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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배틀

by 이진무

그러자 스피커는 갑자기 심장을 들썩이며 비트에 맞춰 랩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야, 잘 들어봐, 이 얘기는 중요해. 제페토 박사님 말, 귀 기울여야 해.

아빠는 널 위해 매일 밤낮 일하시잖아. 그 고생 덜어드리려면, 너도 노력해야 해.

공부 열심히 해서 아빠를 기쁘게 해. 불쌍한 제페토 아빠, 웃게 만들어야 해.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면 뭐가 되겠니? 쓸모없는 바보, 나중엔 후회할걸?

시간은 금이야, 낭비할 틈이 없어. 책상에 앉아서 지식을 쌓아 올려.

딴짓할 시간에 연필 잡고 펜을 굴려. 미래를 위한 투자, 지금 바로 시작해!

공부 열심히 해서 아빠를 기쁘게 해. 불쌍한 제페토 아빠, 웃게 만들어야 해.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면 뭐가 되겠니? 쓸모없는 바보, 나중엔 후회할걸?

사람들이 널 보고 손가락질할 거야. ‘바보!’, ‘멍텅구리!’, ‘글도 못 읽는 놈!’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잖아, 그렇지? 정신 차리고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해!

제페토 아빠 말씀 명심해, 잊지 마. 네 앞날은 네가 만드는 거야, 알겠니?

공부해서 꿈을 향해 나아가. 쭉! 후회 없는 삶을 살아, 멋지게!”


‘아니, 이 스피커 뭐야? 왜 공부하란 잔소리만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거야.’


피노키오는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스피커를 흉내 내서 랩을 뱉었다.


“떠들어 봐, 마음대로 지껄여 봐! 난 내일이면 여기를 떠날 거야.

지겹다 지겨워, 온종일 공부 타령, 책상에 앉아 있긴 죽어도 싫어!

나는 자유를 원해, 마음껏 뛰어놀 거야. 산과 들을 누비며 바람을 가를 거야.

공부 따윈 집어쳐! 내 사전에 없어. 난 나만의 길을 갈래, 누가 뭐라든!

연필 잡는 손보다 나무 타는 게 좋아. 칠판 글씨보다 풀 내음이 더 좋아.

착한 아이 코스프레, 이젠 질렸어. 내 안의 모험심이 날 부르고 있어!

나는 자유를 원해, 마음껏 뛰어놀 거야. 산과 들을 누비며 바람을 가를 거야.

공부 따윈 집어쳐! 내 사전에 없어. 난 나만의 길을 갈래, 누가 뭐라든!

모두가 똑같은 길을 가라고 말해도 나는 달라, 난 특별한 피노키오.

내 심장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겨 넓은 세상 속으로 지금 당장 떠날 거야!

안녕, 지루한 세상아! 난 간다! 내일 아침이면 난 저 멀리 갈 거야.

자유를 향해, 꿈을 향해! 피노키오의 모험은 이제 시작이야!”


피노키오의 랩이 끝나자마자 스피커는 웃으며 조롱하기 시작했다.

“깔깔깔!”


마치 ‘풉- 어이없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건 공상일 뿐 현실이 아냐.

일을 해서 돈을 벌지 못하면 아무도 너에게 밥을 주지 않아.

지금 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지 않니?

소리를 들어보니 점심부터 굶었구나.

자유도 좋지만, 그 배고픈 거는 어떻게 해결할 건데.

세상에는 아무도 공짜로 밥을 주지 않아.

너는 엎드려서 구걸하는 얼간이 거지가 될 거야.”


‘아니, 이 스피커가 선을 넘네!’


피노키오는 결국 폭발해서 소리쳤다.

“닥쳐! 그만두지 못해!”


하지만 스피커는 멈추지 않고 계속 듣기 싫은 말을 쏘아댔다.

“얼간이, 바보, 멍텅구리, 거지…”


피노키오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손에 들려있던 밥그릇을 그대로 스피커를 향해 집어 던졌다.


사실 스피커를 맞출 생각은 없었고, 그냥 화가 나서 던진 거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밥그릇은 스피커의 머리에 정통으로 명중했다.


불쌍한 스피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바닥엔 파편 몇 조각과 부서진 플라스틱 조각이 흩어졌다.


부서진 스피커.jpeg


피노키오는 당황했다.
“어… 설마 진짜 맞았어? 미안한데?”


방 안은 조용했다. 랩 배틀은 끝났다. 스피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방 안이 그렇게 조용한 건 아주 오랜만인 것 같았다.


피노키오는 창문을 열어, 산들바람을 맞았다. 그 순간, 마음 한편에서 속삭임이 들렸다.


“자유란… 어쩌면, 스피커 하나쯤 부숴야 찾아오는 건지도 몰라.”


그는 그 말을 웃으며 되뇌었다.


그때였다.

“꼬르륵!”


피노키오의 배에서 리듬감 있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곧 비트가 깔리고 랩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뱃속의 격렬한 항의에 피노키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아무리 자유가 좋다지만… 허기 앞에서는 자유도 잠시 멈춤 상태가 되는 법이니까.


순간, 스피커의 말이 떠올랐다.


“세상에는 공짜 밥이 없다.”


그래. 배가 고프면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피노키오는 주방으로 갔다.


제페토 박사의 연구실 주방은 말하자면 ‘비밀 기지 창고 스타일’이었다.

서랍을 열면 나사와 건전지 옆에 통조림이 들어 있었고, 전자레인지 안에는 실험용 초코파이가 굳어 있었다.

그것 말고도 먹을 것이 꽤 많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피노키오가 아무것도 만들 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밥은 물론 라면도 끓일 줄 몰랐다.


그는 조용히 냄비를 쳐다보다가, 자신이 불을 켜는 법도 배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스피커가 그렇게 공부하라고 떠들어댔는지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배고픔을 참기 어려웠다.


스피커라도 있었으면 라면 끓이는 레시피라도 알려달라고 했을 텐데 이제는 늦었다.


살짝 눈물이 맺힐 뻔했지만, 대신 배가 다시 “꼬르륵!”하며 반격했다.


그는 허둥지둥 주방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잡동사니 박스 속에서 이상한 걸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하얗고, 둥글고, 매끈하게 생겼다.


“이거… 달걀이잖아?”


그는 신중하게 그것을 들어서 노크하듯 “똑똑” 두드려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에서도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헉… 이거 살아있어?”


불빛에 비춰보니 안쪽에서 진짜 뭔가가 꿈틀거렸다.

작고 입이 긴 새 같은 모양의 그림자였다.

피노키오는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달걀이 분명해. 병아리가 되기 전에… 먹어야지.”


기억을 더듬어 제페토 박사가 달걀 프라이를 만드는 장면을 떠올렸다.

아주 간단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탁!” 깨서 부으면 된다.

피노키오는 그대로 따라 했다.


문제는… 약한 불로 프라이팬을 미리 데워야 한다는 것을 잊었다.

그는 불로 데우지도 않은 차가운 프라이팬에 그 하얀 것을 “탁!” 깨서 부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달걀에서 툭 튀어나온 건 노른자도 흰자도 아닌… 주둥이가 아주 긴 조그마한 새였다.

그 새는 프라이팬 위에서 한 바퀴 구르더니 “뽀르르릉!” 하고 날아올랐다.


그런데 소리는 삐약삐약이 아니고, “웅웅웅―” 흡사 청소기를 3단계 모드로 돌리는 소리였다.


피노키오는 프라이팬을 든 채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뭐야… 계란 아니었어?”


피노키오 드론.jpeg



하늘로 붕 떠오른 그 새는 반짝이며 주변을 스캔하듯 빙빙 돌기 시작했다.

눈이 있는 듯 없는 듯했지만, 카메라 렌즈 같은 게 반짝였다.


그때였다. 머릿속에 제페토 박사가 며칠 전에 중얼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외계의 감시 기술이 날 주목하고 있어… 드론으로 관찰하고 있다고.”


피노키오의 눈동자가 사방으로 흔들렸다.

아니, 설마… 설마 했는데…


그것은 병아리가 아니었다. 달걀이 아니었다. 달걀 프라이는 당연히 아니었다.


그건… 외계 감시 드론이었다.


아주 작고, 아주 귀엽게 위장한, 스파이 드론이었다.


원래, 제페토 박사는 우주 저편까지 이름을 날리던 과학자였다.


웬만한 행성에선 “제페토? 아, 그 천재?” 할 정도였다.


그런데 박사는 쓸데없는 고집이 좀 있었다.


국립과학연구소에서 잘나가던 시절, 듣도 보도 못한 프로젝트 하나를 들고나왔다.


이름하여 ‘로봇과 인간의 친구 프로젝트’였다.


당시만 해도 로봇은 겨우 청소나 시키는 수준이었는데, 제페토 박사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야, 나중엔 로봇이 인간이랑 대등해지는 시대가 올 거야. 그때 가서 싸우지 말고 지금부터 친밀하게 지내야 해!”


대부분 사람은 반대했다.

“로봇이 우리 공격하면 어떡해? 덜덜덜…”


그런데 박사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어차피 닥칠 일, 막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자고!”


결국 이 프로젝트 때문에 박사는 연구소에서 쫓겨나고, 우리가 아는 그 가난한 과학자 신세가 되었다.


‘아, 저 고집불통 영감탱이’라며 다들 비웃었지만, 사실 박사의 아이디어는 지구 밖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행성에서 큰 관심을 두고 감시 로봇까지 파견해서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어쨌든 피노키오는 스파이 드론을 보고 매우 놀라 프라이팬을 든 채 얼어붙었다.


한동안 주방엔 묘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 속에서 다시 한번 피노키오의 뱃속에서 우렁차게 소리가 났다.

“꼬르륵―”


‘세상에 공짜 밥은 없다.’라는 스피커의 잔소리가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


배는 고파 죽겠는데 듣기 싫은 소리가 계속 들리니, 피노키오의 AI 뇌는 과부하가 걸려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피노키오는 이를 악물고, 아니 배에 대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피노키오, 너 진짜 뭐라도 먹어야 해. 안 그러면 죽어―”


결국 피노키오는 결심했다. 직접 먹을 걸 구하러 나가기로….


그런데 문을 나서기 전에, 스피커의 조롱 섞인 한마디가 다시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넌 엎드려 구걸하는 지질한 거지가 될 거야.”


피노키오는 잠깐 정지하고, AI 특유의 무표정 얼굴로 중얼거렸다.

“흥! 두고 봐. 난 절대 구걸 안 해. 정중하게 부탁해서 밥을 얻을 거야.”


피노키오 구걸연습.jpeg


그러고는 거실 한복판에서 손을 앞으로 내밀며 몇 번 리허설을 했다.


“여보세요, 행인님! 저에게 밥 좀 주실 수 있나요? 아니면 동전 몇 개라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표정은 최대한 귀엽게, 목소리는 마치 “저 밥 주세요옹~”이라고 말하는 강아지 더빙 영상처럼 콧소리를 섞어서 깜찍하게 들리도록 했다.


“좋아. 완벽해. 나 정도면 캐릭터 상품도 가능할걸?”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본인은 정중하게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약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있었다.


손을 뻗는 각도는 마치 ‘돈 내놔, 당장’ 하는 것 같았고, 말투도 어디서 본 것 같은 협박조였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눈빛이었다.


정중하다기보다는, ‘나 지금 화나기 일보 직전이야. 네가 나를 실망시키면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라는 느낌이랄까!


그런데도 피노키오는 자신만만하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밖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코끝이 바로 얼어붙을 것 같은 매우 추운 날이었다.


몇 걸음 나갔다가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꼬르륵 소리가 ‘지금 돌아가면 너는 굶어 죽을 거야.’라고 외치는 것 같아 계속 걷기로 했다.


10분 정도 걸어 큰 거리로 나갔다.


구걸하는 피노키오.jpeg


어떤 아저씨가 등에 짐을 잔뜩 짊어지고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아 추워! 아 추워!”


피노키오는 아저씨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이보세요, 아저씨! 저한테 먹을 거 좀 나눠주시죠.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저씨는 피노키오를 밀치며 버럭 소리 질렀다.

“저리 비켜! 추워 죽겠는데 어디서 거지 같은 게 길을 막아. 에이 재수 없어.”


갑자기 욕을 먹자, 피노키오는 눈물이 팽 돌았다.


그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피노키오는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다.

‘저 아저씨는 너무 늙어서 그래. 나처럼 어린애 말을 못 알아듣는 거야. 이번엔 좀 젊은 사람에게 부탁하자.’

마침 젊은 커플이 피노키오 쪽으로 오고 있었다.


둘은 손에 커다란 솜사탕을 들고 깔깔대다가 키스하고 껴안고 난리도 아니었다.


피노키오는 저 둘이 왜 저러는지,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눈엔 오직 거대한 솜사탕만 보였다.


피노키오 솜사탕.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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