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페토 박사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피노키오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왔다.
문턱을 넘는 제페토 박사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그는 두 팔로 소중히 끌어안고 있던 책 묶음을 피노키오에게 내밀었다.
“자, 너의 책이란다.”
피노키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동그래지며 책을 받았다.
순간 기쁨이 북받쳐 깡충깡충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피노키오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제페토 박사의 옆구리에 끼워진 목발 하나.
피노키오는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다가가 말했다.
“우와! 재밌겠다! 아빠, 이거 나도 해볼래요!”
그러고는 제페토 박사의 손에서 목발을 확 낚아챘다.
그 순간이었다.
“어…”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제페토 박사의 몸이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쓰러진 그 모습에 피노키오는 웃음을 터뜨리려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제야 그는 봤다.
제페토 박사의 왼쪽 다리가 없어진 것을.
“아… 아빠, 한쪽 다리가… 없어졌어요.”
피노키오의 목소리는 떨렸다.
눈이 커졌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제페토 박사는 다정하게 웃으며 피노키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책을 사려니 돈이 있어야 하지 않겠니. 그래서 그냥… 의족을 팔아버렸단다.”
피노키오는 그 말을 곱씹듯 천천히 이해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럼… 다리가 없으면 어떡해요…”
제페토 박사는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깟 다리는 또 만들면 되지.
너도 내가 만들었는데, 다리 하나쯤 못 만들겠니?”
그 말에 피노키오의 가슴속 어딘가가 뻥 뚫린 듯 시큰해졌다.
무엇이 사랑인지, 무엇이 진심인지, 말로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제페토 박사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어린 마음이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아빠의 목을 끌어안고 수없이 입을 맞췄다.
세상 모든 책보다 귀한 선물은 바로 제페토 박사였다.
그는 다리를 잃었지만, 피노키오에게는 가장 단단하고 따뜻한 기둥이 되었다.
그날, 집 안에는 책 냄새와 함께 사랑의 온기가 가득히 퍼져나왔다.
이른 아침, 창문 틈으로 햇살이 조심스럽게 집 안을 더듬고 있었다.
피노키오는 아직 덜 깬 눈으로, 어설픈 옷차림을 한 채 현관 앞에 섰다.
단추는 삐뚤게 채워졌고, 가방끈은 한쪽이 비뚤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얼굴에는 해사한 웃음이 가득했다.
“아빠, 다녀올게요!”
피노키오는 활짝 손을 흔들고는, 또각또각 골목을 향해 뛰어나갔다.
작고 가벼운 몸이 이른 아침 공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제페토 박사는 조용히, 문틈 사이로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제 잡을 수도, 따라갈 수도 없는 거리에 있었다.
아침 바람이 피노키오의 가벼운 옷자락을 조용히 건드렸다.
마치 누군가 그를 걱정하며 만지는 것처럼.
나무껍질이 바스락거리며 바람에 부딪힐 때마다, 그 소리는 제페토의 마음을 건드렸다.
사랑이 소리로 변해 귓가에 스미는 듯했다.
박사는 누구보다 피노키오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싶었다.
등을 토닥이며, 손을 꼭 잡고 길을 걸으며, 말해 주고 싶었다.
“오늘도 잘 다녀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의족을 팔아 책을 샀다.
목발에 의지해 겨우 움직이는 자신이, 오히려 피노키오에게 짐이 될까, 두려웠다.
혹시라도, 아빠가 목발을 짚고 있는 모습을 보고, 다른 아이들이 피노키오를 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아이들의 눈에 피노키오가 ‘특별한’ 아이로 보이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자꾸만 마음을 붙잡았다.
그래서 그는 멀리서 바라보는 선택을 했다. 조용히, 애써 웃으며 문을 닫았다.
하지만 세상은 늘 장난꾸러기에게 그렇게 쉽고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길모퉁이를 돌자마자, 피노키오는 팔을 휘저으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걸음마다 ‘찰칵찰칵’ 경쾌한 소리가 났다.
“아빠가 나 때문에 다리를 잃었는데… 꼭 공부를 열심히 해서 보답할 거야!”
혼잣말이었지만, 그 목소리는 당차고 또렷했다.
피노키오의 머릿속은 이미 다큐멘터리를 한 편 찍고 있었다.
“나는 공부를 잘할 수 있어. 처음엔 1등을 못 하겠지만, 한 달이면 가능할 거야.
그러면 방송국에서 인터뷰하러 날 찾아오겠지.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하냐고 물어보면 꼭 제페토 아빠 얘기를 해줄 거야.
그때 배경음악은 좀 감동적으로 깔아줘야 해.
‘아빠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아빠는 내 책을 사기 위해 다리를 팔았습니다.’라고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모두 감동해서 펑펑 울 거야.
그리고 나는 점점 유명해져서 돈을 많이 벌게 될 거야.
그러면 제일 먼저 아빠의 다리를 사드려야지… 금으로 된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때였다.
어디선가 폭발하는 리듬의 음악이 들려왔다.
“따―다 다다다―! 업―업―업―!!!”
순간, 피노키오의 귀가 쫑긋! 두 눈이 번쩍! 열렸다.
“엥? 이게 뭐지?”
귀가 자동으로 와이파이처럼 음악 소스를 잡아냈다.
점점 심장이 비트에 맞춰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마음은 설레고, 발끝은 저절로 리듬을 타고 있었다.
개구쟁이의 강력한 호기심 모드가 완전 충전 상태로 발동했다.
“이거 왜 이렇게 신나지?”
피노키오의 머릿속엔 이미 불꽃놀이, 댄스파티, 사탕 폭죽이 팡팡 터지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의 머릿속에 ‘양심’이라는 이름표를 단 작은 요정 캐릭터가 나타났다.
미니 제페토였다.
작고 수염도 난 미니 제페토가 두 손을 허리에 얹고 피노키오를 째려봤다.
“피노키오! 너 지금 뭐 하려는 거냐! 학교 가기로 했잖아. 다리를 팔아서 책을 사준 아빠가 생각나지 않냐!”
피노키오는 뜨끔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맞아… 나 공부하겠다고 맹세했지…”
결심을 다진 피노키오는 다시 묵묵히 걸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앞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왼쪽엔 평범한 학교길. 잔잔한 바람과, 출석 체크 소리가 들리는 정돈된 루트.
오른쪽엔 음악이 콸콸 나오는 의문의 길. 기분 좋은 스모그, 네온사인, 그리고 이상하게 중독성 강한 멜로디.
피노키오는 스스로 타일렀다.
“아냐, 정신 차려! 난 공부해야 해. 아직 교문도 못 갔는데 딴짓하면 진짜 벌 받아!”
그런데 이상했다. 머리는 학교를 외치고 있었는데, 다리는 이미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상태였다.
“야, 다리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노선 이탈이야!”
피노키오는 당황해서 다리에게 외쳤다.
하지만 다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음악에 홀린 듯, 경쾌하게 스텝을 밟으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피노키오는 소리쳤다.
“진짜 딱 오늘만! 오늘만 가는 거야! 내일부터는 완전 공부벌레로 살 거야. 다이어리 첫 줄에 쓴다. 정말이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피노키오는 미사일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발은 바닥을 두들기며 점점 음악 쪽으로 다가갔다.
음악은 점점 커졌다. 비트는 심장을 두드리고, 가사는 이상하게 현실보다 솔직했다.
“오늘만 놀자~ 내일부터 진짜 열심히 살 거야~ 우린 늘 그랬잖아~ 후회는 다음 생에~”
“헉, 이 노래… 나를 위한 노래잖아?”
눈앞에 불쑥 등장한 건, 형광 불빛이 번쩍이는 거대한 야외 공연장이었다.
피노키오는 입이 쩍 벌어졌다.
무대 위에선 DJ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오늘 학교 가려던 사람 멈추세요! 여기서 인생을 배워갑니다~!”
피노키오는 잠시 망설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미래는 잠시 접어두자… 공부는 내일의 나한테 맡기는 걸로.”
그리고 두 팔을 번쩍 들어, 리듬에 몸을 실었다.
그의 하루는, 그렇게 계획과 전혀 다르게 출발했다.
피노키오는 점점 커지는 음악 소리에 이끌리듯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착한 그곳.
와우! 그야말로 눈과 귀가 번쩍하는 신세계였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미래에서 튀어나온 듯한 로봇 테마 의상을 입고 있었고,
머리엔 ‘기긱기긱’ 이니셜이 박힌 거대한 헤드폰, 팔목엔 LED 반짝이 팔찌,
그리고 손엔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응원봉이 들려있었다.
포토존에서는 플래시가 정신없이 터졌고, 팬들은 열광적인 구호를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기! 긱! 기! 긱! 기긱기긱 최고!!”
공연장 입구 위쪽엔 거대한 홀로그램이 펼쳐져 있었는데,
로봇 아이돌 ‘기긱기긱’이 초승달 눈웃음을 지으며 반짝이는 모습이었다.
무대 뒤편에선 리허설 소리도 살짝 새어 나왔다.
“웅-웅-찰칵-기긱긱긱-♪”
무대 상단에는 뭔가 화려하게 적힌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피노키오는 한참 그걸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무슨 말이지? 읽을 수가 없네…”
피노키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 아래를 서성댔다.
그때 공연장 구석, 자판기 옆에 눈이 반짝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뭔가 혼잣말을 하며, 손에는 반으로 접은 티켓을 들고 있었다.
피노키오는 궁금한 마음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여긴 뭐 하는 곳이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소녀는 피노키오를 한 번 흘겨보더니 턱을 세우며 말했다.
“플래카드 보면 몰라? 거기 다 쓰여있는데?”
피노키오는 얼굴이 벌게져서 소녀의 귀 옆으로 입을 가져가 살짝 속삭였다.
“그게… 나 아직 글씨를 못 읽어. 아마 내일부터는 읽을 수 있을 거야. 학교에 가기로 했거든.”
그러자 소녀는 갑자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깔깔깔깔!”
그리고 다 들으라는 듯 크게 외쳤다.
“세상에나! 이거 완전 바보 아냐? 머리는 이렇게 큰데 글씨도 못 읽어? 어쩜~”
피노키오는 버럭 외쳤다.
“내일부터 읽을 수 있다니까?!”
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지금은 글을 못 읽잖아. 지금은 바보 맞지, 뭐~ 자, 그런 불쌍한 바보를 위해 내가 특별히 읽어줄게.”
그리고 티켓을 휘적이며, 플래카드를 느끼한 톤으로 읽어내렸다.
“로-보-아-이-도~ㄹ 반-짝-반-짝~ 기-긱-기-긱! 오-느-도~ 내-마-음~ 충-전~ 완-료~!! 와우, 감동~”
피노키오는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소녀는 티켓을 높이 치켜들며 말했다.
“오늘은 로봇 아이돌 ‘기긱기긱’의 단독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라고! 이건 진짜 전설이야.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고!”
피노키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입장료는 얼마야?”
“코인 10개.”
피노키오 깜짝 놀라며 말했다.
“헐… 너무 비싼데?”
소녀는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게 비싸다고? 너는 이 공연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지 몰라서 그래.
한번 보고 나면 인생관이 바뀐다니까?
모든 스트레스를 다 날려버리고, 나도 모르게 팔을 흔들게 되는 마법의 무대야.
지금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야. 그러니 꼭 보도록 해.”
그러고는 자기가 들고 있던 티켓을 흔들면서 말했다.
“자, 근데 딱 하나 남은 이 티켓! 너한테 줄 수도 있어. 대신… 코인 10개. 딱 10개만 가져와.”
피노키오는 그 말을 듣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다짐하듯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좋아. 지금 당장 돈을 구해올게! 다른 사람한테 절대 팔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