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키오는 공연팀의 정식 알바생이 되었다.
수당은 없었지만, 대신 얻은 건… 뜨거운 동료들이었다.
매니저는 처음과 달리 은근히 친절했고, 다른 로봇들도 피노키오의 희생에 감동해서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였다. 일은 고됐다. 무대 조명을 들어 올리랴, 댄서들의 땀을 닦아주랴, 나사를 조이고 배터리 충전기를 끌고 다니랴,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피노키오는 신기하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왜냐고? 바로 그녀 덕분이었다. 매니저의 딸. 이름은 ‘팬’이었다.
팬은 솜사탕 같은 부드러운 머리에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진 아이였다.
손에는 항상 스티커 뭉치가 들려 있었고, 미소는 피노키오의 인공지능을 녹일 만큼 치명적이었다.
어느 날, 피노키오가 무대 뒤편에서 줄을 감고 있을 때 팬이 다가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노키오~ 내가 예쁘게 꾸며줄게!”
“응? 갑자기 왜?”
피노키오가 반응할 틈도 없이, 무지개 스티커가 그의 무쇠 팔에 덕지덕지 붙기 시작했다.
반짝이, 토끼, 리본, 공룡, UFO, 심지어 다코야키 스티커까지 등장했다.
피노키오는 따끔거리는 느낌에 움찔했지만, 팬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히히히… 팬, 간지럽다니까…”
그가 간신히 말하자, 팬은 깔깔 웃으며 이번엔 피노키오의 길쭉한 코에 왕관 스티커를 딱 붙였다.
“피노키오,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진대~ 그러니까 이건 왕코 스티커야!”
피노키오는 ‘왕코’라는 말에 살짝 모욕감을 느꼈지만, 팬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서 그냥 넘기기로 했다.
그러더니 팬은 갑자기 줄넘기를 들고 왔다.
그러고는 피노키오의 커다란 발에 묶기 시작했다.
“피노키오, 나랑 같이 줄넘기 해줘! 하나~ 둘~ 셋!”
피노키오는 삐걱거리는 다리로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중심이 안 잡혔다. 줄넘기가 아니라 거의 공중 줄타기였다.
결국 그는 넘어질 뻔했고, 옆에서 로봇 하나가 간신히 잡아줬다.
“아… 이러다 의자가 되기 전에 먼저 바닥에 처박히겠다.”
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번 더! 한 번 더!”
그녀의 체력은 양자 에너지 수준이었다.
피노키오가 간신히 숨을 고르고 있자, 팬은 이번엔 종이컵에 물을 가득 담아 왔다.
“피노키오~ 목마르지? 이거 마셔!”
피노키오는 목마르지 않았지만, 팬이 컵을 입에 대자 어쩔 수 없이 꿀꺽 소리를 흉내 냈다.
물은 줄줄 흘러 옷이 다 젖었지만, 팬은 그게 너무 재밌다는 듯 또 웃었다.
“히히, 물도 먹는 로봇이야! 진짜 사람 다 됐네!”
마지막으로 팬은 피노키오의 파란 옷에 크레파스를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빨간색 하트, 노란 별, 보라색 고양이, 초록색 댄스 로봇…
심지어 이마에는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다.
“여기! 내가 항상 너랑 함께 있어 줄게!”
피노키오는 이제 완전히 팬의 예술작품이 되어 있었다.
온몸은 스티커와 크레파스, 물로 범벅이었고 로봇 동료들은 지나가며 킥킥거렸다.
“피노키오! 진짜 아이돌 같아”
그럼에도 피노키오는 웃음을 지었다.
왜냐하면 팬의 눈엔, 자신이 그 누구보다 멋지고, 착하고, 소중한 존재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피노키오는 깨달았다.
‘착한 아이가 된다는 건… 완벽해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는 거야.’
피노키오는 요즘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무대는 언제나 반짝였고, 로봇 동료들은 친절했으며, 팬은 항상 옆에 있었다.
‘이런 게 행복인가?’
피노키오는 생각했다.
하지만 행복은 늘 조용히, 그리고 은근히 시험을 준비하는 법이다.
그날도 평소처럼 ‘기긱기긱’의 공연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정신없는 퍼포먼스가 예고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대 세팅은 폭풍처럼 바빴다.
피노키오는 조명탑 아래에서 케이블을 정리하며 숨 쉴 틈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팬이 다가왔다. 솜사탕처럼 포슬포슬한 머리를 흔들며, 피노키오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피노키오, 나 어때? 공주로 분장했어!”
그 말에 피노키오는 딱 한 번, 딱 한 번만 그녀를 힐끗 보고 말했다.
“와! 진짜 예쁘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문제는… 말투였다. 너무 감정 없이 말해버린 것이다.
팬의 눈썹이 꿈틀했다.
“나도 노래 잘한다고! 이거 봐!”
그러더니 갑자기 스피커 위에 폴짝 올라섰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노래를 불렀다.
"아아아아—— 나 공주다아아!”
그러나 피노키오는 케이블을 잡은 채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해. 거긴 올라가면 안 돼. 그리고 너 노래 잘하는 거,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우주도 알걸?”
팬은 항상 상냥하던 피노키오가 관심을 보이지 않자, 입꼬리가 덜덜 떨릴 만큼 화가 났다.
그리고 그 유명한 대사가 터졌다.
“나 잡아봐라~!”
팬은 순식간에 조명탑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팬!”
주변 로봇들이 일제히 외쳤다.
“조명탑은 점검도 안 끝났어요! 지금 올라가면 안 돼요!”
피노키오는 눈이 휘둥그레져선 모든 걸 내팽개치고 전력 질주했다.
그녀가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그는 거의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팬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살짝만 바람이 불어도 떨어질 듯 위태위태했다.
“팬!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바보였어. 널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제대로 표현 못 했어.
제발… 내려와 줘.”
팬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 약속해. 나랑 항상 놀아주고, 내 얘기 잘 들어주고, 날 예쁘다고 해줘야 해.”
“백 번! 천 번도 해줄게!”
“정말이지?”
“인공지능의 양심을 걸고.”
팬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이제 내려갈게.”
하지만… 막상 내려가려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피노키오, 땅이… 뱅글뱅글 돌아… 무서워…”
피노키오는 단호하게 외쳤다.
“아래를 보지 마! 나만 봐! 나 피노키오야! 그대로 있어, 내가 갈게!”
팬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만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을 보았다.
땅이 확 위로 솟아오를 것 같은 무서움에 손을 놓고 말았다.
“아아아악!”
피노키오는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렸다.
두 팔을 쭉 뻗어 팬의 옷자락을 낚아채며 몸을 회전했다.
그러나…
“쾅!”
그 충격에 둘이서 한 바퀴 뒹굴었고, 다행히 팬은 피노키오가 꽉 붙들고 있었다.
팬은 멀쩡했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을 때, 피노키오는 다리가 꺾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피노키오… 피노키오!!”
팬은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 우리 피노키오, 어깨도 부서지고, 다리도 부러졌어! 어서 고쳐줘요!”
공연팀의 기술자 로봇이 다가와 피노키오를 진단했다.
“머리는 멀쩡해요. 인공지능도 정상이에요. 다만… 팔과 다리는 조금 수리해야겠네요.”
팬은 피노키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네 곁을 지킬게. 너도 나만 바라봐야 해.”
피노키오는 약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물론이지… 공주님…”
매니저가 돌아왔을 땐 이미 일이 벌어진 뒤였다.
팬이 조명탑 꼭대기에서 떨어질 뻔했다는 소식에,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애가 조명탑에 왜 올라가?!”
다행히 팬은 멀쩡했다. 하지만 매니저의 눈엔 걱정이 가득했다.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피노키오가 수리를 마치고 나올 때, 매니저가 불렀다.
조용히, 팬 몰래.
“피노키오. 먼저 말해야겠다. 팬을 구해줘서… 정말 고맙다.”
피노키오는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
“천만에요. 예쁜 팬이 위험한데 가만히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매니저는 잠시 그 미소를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다… 팬이 너를 너무 따르는 것 같아.”
피노키오는 순간 깜짝 놀라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나, 해고당하는 건가…?
“넌 무대의 구석구석, 위험한 곳을 누비며 일하고 있지.
그런데 팬이 너를 너무 좋아해서 계속 따라다녀.
그러면 또 무슨 사고가 날지 몰라.”
매니저의 말은 단호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어른의 말투였다.
“그래서 말인데… 인제 그만 너의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아빠, 제페토 말이다. 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그분도 병이 날 거야.
그런 불효를 저지르면 안 되잖아.”
‘제페토… 아빠…’
피노키오의 가슴이 묘하게 시큰해졌다.
학교 간다고 말하고 나온 뒤, 시간이 꽤 흘렀다. 매일 밤 기다리고 있을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벽난로 앞에 앉아, 시계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모습.
혹시 감기라도 걸리셨다면… 혹시, 아픈 데가 더 심해졌다면…
‘아니야. 그건… 절대 안 돼.’
피노키오는 눈을 감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매니저는 작게 미소 지으며, 조그마한 지갑을 건넸다.
“그냥 보내기 섭섭해서. 지갑 안에 코인 열 개 넣어뒀단다. 아버지께 꼭 전해드려.”
피노키오는 그 지갑을 두 손으로 받았다. 마음이 너무 무거워, 손바닥이 금방 식어버릴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팬에겐 말하지 말고. 알지? 얘가 눈치채면… 난리 날 거야.”
그래서 피노키오는 최대한 조용히, 최대한 정중하게 나가려고 했다.
인사라도 한마디 남기고 싶었지만, 그 순간…
“피노키오!!”
팬이 들이닥쳤다. 솜사탕 같은 예쁜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눈은 벌써 촉촉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어딜 가려고 해?”
피노키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안해. 나… 가야 해. 제페토 아빠가 내가 보고 싶어서 병이 들었을지도 몰라.
나는 더 이상 불효자식이 될 수는 없어.”
“나는, 나는 병이 들어도 괜찮다는 거야? 제페토 아빠 때문에 간다는 건 다 거짓말이지.
우리 아빠가 협박한 거지?”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어떻게 팬에게 거짓말하겠어. 아빠가 날… 너무 기다리고 계셔.”
“거짓말! 혹시 내가 귀찮아서 가는 거야? 내가 그날 다치게 해서 그런 거지?! 나 때문이지?!”
팬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눈물은 이미 줄줄 흘렀다.
피노키오는 당황하며 손을 휘저었다.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팬은 내 가장 소중한 친구야.
하지만 더 이상 아빠가… 아빠가 나를 기다리다 병이라도 나시면… 난 그걸 감당할 수 없어.”
팬은 마지막 희망처럼 매니저를 향해 외쳤다.
“아빠!! 제발 피노키오에게 가지 말라고 해줘요!”
매니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팬을 꼭 껴안았다. 부드럽지만 무겁게 말했다.
“아빠도 널 너무 사랑해. 하지만 제페토 아빠도 피노키오를 그만큼 사랑한단다.
우리가 계속 붙잡으면… 그분은 혼자서 얼마나 외로우실까?”
팬은 꺽꺽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나는… 피노키오가 슬퍼하는 것은 싫어… 하지만 내가 이렇게 슬픈 건 어떻게 해…”
피노키오는 마지막으로 팬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망울에 맺힌 눈물방울이 마치 작은 별처럼 반짝였다.
“팬, 나… 꼭 다시 올게. 정말이야. 약속할게. 그때는… 우리 같이 무대에도 서자.”
팬은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였다.
“…진짜야? 약속이야?”
“약속이야.”
피노키오는 뒤돌아 공연장 문을 열었다. 뒤에서 팬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앙!!”
피노키오는 발걸음을 떼는 데 세상의 모든 힘을 다 써야 했다.
마치 로봇 관절이 굳어버린 것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꾹 참고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팬, 나 꼭 다시 올게.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무대 뒤엔 조명이 꺼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엔 여전히 따뜻한 빛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