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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페토의 다리

by 이진무

제페토 박사가 피노키오의 새 다리에 마지막 나사를 또르르 조이던 그때였다.


“꼬르륵!”


피노키오 뱃속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누군가 무너진 지하철 터널에서 절박하게 구조를 요청하는 소리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것은 피노키오가 입술을 오므리며 일부러 내는 소리였다.


제페토 박사는 깜박 속아 코끝이 찡해졌다.
“아이고야… 얘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뱃속에서 이런 소리가 날까?”


제페토는 그제야 생각났다.
‘조금 전 장을 보다가 피노키오 주려고 사 온 갓 구운 빵이 있었지.’


박사는 종이봉투 안에 김이 솔솔 나는 그 빵을 꺼내며 말했다.
“많이 배가 고팠던 모양이구나…”


그 말을 듣자, 피노키오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맞아요.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밖에 나가 먹을 걸 좀 달라고 구걸, 아니 정중히 부탁했는데… 다들 모른 척했어요.
이 세상은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 정말 많아요.

그중에 왕중왕은 … 빵집 할아버지예요.

빵을 좀 나눠달라고 했더니 이 추운 겨울에 나에게 구정물을 뿌린 거예요.

구! 정! 물!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가 있죠?

마치 저를… 식빵… 아니, 깡통 취급하듯 했어요.

나는 너무 추워서 집으로 달려왔고, 용광로에 불을 붙이고 잠자다가 다리가 이렇게 된 거예요. 엉엉…”


제페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뭐?! 그 할망구 같은 영감탱이가 감히?!

우리 착한 피노키오가 빵 좀 달랬다고 구정물을 뿌려?!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있나!

내가 당장 가서, 그의 인생에 구정물 좀 뿌려줘야겠구나!”


말을 마친 제페토는 덜덜 떨리는 몸을 이끌고 벌떡 일어나더니, 옷을 막 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몸도 제대로 녹지 않은 채였다.

코는 빨개져 있고, 입가엔 아직 입김이 모락모락.


피노키오는 그런 제페토의 팔을 붙잡았다.

“아빠! 지금 나가시면요… 빵은 커녕 아빠가 고드름이 돼서 돌아오실지도 몰라요.

몸을 녹이고, 기운을 충분히 회복해서 가야죠. 그래야 혼도 제대로 내죠.”


제페토는 그 말에 눈을 껌뻑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지금 나가면 혼을 내긴커녕 구정물 한 바가지 맞고 돌아올 수도 있겠구나.

일단 배를 채워야겠다.”


드디어 제페토는 빵을 피노키오 앞에 내밀었다.

피노키오와 빵.jpeg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그 빵이었다.


피노키오의 눈이 번쩍였다.


그는 마치 사냥감을 낚아채듯, 눈 깜짝할 새에 손을 뻗었다.

빵이 손에 닿는 순간, 피노키오의 눈빛이 달라졌다.

세상 모든 슬픔이 사라지고, 마치 어벤져스 멤버가 된 듯한 눈빛이었다.


제페토는 웃으며 말했다.
“자, 우리 같이 이 빵을 먹자꾸나.”


그러자 피노키오는 입가에 크―은 미소를 띠며 외쳤다.
“좋아요! 근데… 혹시 버터는 없어요?”


제페토는 황당한 얼굴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마가린 한 통이 외롭게 남아 있었다.


그날 아침, 연구실에서 빵과 함께… 마가린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빵을 우걱우걱 먹던 제페토 박사가 갑자기 소리쳤다.

“스피커야, 노래 좀 틀어줘! 제목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란다. 자, 부탁해요~!”


근데 아무 대답이 없었다.


“부탁해요!”


박사가 몇 번 더 외쳐도 묵묵부답이라 스피커가 있던 곳을 찾아보았다.


그곳에는 스피커가 떡하니 박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박사가 스피커를 툭 치면서 말했다.

“스피커야, 왜 그래? 왜 대답을 안 해?”

그 순간 스피커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제페토와 미니언스.jpeg


알고 보니 이미 부서진 걸 피노키오가 그럴싸하게 세워 놓은 것이다.


제페토 박사는 부서진 조각 하나를 들고 피노키오를 노려봤다.


눈에서는 막 분노의 레이저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피노키오는 박사의 표정을 보고 바로 사정했어.


“아빠!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스피커가 저한테 너무 심하게 잔소리했어요.

나는 아빠가 저 때문에 감옥 간 게 너무 속상해서 엄청 기분이 안 좋았는데,

거기다 대고 ‘네가 잘못했느니,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느니’ 하면서 계속 잔소리하는 거예요.

게다가 저한테 ‘얼간이, 바보, 멍텅구리, 거지’라고 했다고요!

너무 화나서 저도 모르게 밥그릇을 던지고 말았어요.

근데 진짜 맞추려던 건 아니에요.

어쩌면 걔가 와서 맞은 걸 수도 있어요!

그래도 어쨌든 제가 잘못한 거 맞아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엉엉—”


제페토 박사는 화난 표정을 풀지 않고 피노키오가 울게 내버려 뒀다.


피노키오는 무릎을 꿇고 박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앞으로는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 약속할게요.”


“애들은 꼭 아쉬울 때만 그런 소리 하더라.”


“학교도 가고, 공부도 하고, 착한 아이가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할게요!”


“애들은 아쉬울 때만 그런 소리 한다니까.”


“전 다른 애들이랑 달라요! 누구보다 착하다고요!

거짓말은 절대 안 할 거예요. 약속할게요,

아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도 거들어 드리고, 아빠 나이 들면 편하게 모실게요!”


제페토 박사는 엄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자기가 없을 때 피노키오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하고 고생했을까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는 피노키오의 다리에 시원하게 기름을 발라주면서 말했다.


“알겠다. 어쨌든 너는 내 아들이니 믿어줄 수밖에 없구나.

하지만 착한 아이가 되겠다는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피노키오는 제페토 박사 마음이 풀어진 걸 보고는 기쁨에 겨워 춤을 추며 말했다.

“이제 아빠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당장 학교에 가겠어요!”


“우리 착한 아들!”


“하지만 학교에 가려면 옷이 있어야 하잖아요.”


제페토 박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피노키오에게 학교 갈 옷을 마련해주고 싶었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다.


그는 집 한쪽 구석에 쌓여 있던 꽃무늬 포장지를 꺼내 조심스럽게 재단하고, 단추 대신 낡은 나무 단편을 달았다.


나무껍질을 얇게 벗겨내 두 장을 겹쳐 붙인 뒤 신발처럼 모양을 만들었다.


질기진 않았지만, 피노키오의 발을 감싸는 데는 충분했다.


빵 한 덩어리는 모자로 변신했다.


박사는 그걸 반으로 자른 뒤 속을 살짝 파내고, 가장자리를 손질해서 피노키오 머리에 씌웠다.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그의 정성과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제페토 피노키오 옷.jpeg


피노키오는 얼른 달려가 물이 든 대야에 모습을 비춰봤다. 그러고는 만족한 듯 뻐기며 말했다.


“꼭 신사 같아요!”


“그래. 그렇구나. 하지만 신사를 만드는 건 좋은 옷이 아니라 착한 마음과 매너라는 걸 잊지 말아라.”


“그런데 학교에 가려면 아직도 필요한 게 있어요.”

피노키오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했다.


“그게 뭐지?”

제페토 박사는 궁금한 눈으로 물었다.


“책이 없잖아요.”


박사는 잠시 당황했지만, 피노키오는 진지했다.


“그렇구나. 어떻게 마련해야 하지?”


“그야 쉽죠! 책방에 가서 사면 돼요.”


제페토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멈췄다.

“돈은?”


피노키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전 돈이 없어요.”


제페토 박사는 갑자기 축 늘어지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돈이 없구나.”


피노키오는 제페토 아빠의 슬픈 얼굴을 보니, 같이 슬퍼졌다.


피노키오는 처음으로 느꼈다. 이게 바로 가난이라는 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슬퍼지는 것. 얼굴이 시무룩해지는 것.

그게 가난 때문이라니, 너무 이상했다. 너무 불공평했다.


가난은 아빠처럼 착한 사람도 슬프게 만드는구나…


피노키오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인공지능 로봇의 눈에서 눈물이 나올 리 없었다.


하지만 제페토 박사는 피노키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피노키오가 얼마나 제페토 박사를 사랑하는지.


그래서 눈물은 나오지 않지만, 진심으로 슬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페토 박사는 뒤돌아서 그의 다리를 툭툭 두드려 보고는 말했다.

“이제 생각이 났어. 네 책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피노키오는 펄쩍 뛰며 외쳤다.

“정말요?”


“그럼.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니? 잠깐만 기다리렴. 내가 책을 구해오마.”


문을 닫고 나온 제페토 박사는 일단 크게 한숨부터 쉬었다.


그러고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좋아… 책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아, 이 길밖에 없구나.”


그는 결심한 듯 곧장 니콜라 씨의 가게로 갔다.


그는 여러 가지 신기한 기계를 만들기도 팔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문 앞에 다다른 제페토 박사는, 마치 방황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문고리 앞을 빙빙 돌았다.


그걸 지켜보던 니콜라 씨가 문을 벌컥 열고는 외쳤다.

“제페토 박사! 거기서 뭘 그렇게 빙빙 돌고 있나! 날씨가 춥다고 체조라도 하시나? 어서 들어오시게!”


제페토 박사는 깊은 탄식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니콜라 씨는 익숙한 동작으로 뜨거운 차를 내왔다.


박사는 그 따뜻함에 잠시 마음이 녹는 듯했지만, 본론은 따로 있었다.


“웬일인가? 자네는 이 가게 근처에도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건 피노키오가 태어나기도 전의 꽤 오래된 일이었다.


제페토 박사는 니콜라 씨와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의족 때문이었다.


사실 제페토 박사의 한쪽 다리는 기계로 만든 의족이었다.


박사의 뛰어난 솜씨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볍고 움직이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삐걱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매우 부드러워 사람들은 제페토 박사가 의족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니콜라 씨는 어떻게 알았는지 그걸 팔라고 끈질기게 졸라댔다.

마치 희귀 수집품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결국 둘은 대판 싸웠다.


“네 얼굴은 AI 필터로도 못 봐주겠다!”

제페토 박사는 고함치며 절교 선언까지 했다.


그랬던 두 사람이 오늘 마주 앉았다.


그리고 제페토 박사는 얼굴이 빨개지며 말 한마디를 꺼냈다.


“사실은 내 아들 피노키오가 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네.

그런데 학교에 가려면 책이 있어야 하는데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책을 살 돈이 없다네. 그래서…”


니콜라 씨의 눈빛이 번쩍였다. 바로 이거다, 하는 눈빛.

“그래서?”


“내 의족을 팔겠네.”


순간,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차에서 올라오던 김도 멈춘 듯했다.


니콜라 씨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네. 자, 그러면 얼마가 필요한가?”


“100코인이면 충분하겠지. 예전에 자네가 그 가격에 사겠다고 했잖나.”


니콜라 씨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건 옛날얘기지.

그때는 100코인 주고도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거든. 그때 팔았으면 100코인 이상은 너끈히 받았을 걸세.”

“그러면 얼마에 줄 수 있나?”


“지금은… 뭐, 피노키오의 책을 산다고 했으나 20코인을 주겠네.

그거면 책을 사고도 남을 거야. 혹시 알아? 입학 선물로 연필도 살 수 있지 않겠나?”


제페토 박사는 한숨을 쉬었다. 착한 박사는 협상할 줄 몰랐다.


만약에 그가 조금만 눈치가 있어도 100코인은 충분히 받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페토 박사의 의족을 200코인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순진한 제페토 박사는 눈을 감았다.


계산기를 두드릴 줄도 모르고, 흥정에는 젬병인 박사는 결국…


“좋아, 팔겠네.”


그 순간, 니콜라 씨가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러나 정확하게 박사의 의족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제페토와 의족.jpeg


마치 정든 친구를 떠나보내듯, 그 과정을 바라보던 제페토 박사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으아아앙… 내 다리야… 내 평생 동반자야…”


니콜라 씨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목발 하나를 건넸다.

“이걸로 당분간 버텨. 근데 걱정하지 마. 자네처럼 다부진 사람은 어디든 갈 수 있어.”


박사는 목발을 짚고 눈 덮인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목발이 바닥을 때릴 때마다 ‘딱, 딱’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상체를 단단히 고정한 채, 성한 다리로 힘껏 밀어내며 다음 발걸음을 이어갔다.


힘껏 움직이다 보니 땀이 나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오는 길에 책방에 들러 책을 샀다.

신기하게도 책값이 딱 20코인이었다. 마치 누군가 계산이라도 해놓은 것 같았다.


다리를 잃었지만, 피노키오가 기뻐할 것을 생각하니 제페토 박사의 얼굴에도 환하게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다리 하나로 책을 얻은 날이네. 뭐, 괜찮아. 피노키오는 내 두 다리보다 더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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