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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가 될 뻔한 피노키오

by 이진무

공연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 깊은 밤이 조용히 회의실을 덮었다.

무대 감독부터 음향, 조명 오퍼레이터, 무대 설치팀, 분장사들, 그리고 댄서들,

심지어 ‘기긱기긱’과 피노키오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매니저가 앉아 있었다.

눈은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했고 하늘로 치솟은 수염은 사자 갈기 같았다.


“쿵!”

그는 발을 구르며 외쳤다.

“오늘 공연을 난장판으로 만든 게 누구야! 이리 나와라!”


그러나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피노키오 역시 잠자코 있었다.

사실 그는 ‘난장판’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리가 삐걱거릴 정도로 신나게 춤을 추었으니, 그저 즐거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매니저의 사나운 시선은 피노키오에게 꽂혔다.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녀석이냐? 공연을 망친 건 바로 너다.

나는 너 같은 녀석을 댄서로 채용한 적이 없다.”


피노키오는 황당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는 공연을 보다가 너무 멋있어서 잠깐 무대 뒤편으로 간 거예요.

그런데 ‘기긱기긱’이 멋지게 춤을 추고 있지 뭐예요?

누가 그걸 보고 가만히 있겠어요.

나도 따라서 춤을 췄을 뿐이에요.

‘기긱기긱’은 나에게 춤을 잘 춘다고 말해 줬어요.

그들이 내 손을 잡고 무대로 나가자길래 그렇게 한 것뿐이에요.”

“닥치거라. 너 때문에 수많은 관중은 실망해서 항의했고 ‘기긱기긱’의 명성에 찬물을 끼얹었다.

어떻게 책임질 거냐?”


분위기가 점점 심각해지자 피노키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최선을 다해 춤을 췄고 모두 즐거워했다고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거죠?”


매니저는 사자 수염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회의실이 들썩이는 듯했다.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구나! 나는 너 같이 성격이 못된 녀석을 제일 싫어한다.

어떤 벌을 줄지 생각해 보자.”


“벌이라니요? 나는 그저 열심히 춤을 춘 것뿐이라니까요? 근데 왜 벌을 받아야 하죠?”


매니저는 몸을 들썩이며 더욱 큰 소리로 고함쳤다.

“아직도 변명하는 거냐? 사내답게 깨끗이 인정하지 못하겠느냐?”


피노키오 부서진 의자.jpeg


그 순간, 매니저가 너무 화가 나 몸을 비트는 바람에 의자 다리가 댕강 부러지며 뒤로 고꾸라졌다.

“어떤 놈이 의자를 이따위로 만들었어?”

매니저는 부러진 의자를 보며 씩씩대다가, 갑자기 뭔가 번뜩인 듯 멈춰 섰다.
“그래! 의자를 강철로 튼튼하게 만드는 거야.

재료는… 저 피노키오. 그래 얘를 녹이면 되겠네?”


피노키오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비명을 질렀다.

“안 돼요! 제발 살려주세요!

다시는 변명 안 할게요! 다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요… 좀 억울하긴 해요.

저는 아빠가 다리를 팔아서 사준 책을 들고 학교 가던 길이었어요.

그런데요. 공연이 너무 보고 싶어서 책을 코인 열 개에 팔고 입장권을 구해 들어온 거예요.

잘못이 있다면 신나게 춤추며 논 것뿐이에요.

하지만 매니저님이 내가 잘못했다고 하니 잘못한 거겠죠.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저를 용서해 주세요.”

매니저는 피노키오의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빠가 다리를 팔아서 책을 사줬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다리를 팔아 책을 사줬다고? 진짠가?’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딸아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나도 딸을 하나 키우는데…

내가 과연 그 아이를 위해 다리를 팔 수 있을까?

만약 피노키오를 녹여서 의자를 만든다면…

그 아빠는 얼마나 슬퍼할까?

설마… 자살까지 할까?

아니, 진짜 그럴 수도 있겠는데?

그럼 나는 한꺼번에 두 명을 죽이는 거잖아?’


매니저는 의자와 피노키오를 번갈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의 사자 갈기 같은 수염도 기운이 빠졌는지 축 늘어졌다.

하지만 의자는 여전히 필요했다. 결국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좋아, 널 용서해 주겠다. 하지만 의자를 만들 다른 로봇이 필요해.

누가… 내 의자가 될래?”


순간, 공연장은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로봇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매니저가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래, 너. 막내 댄서. 딱 좋아. 얘들아, 쟤 데리고 와.”

막내 댄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거의 튀어 오를 듯 펄쩍 뛰었다.

“안 돼요! 저 진짜 안 돼요!

저 아직 재능이 많단 말이에요!

저… 언젠가 솔로 무대도 해야 해요!

제발 저를 녹이지 말아 주세요!”

그의 두 손은 와이파이처럼 요동쳤고, 눈동자는 거의 드럼 세탁기처럼 돌고 있었다.
매니저는 그런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아주 깊고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후… 미안하게 됐다. 근데 내가 지금 앉을 데가 없단다.

의자가 부서졌거든. 이거 그냥 단순한 의자가 아니야.

나의 권위, 나의 무게감, 나의 무릎 건강이 다 달린 의자야.

그런데 일반 나무가 내 무거운 엉덩이를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구나.

나무로 만들면 금방 부서지겠지. 그래서 이번에는 쇠로 의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네가 꼭 필요하단다. 내 의자가 돼주렴.”

막내 댄서는 입을 떡 벌리고, 고개를 휘익 돌려 피노키오를 향해 분노의 눈빛을 날렸다.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지금 의자가 되게 생겼잖아!’

매니저는 분위기를 정리하듯 손뼉을 딱 쳤다.
“좋아, 모두 움직이자.


일단 창고에서 커다란 솥을 가져오고, 나머지는 근처에서 나무라도 좀 주워 와.

이왕 마음먹은 거, 빠르게 진행하자고.”

회의실 밖 공터에 솥이 걸리고 그 밑에 나무가 쌓이기 시작했다.

막내 댄서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무가 하나하나 쌓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피노키오와 솥.jpeg


캠프파이어가 아니라… 마치 누군가를 ‘조리’하기 위한 식인종의 의식 같았다.

막내 댄서는 점점 쌓이는 장작더미에 현실감이 폭발했다.

“진짜 날… 녹일 건가요? 이게 진짜라고? 나 정말 의자가 되는 거야?”


피노키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꽉 누르고 있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매니저 앞으로 뛰어나갔다.


“매니저님! 안 됩니다!

어떻게 이 귀여운 막내 댄서를 녹이려 하십니까?
그는 점점 댄스 실력이 늘고 있고요, 쓸모가… 많습니다!

의자가 아니라 스타가 될 로봇이에요!”


매니저는 눈썹을 깃발처럼 치켜세우더니,

“쿵!”하고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그러면 내 의자는? 내 엉덩이를 누가 감당할 거냐고!”


피노키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요즘에는요, 쇠처럼 튼튼한 나무도 많답니다.

진짜예요. 그 나무를 구해서 만들면 된답니다. 원하시면 내가 구해 올게요.”

매니저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피노키오를 훑었다.
“거짓말 마라.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이 로봇 중에서 막내 댄서를 대신해 내 의자가 되어줄 로봇이 있다면… 막내 댄서는 살려주마.”


피노키오는 순간 기쁨에 찬 환호성을 질렀다.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살았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그제야 그는 매니저의 말뜻을 정확히 깨달았다.

‘잠깐… 그럼 다른 로봇 하나가 대신 녹아야 한다는 뜻이잖아?

이건… 그냥 살려주는 게 아니잖아!’

피노키오는 갑자기 굳은 동상처럼 멈춰 섰다.


매니저는 그런 피노키오를 뒤로하고, 두 손을 확 벌리며 외쳤다.
“좋아! 누가! 누가 막내 댄서를 대신해서 내 의자가 되겠느냐!”

그러자 로봇들 사이에 갑자기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한 로봇이 슬쩍 옆자리 친구에게 속삭였다.
“야, 네가 나가. 어차피 너는 오래돼서 고물상에 가게 돼 있잖아.”

그러자 그 친구는 깜짝 놀라며 반박했다.
“뭐? 나 알루미늄이야! 가볍고 약하다고! 매니저님의 무게를 못 버텨!”

이후엔 온갖 핑계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나는 무릎이 약해서…”
“나 어제 녹이 슬었어.”

“나 내일 생일인데, 의자가 되면 케이크를 못 먹잖아…”


로봇들의 웅성거림은 점점 커졌지만, 정작 앞으로 나오는 녀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매니저는 조용히 피노키오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봤지? 아무도 막내 댄서를 대신하려고 하지 않잖아. 이쯤 되면 할 말 없겠지?”


피노키오 솥에 들어감.jpeg


피노키오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작은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읊조렸다.

“저요… 제가 의자가 될게요. 저를 녹여 주세요.”


그 순간, 피노키오의 눈앞에는 따뜻한 제페토 아빠의 얼굴이 선명하게 어른거렸다.

‘아빠… 이제 당신을 다시는 볼 수 없겠지만,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게 착한 아이가 되는 거라면, 난 지금 그걸 해보려는 거예요.’


작은 로봇의 마음에 새겨진 아빠를 향한 사랑과 순수한 희생정신이 만들어 낸 기적이었을까…

그의 눈에서 촉촉한 물방울이 한 방울, 또 한 방울 흘러내렸다.


로봇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는 건, 말 그대로 시스템 오류 수준의 기적이었다.

물론 피노키오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서럽게 울었다.


매니저는 그런 피노키오를 바라보며 잔뜩 인상을 썼다.

사실 당장이라도 이 로봇 소년을 용광로에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피노키오는 지금 누군가를 대신해서 녹여달라고 한 거였다.

그 어떤 로봇도 하지 못한 선택을, 이 코가 늘어난 로봇 소년이 한 것이다.


매니저는 순간 피노키오가 살짝…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피노키오의 두 눈에 매달린 투명한 눈물을 보았다.

‘아니… 어떻게 로봇이 눈물을 흘려?’


그 순간, 매니저의 눈시울도 이상하게 뜨거워지더니…

“흐아아아아악…”

울기 시작했다.

그의 울음은 마치 자동차 시동이 걸리는 소리처럼 거칠게 터져 나왔다.

피노키오 매니저.jpeg


매니저의 울음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우자, 주변 로봇들도 하나둘씩 울기 시작했다.

알루미늄도 울고, 스테인리스도 울고, 심지어 막 끌려가려던 막내 댄서까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날 회의장은 눈물과 기름때가 뒤섞인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잠시 후, 모두가 감정을 진정시키자 매니저는 무겁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둘 다 살려주겠다.”

순간 피노키오는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정말요? 살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매니저는 곧이어 덧붙였다.
“피노키오, 너는 공연을 망친 대가로 이곳에서 알바를 해야 해. 물론 수당은… 없다.”


피노키오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뛸 듯이 기뻐하며 외쳤다.
“와! 살았다! 수당은 괜찮아요! 알바는 진짜 자신 있어요!

설거지, 청소, 무대 뒷정리 다 할게요! 살아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그런데 매니저는 마지막으로 아주 조용히, 하지만 결정적인 말을 하나 더 보탰다.
“근데, 너 입장료 말인데… 코인 열 개가 아니고 두 개야.”


피노키오는 그 말을 듣고 입이 쩍 벌어졌다.
“두… 개요?”


매니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여덟 개 바가지 쓴 거야.”


그 순간, 피노키오는 처음으로 분노라는 인간의 감정을 깨달았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이거 알바 끝나면, 그 표 파는 계집애 꼭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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