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찌 할아버지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내가 신기한 물건을 보여주겠네. 그만 뒤적거려.”
제페토 박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뭔데 그래? 얼른 보여줘 봐!”
버찌 할아버지는 금속 덩어리를 꺼냈다.
그 반짝이는 광택에 제페토 박사의 두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이건 뭐지?”
버찌 할아버지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
“자네 같은 과학자가 모르면 내가 뭐라 하겠나. 나도 모른다네.”
제페토 박사는 잠깐 뾰로통해졌지만, 눈앞의 금속 덩어리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냥 넘기기로 했다.
“잠깐 만져봐도 되겠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금속 덩어리를 냉큼 받아 품에 쏙 집어넣었다.
그간 버찌 할아버지가 마음을 바꿔 물건을 다시 뺏어가는 걸 여러 번 겪었던 터라 잽싸게 움직인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버찌 할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짓인가! 왜 내 물건을 덥석 품에 넣는 건가!”
“자네가 만져보라고 하지 않았나?”
“잠깐 만져보라고 한 거지, 품에 넣으라고 한 적은 없다네. 어서 다시 내놓게!”
버찌 할아버지는 성큼 다가가 제페토 박사의 품에서 금속 덩어리를 꺼내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금속 덩어리가 퍼뜩 움직이며 버찌 할아버지 손을 빠져나오더니, 제페토 박사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딱!”
“아야야야야!”
제페토 박사는 다리를 부여잡고 깡충깡충 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게 미쳤나! 하마터면 절름발이가 될 뻔했잖아!”
버찌 할아버지는 속으로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꾹 참으며 시치미를 뗐다.
“맹세코 내가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내가 내 다릴 친 거냐? 자네가 쳤지!”
“아니라니까! 이건 전부 저 쇳덩어리 탓이야!”
“그래, 쇳덩어리에 맞은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걸 내 다리에 던진 건 자네잖아!”
“난 안 던졌다니까!”
“거짓말!”
“제페토 박사, 자꾸 그러면 이 쇳덩어리 자네한테 안 넘긴다!”
“뭐라고?”
제페토 박사는 그만 이성을 잃고 벼락같이 버찌 할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고물상 한복판에서 두 노인의 웃지 못할 대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번 싸움은 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훨씬 더 격렬하고, 훨씬 더 시끄러웠다.
“쨍그랑!”
고물들이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딸그락 딸그락”
깡통들이 신나게 굴러다녔다.
“야옹!”
평화롭게 낮잠을 즐기던 고양이들마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혼비백산 도망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왜소한 체격의 버찌 할아버지는 거구의 제페토 박사를 이길 수는 없었다.
“휙!”
버찌 할아버지의 자랑스러운 가발이 허공으로 날아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고,
그의 눈 한쪽은 파랗게 멍이 들었으며, 심지어 코에서는 주르륵, 코피까지 흘러내렸다.
그러나 버찌 할아버지에게도 큰 소득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페토 박사의 얼굴에 긴 손톱자국을 만든 것이었다.
싸움이 끝나자, 두 노인은 지친 숨을 헐떡이며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피식,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한바탕 진한 연극을 끝낸 배우들 같았다.
이내 두 사람은 손을 맞잡으며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며,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다.
“고맙네!”
제페토 박사는 진심으로 말하며 땅에 떨어진 금속 덩어리를 소중히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절뚝거리면서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버찌 할아버지는 비록 그 반짝이는 금속 덩어리를 빼앗긴 듯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음속에 묵직했던 큰 짐 하나를 내려놓은 듯 시원했다.
“휴… 잘 가라, 골칫덩어리.”
할아버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코끝을 문질렀다.
제페토 박사의 집은 연구실 2층에 있었다.
그러니까 연구실이 제페토 박사의 집이고 집이 제페토 박사의 연구실인 셈이다.
아래층은 반짝이는 조명 아래 커다란 컴퓨터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컴퓨터 앞에는 책상과 의자가 아주 깔끔하게 놓여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기다란 작업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연구실의 3분의 1 정도는 마치 버찌 할아버지의 고물상처럼 온갖 잡동사니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모터, 배터리, 바퀴, 카메라, 디스플레이 등 온갖 부품들이 제멋대로 쌓여 있었다.
이름도 모를 이상한 금속 조각들과 철판들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가장 특이한 건 연구실 한구석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소형 용광로였다.
시꺼멓게 그을린 금속 통에는 물건을 넣고 뺄 수 있는 뚜껑이 달려 있었고,
아래에는 숯을 태우고 헤어드라이어나 송풍기로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는 별도의 통까지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제페토 박사는 버찌 할아버지에게서 얻어 온 금속 덩어리를 작업대 위에 고이 올려놓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낡은 침대와 망가진 탁자가 있었고,
부엌이라고 부르기엔 좀 민망했지만, 칼, 수저, 전자레인지, 그릇들이 있어 간단한 요리는 해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벽 한쪽에는 온갖 과학 서적과 알 수 없는 설계도들이 빼곡히 꽂혀있어서 제페토 박사가 과학자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허기가 진 나머지 제페토 박사는 급히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뭐니 뭐니 해도 짧은 시간에 허기를 채우는 데는 라면만 한 게 없으니까.
냄비에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제페토 박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면과 수프를 투하했다.
잠시 후, 고소한 라면 냄새가 연구실 안을 가득 채웠다.
“크으~ 이 냄새!”
그런데 그때였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 나도 배고프다.”
제페토 박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1층까지 내려가 보았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제페토 박사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후루룩! 후루룩!”
구수한 냄새와 함께 맛있는 라면 먹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까지 들렸다.
“엉! 엉! 배고파!”
제페토 박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크게 소리쳤다.
“어떤 놈인지 내가 식사하는 걸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페토 박사는 다시 평화롭게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제페토 박사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마치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의 손은 이미 연장과 부품들을 향해 꿈틀거렸다.
드디어 로봇을 만들 시간이 되었다.
손과 발, 몸통까지는 다 준비가 되었는데, 늘 그를 애태우게 하던 ‘머리’가 없어서 여태껏 시작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버찌 할아버지 고물상에서 드디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머리를 손에 넣은 것이다.
제페토 박사는 혼자서 ‘킬킬킬’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온 세상에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간신히 꾹 참았다.
왜냐고? 만약 그랬다가는 버찌 영감탱이가 당장이라도 돈을 내놓으라고 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갖기 위해 얼굴이 살짝 긁히긴 했지만, 몇 대 더 쥐어박았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한창 작업에 몰두하던 제페토 박사는 갑자기 외로움에 젖어 들었다.
그는 연구에 미쳐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과 담을 쌓고 지냈다.
사람들도 그의 우락부락하고 사나운 모습에 겁을 먹고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소식조차 알 수 없었다.
가족? 제페토 박사는 가족이 뭔지도 몰랐다.
여자를 만나보지 못했으니 결혼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가족을 이룬다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막연하게 부러워하고 동경할 뿐이었다.
그는 금속 덩어리를 든 채 생각에 잠겼다.
‘흥! 그까짓 가족? 내가 직접 만들면 되지!’
“자, 우선 이 금속 덩어리로 나의 아들을 만드는 거야. 그다음엔 딸을 만들고, 돈이 조금 더 모이면 그때는 아내를 만드는 거지!”
갑자기 제페토 박사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그는 부품들을 죽 늘어놓고는 신이 나서 말했다.
“이름을 뭐라고 짓지?
그래! 피노키오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
행운을 가져다줄 이름이야.
피노키오는 아주 오래전에 만났던 사람 이름이지.
그의 가족들은 하나같이 친절했고, 너무 행복해 보였어.
그래서 그가 너무 부러웠거든.”
제페토 박사는 금속 덩어리를 들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저 눈을 만드는 게 좋겠어. 피노키오도 제일 먼저 아빠를 볼 권리가 있지!”
박사는 먼저 연필로 눈과 코, 입을 그렸다. 특히 눈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눈이 커야 얼굴이 예뻐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안경 뒤의 눈이 너무 작아서 사람들이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지웠다가 다시 그리기를 반복한 후에야 마음에 드는 얼굴이 나오자, 니블러로 먼저 눈 주위를 도려냈다.
단순히 금속 덩어리인 줄 알았는데, 금속 통 안에는 여러 가지 색으로 깜빡이는 전자 장비들이 들어있었다.
제페토 박사는 과학자로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이 머리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보다는 어서 빨리 아들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검은 구슬을 하얀 금속에 붙여서 눈동자와 흰자위를 만들고 눈꺼풀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눈을 만들자마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제페토 박사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박사는 그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신기하게도 눈동자가 그를 따라 움직였다.
박사는 그 앞에서 ‘빙글빙글 돌아’ 춤을 추었더니 눈동자도 빙글빙글 돌았다.
박사가 이리저리 깡충 뛰면 눈동자도 깡충깡충 뛰었다.
박사는 너무 재미있어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은 코를 만들 차례였다.
작은 스테인리스 통을 잘라서 만들려고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코는 비죽 튀어나온 것이라 혼잡한 곳에서는 다른 사람을 쿡쿡 찌를 수가 있었다.
게다가 피노키오는 재료가 부족해서 조그맣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코가 여자의 가슴이나, 혹시 키 큰 사람을 만나면 허리 아래를 콕콕 찌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제페토 박사는 코를 말랑말랑한 플라스틱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바로 잡동사니들이 가득한 상자를 뒤적거렸다.
마침내 버찌 할아버지 고물상에서 가져온 부드러운 플라스틱 관을 찾아냈다.
“아하, 이거다!”
박사는 신이 나서 플라스틱 관을 예쁘게 다듬어 피노키오의 얼굴 가운데에 딱 붙였다.
그런데 웬걸? 코를 붙이자마자, 플라스틱 코가 쭉쭉쭉 사정없이 자라기 시작했다.
박사는 너무 놀라서 눈만 휘둥그레 뜬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바라만 봤다.
코는 자라고, 또 자라고, 계속 자라더니 다행히 벽에 ‘쿵’ 하고 부딪히자 그제야 멈췄다.
박사는 피노키오의 길어진 코를 보고 껄껄 웃었다.
“하하하! 이런 일도 다 있군!”
이내 정신을 차린 박사는 길어진 코를 예쁜 모양으로 잘라냈다.
점점 더 멋져지는 피노키오의 모습에 제페토 박사는 아주 크게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