어갔을 뿐인데 그렇게 맛이 다를지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는 나는 본래 단 것을 좋아하질 않아 잘 몰랐다는 핑계를 서둘러 댔다. 그런데 갑자기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랜덤박스를 들고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미리 걱정했던 적이 있는가. 마치 내게만 행운의 기운이 가득해서 운이 따를 것만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그런 부푼 기대들은 막연해서 어떤 근거도 없다. 그런데 그런 행운에 대한 어설픈 기대로 무심코 중요한 일을 선택하고 결정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내 맘대로 되지 않으면 부질없이 알량한 심보를 부렸다. 사소한 것에는 지나치게 신경 쓰면서 정작 중요한 일에는 꼼꼼하지 못했던 나를 반성해 본다.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 만질 수 없는 안개 같은 것들을 소망했던 것은 아닐까. 거꾸러진 현실과 달리 꿈에서는 유연하게 하늘 높이 비행을 했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면 무슨 꿈을 꿨는지 조차도 모른 채 잔불처럼 흥분해 있었다.


이제껏 나는 제대로 모르면서 많은 일들을 벌였다. 친구의 말처럼, 의지로 사는 한 삶의 고통은 수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기꺼이 그런 삶의 고통을 느끼기 위해 의지를 불태웠어야 하는데, 사실 나는 고통이나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쉽게 포기했던 것이다. 그만큼 나약하게 굴었다. 잘 모르면서도 누군가에게 물어보거나 도움을 요청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시든 꽃을 탓하면서 지나간 계절에 자주 사로잡혔던 것이다. 무심코 초코 브라우니 케이크를 골랐던 것은 내게 사소한 일일까, 아니면 중요한 일일까 생각해 본다.


* 어제 있었던 불의의 항공기 사고로 돌아가신 모든 분들의 명복을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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