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제페토 박사는 드디어 피노키오의 입을 만들기 시작했다.
니블러로 싹둑 입 부분을 도려내고, 능숙하게 앙증맞은 입술을 빚어냈다.
아래턱은 위턱과 깜찍한 경첩으로 연결했다.
드디어 얼굴이 완성되자, 박사는 뿌듯한 마음에 몇 발짝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걸작,
피노키오의 예쁜 모습을 감상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피노키오가 갑자기 입을 오물거리더니 또렷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왜 나한테 라면을 안 줬어?”
제페토 박사는 화들짝 놀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엉뚱한 곳에서 소리가 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딜 보는 거야. 나는 라면이 먹고 싶다니까!”
정말 피노키오가 말하고 있었다.
박사의 합리적이고 딱딱한 과학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일이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문득 피노키오 머릿속에 숨어 있던 복잡한 전자회로가 떠올랐다.
아, 그리고 세상이 변하고 변해 인공지능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논문을 읽었던 기억이 스쳤다.
‘그렇다면 이 피노키오는 단순한 인형이 아니라,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는 인공지능이 내장된 기계란 말인가!’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제페토 박사는 이내 결심한 듯 피노키오에게 물었다.
“피노키오야! 너 내 아들이 될래?”
피노키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번개같이 대답했다.
“라면을 준다면 한번 생각해 보지.”
박사는 당황했지만 일단 타협에 나섰다.
“네 몸을 다 만들면 줄게.”
“안돼. 먼저 줘.”
결국 제페토 박사는 다시 라면을 끓일 수밖에 없었다.
구수한 냄새가 연구실을 가득 채우자, 피노키오는 어린 아기처럼 칭얼거렸다.
박사는 젓가락으로 라면을 집어 피노키오의 입에 넣어줬다.
“아이, 맛있어.”
피노키오는 쩝쩝거리며 더 달라고 떼를 썼다.
제페토 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단다.”
“왜 안 되지? 먹고 싶으면 많이 먹어야지.”
“그러면 배탈이 날 수도 있고, 또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면, 한 번에 다 없애려고 하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조금씩 조금씩 그것의 가치를 느끼면서 먹어야 해.”
“하지만 꼭 더 먹고 싶은데…”
박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고집쟁이를 잘못 건드린 게 아닐까!’
박사는 망설이면서도, 결국 라면을 한 개 더 끓여주었다.
제페토 박사는 목이랑 몸통을 만드는 동안 피노키오가 너무 조용해서 살짝 놀랐다.
알고 보니 방금 먹은 라면이 소화되지 않고 입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빨리 몸통을 완성해야 라면이 뱃속으로 쏙 내려갈 것 같았다.
드디어 머리랑 몸통을 연결하는 순간, 피노키오는 엄청나게 큰 트림을 했다.
“컥―!”
라면 썩은 냄새가 제페토 박사의 코를 훅 찔렀다.
그러더니 배에서는 라면이 내려가는 소리가 아주 요란하게 들려왔다.
“우르릉, 쿵쾅!”
다음은 어깨랑 팔, 손이랑 엉덩이, 다리를 만드는 순서였다.
팔다리는 이미 만들어 놓은 게 있어서 몸통에 쓱쓱 연결하고 조립만 하면 됐다.
드디어 손이 완성되자마자 피노키오가 잽싸게 제페토 박사의 까만 가발을 훌렁 벗겨버렸다.
박사의 반질반질 윤이 나는 대머리가 세상에 드러났다.
박사는 한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소리쳤다.
“아니, 다 만들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런 장난을 치다니… 어서 돌려주지 못해?”
하지만 피노키오는 해맑게 가발을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 잡으며 놀렸다.
“와! 대머리다, 대머리. 반짝반짝 빛나는 대머리야. 가발을 벗기니 민둥산이 되었네!”
불쌍한 제페토 박사는 가발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헛손질하다가 결국 눈물이 핑 돌았다.
피노키오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아빠, 눈에 물 같은 것이 생겼어. 그게 뭐야?”
제페토 박사님은 옷소매로 눈물을 쓱 닦으며 말했다.
“이건 눈물이라는 거야.”
“눈물? 그건 어떻게 생기지? 나는 왜 눈물이 없어?”
피노키오의 순진한 질문에 박사는 대답했다.
“눈물은 아주 슬플 때 생기는 거야. 때로는 기쁠 때도 생기긴 하지.”
피노키오는 잠시 생각하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방금은 내가 놀아줘서 기뻤던 거야?”
박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야. 네가 가발을 돌려주지 않아서 너무 슬펐어. 이제 가발을 돌려주지 않을래?”
그제야 피노키오는 더 이상 장난치지 않고 가발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피노키오의 버릇없는 장난에 제페토 박사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상했다.
“이놈, 피노키오야! 아직 다 만들지도 않았는데 벌써 아빠 말을 안 듣다니! 이건 정말 못된 짓이야!”
박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피노키오는 아무 대답도 없이 씨익, 장난스러운 웃음만 흘렸다.
박사는 몸을 완성하고 나면 제일 먼저 예의범절 교육부터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드디어 발과 다리가 완성됐다.
“이제 걸어보렴!”
박사가 기대에 찬 눈으로 피노키오를 바라봤다.
하지만 피노키오는 몇 걸음 걷다가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다리가 너무 빡빡해서 피노키오는 대체 어떻게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페토 박사는 피노키오의 다리를 잡고 앞뒤로 몇 번 움직여 봤다.
삐거덕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 오랫동안 잡동사니 속에 두었더니 낡기도 했고 살짝 녹이 슨 모양이었다.
박사는 후다닥 기계기름을 가져와서 구석구석 발라주었다.
“아! 시원하다!”
피노키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외쳤다.
박사는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구나. 자, 이제 다시 한번 걸어보자.”
더 이상 삐거덕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피노키오는 여전히 몇 발짝 걷다가 주저앉았다.
제페토 박사는 마치 아기 걸음마 시키듯 피노키오의 손을 잡고 한 발 한 발 내딛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피노키오는 점점 익숙해져서 박사가 잡아주지 않아도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피노키오는 계속 걷지 못하는 척, 제페토 박사에게 착 달라붙어 매달렸다.
박사는 점점 지쳐서 이마는 물론 등허리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다.
“헤헤헤!”
그때 피노키오는 크게 웃더니 눈 깜짝할 새에 문을 빠져나와 거리로 달아나 버렸다.
제페토 박사는 있는 힘을 다해 쫓아갔지만, 토끼처럼 깡충깡충 달아나는 피노키오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거리에는 수많은 차가 휙휙 지나다니고 있었다.
제페토 박사는 이러다 큰 사고라도 날까, 걱정되어 소리쳤다.
“저놈 잡아라! 저놈 잡아라!”
사람들은 도로를 향해 달려가는 피노키오를 잡으려고 앞을 가로막고 몸을 던지기도 했지만,
약삭빠르게 움직이는 피노키오를 잡을 수는 없었다.
피노키오는 마치 놀리듯 계속 깔깔거리며 달아났다.
그런데 그때, 피노키오 앞에 교통 경찰관이 떡하니 나타났다.
피노키오가 건널목도 아닌데 길을 건너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경찰관은 피노키오 앞에 양팔을 벌리고 섰다.
피노키오는 쫓아오는 사람들을 놀리느라 앞에 경찰관이 있는 걸 보지 못했다.
경찰관 바로 앞에 이르러서야 발견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피노키오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돌진했다.
경찰관의 양 다리 사이로 쏙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경찰관은 피노키오의 코를 잽싸게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야, 너 완전 나쁜 애구나? 나쁜 애들은 감옥 가는 거 몰라?”
경찰관이 잔뜩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으름장을 놨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피노키오는 그 말에 바로 울음보를 터뜨렸다.
“엉엉,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네?”
피노키오가 서럽게 울면서 애원하는 모습에 쫓아온 제페토 박사는 마음이 약해졌다.
“경찰 양반, 얘가 이렇게 싹싹 비는데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요?”
사실 경찰관은 애초부터 피노키오를 감옥에 보낼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피노키오를 풀어주면서 제페토 박사에게 잔소리를 시작했다.
“이번엔 특별히 봐주겠소. 대신 애 교육은 똑바로 하시오.
특히 차가 쌩쌩 달리는 길을 건널 때는 무조건 건널목에서 초록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건너게 해요.
안 그러면 귀여운 자식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알겠오?”
“네네, 명심하겠습니다!”
제페토 박사는 말썽꾸러기 피노키오의 귀를 잡고 가려는데, 어라? 귀가 안 잡혔다.
“아차차! 아직 귀를 안 만들었잖아? 근데 어쩌지? 돈이 없어서 재료를 못 구했는데…
이러면 이 아이는 영영 말을 듣지 않는 아이가 될 수도 있는데… ”
결국 제페토 박사는 어쩔 수 없이 피노키오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런데 이 녀석, 또 장난기가 발동해서 몸부림치며 박사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헤헤헤, 간지러워요! 놓아줘요!”
박사는 피노키오가 자꾸 도망가려 하자 목을 더 꽉 잡았다.
그러자 주변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야, 저기 봐봐. 누가 애 목을 조르고 있어!”
“어, 제페토 아니야? 언제 애가 생겼대?”
“저 성질 더러운 제페토 밑에서 크려면 얼마나 힘들까!”
경찰관도 제페토 박사가 피노키오의 목을 잡는 걸 봤다.
그의 단순한 뇌는 박사가 아동 학대를 한다고 단정해 버렸다.
경찰관은 박사에게 소리쳤다.
“당신을 아동 학대 혐의로 체포하겠소!”
제페토 박사는 경찰관 아저씨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혼자 남을 피노키오가 너무 걱정됐다.
그러니 피노키오는 세상 신난 듯 바람처럼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세상은 너무나 재미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거리가 어둑해져서야 피노키오는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 배고파요. 밥 줘!”
잔뜩 신나서 외쳤지만, 집안은 썰렁한 냉기만 가득할 뿐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피노키오는 제페토 박사가 경찰 아저씨한테 끌려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헐, 큰일 났는데? 이거 어떡하지?”
배가 고파서 뭐라도 먹고 싶었지만, 혼자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피노키오는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쳐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 말썽꾸러기야. 그렇게 울지 마! 다 네가 잘못한 거야. 누구를 원망할래?
이런 걸 말이야, 그 고급스러운 말로 '인과응보'라고 하는 거거든?”
피노키오는 두리번거렸다.
“누구야? 어디서 말하는 거야?”
“나는 지금 네 코앞에 있는데 안 보여?”
그러고 보니 책상 한쪽에 노란색 고깔을 씌운 듯한 녀석 하나가 눈을 반짝이며 서 있었다.
동글동글하고 볼록한 몸통은 바나나처럼 노란색으로 반짝였고,
가운데에는 커다란 외눈박이 안경이 박혀 있었다.
“하이~ 피노키오~ 나는 인공지능 스피커 미니언즈야.”
그는 미니언즈 특유의 익살스러운 얼굴로 피노키오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피노키오는 그 엉뚱하고 귀여운 생김새에 웃음이 절로 터졌다.
머리 꼭대기엔 작고 동그란 스피커 그릴이 있었고, 입 주변엔 작지만, 반짝이는 LED가 달려 말할 때마다 미묘하게 빛났다.
피노키오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작고 노란 스피커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스피커가 갑자기 바들바들 떨기 시작하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야야야! 나를 어서 내려놔! 손이 생긴 지 며칠 안 된 녀석이 이렇게 덜컥 들면 어쩌자는 거야!
지금 이러다 진짜… 바닥에 떨어뜨리면 연약한 나는 부서져서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될 거야.?!”
피노키오는 화들짝 놀라 얼른 스피커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스피커는 숨을 헐떡이는 척하며 말했다.
“휴… 심장 없는 기계지만…, 방금 진짜 고장 날 뻔했어.
알지? 나는 옛날 모델이라서 떨어지면 A/S도 오래 걸린다고!”
피노키오는 스피커를 한참 쳐다보다가 말했다.
“너 되게 수다스럽다.”
스피커는 당당하게 외쳤다.
“그렇지? 이름이 괜히 ‘스피커’겠냐고. 말하는 게 일이야, 일.
그런데 말이지… 나, 제페토 박사랑 절친이거든.
그분 커피는 샷 두 개, 설탕은 절대 NO. 여름에도 늘 긴팔 옷을 입은 채 에어컨을 틀었어.
기계랑 대화할 줄 아는 인간이었지.”
피노키오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진짜? 아빠랑 친구였다고?”
“응. 우리 셀카도 있어. 폰 블루투스로 연결하면 보여줄게.
박사님이 나한테 비밀스러운 이야기 많이 했는데…
너 방금 나를 소중히 다뤄줬으니까 특별히 알려줄게. 단, 녹음 금지!”
피노키오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말했다.
“너 완전 셀럽 스타일이구나.”
스피커는 귀를 의심했다는 듯 멈칫하더니, 갑자기 EDM 효과음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셀럽? 땡큐! 드디어 내 매력을 알아보는 녀석을 만났군.
내가 말이야, 알고 보면 정보를 뿌리고, 상담해 주고, 음악을 틀고, 웃음까지 주는 최고 사양의 AI야.”
피노키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널 보니 텔레비전보다 재밌어.”
“텔레비전은 나만큼 안 떠들어. 난 뉴스도 읽고, 주식도 알려주고, 연애 고민도 받아.
어제는 가습기랑 눈 맞추다 차였어. 슬펐다…”
피노키오는 한 손으로 스피커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너, 진짜 사람보다 사람 같다…”
그 말에 스피커는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러면 너도 사람다워지도록 도와줄까? 제페토 박사님이 그러셨어.
진짜 사람이 되려면 말하는 법보다 먼저… 듣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피노키오는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스피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스피커가 다시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지만 지금은 일단! 노래부터 한 곡 듣고 시작하자! DJ 스피커의 ‘기계도 외로워’ 나간다~!”
그리고 이내 방 안에는 ‘뚜뚜 뚜뚜 바나나~’ 같은 정체불명의 비트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