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흰 구멍에 빠진 날

by 윤이프란츠


양말에 염치없는 구멍이 났다. 겨우 나 뚫렸을 뿐인데도 민망했다. 구멍 사이로 숨기고 싶은 속살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속살은 꼬물꼬물 애벌레처럼 창백해 보였다. 해가 들지 않는 구멍 속에선 나방일지 바구미일지. 밤벌레가 다 클 때까지 알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건 저 작은 구멍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린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궁지에 몰렸을 때, 벼락같이 절망, 공포, 울분 같은 감정들이 일었다. 막다른 지경에선 나는 혼신을 다해 저항했지만, 거진 끝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밝힌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것였다. 그렇게 꿈틀대는 것도 한계에 이르면 불능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결단을 해야 했다. 그 한계를 뚫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


나는 구멍이 참 신경 쓰였다. 누군가 구멍이 난 사연을 물었더라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나는 구멍이 난 줄도 몰랐으니까. 구멍에 대해선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 닳고 해어질 줄 알았더라면 반짇고리라도 장만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누구라도 구멍 난 걸 아는 체했더라면, 구멍이 그토록 커지게 두지 않았을 테댜.


아무튼, 나는 구멍 난 게 싫다. 구멍은 무언가 있다가 사라진 것이다. 이전과 다르게 무엇이 변했을 때 구멍이 생기곤 했다. 나는 그걸 초췌한 현실이라 여겼다. 일상을 함께 했고 일생을 동반할 것이라 믿었던 것들이 한순간 사라지면, 구멍이 하나씩 뚫렸다. 그런 처지가 맘에 들진 않았다. 초라해 보이니까.


구멍이 별거지 대수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구멍이 난 까닭에 다른 짝을 잃어버리게 생겼다. 보잘것없는 구멍 하나가 양말의 용도를 폐기시켰다. 아무리 따져도 득 보단 실이 많을 수밖에. 그러니 별거 아닌 게 아니다. 나는 이걸 구멍의 이치라 말한다.


죽은 듯이 고요한 겨울, 사위어가는 것들이 푸석해진 얼굴로 막다른 곳에 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낯이 흐려졌다. 돌연 하늘은 제 몸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곤 자기 안에 가득 찬 눈들을 털어냈다. 흰 눈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떨어지는 게 진눈깨비 같더니 어느 틈엔가 함박눈이 되었다. 소보로 빵에 뿌려진 쿠키처럼 바삭바삭 소리를 낸다.


흰 눈이 내 발 밑에 켜켜이 쌓였다. 이 세상 모든 구멍의 흔적을 다 지우려는 것 같았다.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면서 말이다. 미추(美醜)의 분간도 없이 모든 것들이 하얘졌다. 나는 폭신한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몸을 눕혔다. 나는 괜찮아졌다. 나는 아무래도 오늘 하얀 큰 구멍에 빠진 것 같으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