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건은 낡은 노트를 휙 집어 던졌다.
“마스크! 네가 읽어봐라! 요즘 눈이 침침해서 말이야.”
마스크가 노트를 받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침침은 무슨… 어제도 새벽까지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보던데?”
“야! 시끄러! 내가 좀 그렇다는데 왜 꼬치꼬치 따져?”
두건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글자만 보면 머리가 지끈거린단 말이다.”
마스크가 피식 웃었다.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혹시 글자를 모르는 거 아니야?”
“뭐, 뭐라고? 이놈이 어디서 헛소리를—!”
두건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소리쳤다.
사실… 마스크 말이 딱 맞았다.
두건은 글자를 읽을 줄 몰랐다.
두건에게 글자는 늘 귀찮은 짐짝이었다.
어릴 적엔 교과서보다 골목대장이 되는 게 더 짜릿했고,
공부 대신 슬리퍼 끌고 뛰어다니는 게 훨씬 재미있었다.
그러다 어른이 되자—
“에이, 인제 와서 뭘 배우냐.”
스스로 핑계를 대며 책을 멀리했다.
결국 두건은 그렇게 까막눈이 되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눈이 나빠졌다는 핑계로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마스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노트를 폈다.
그런데 첫 줄을 읽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제페토 박사 일기인데?”
두건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뭐 그게 어때서? 얼른 읽으라고, 이 멍청아!”
“근데 남의 일기를 맘대로 읽는 건 좀…”
“야! 남의 집 냉장고도 뒤지면서 그런 소리 하냐? 그냥 읽어!”
“알았어… 알았어. 자자—읽는다. 음…”
마스크는 목을 가다듬고 읽기 시작했다.
“버찌 영감한테 배구공만 한 금속 덩어리를 뺏어왔다.”
두건의 눈이 반짝였다.
“봐봐! 내가 그랬잖아. 인공지능은 그 버찌 영감탱이가 갖고 있었던 거라고!”
“근데… 뺏어온 거잖아. 빌려온 게 아니라.”
“그래서 뭐? 그게 그거지. 중요한 건 그 덩어리가 지금 박사 손에 있다는 거야! 계속 읽어!”
마스크는 다시 일기에 집중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문장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나는 이것을 무엇에 쓸까, 고민하며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때 너무 배가 고파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민은 그다음이었다.
그런데… 라면 냄새가 솔솔 풍기자, 이 금속 덩어리가 자기도 배고프다고 엉엉 울었다.”
두건이 당황했다.
“울었다고? 진짜?”
“일기엔 그렇게 돼 있어. 계속 읽을게.”
“말하는 금속 덩어리였다. 나는 이런 신기한 물건은 처음 보았다.
한참 생각하다가 나에게 가족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연구에 빠져 살다 보니 사람들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
겉모습도 우락부락하고 무뚝뚝해서, 사람들도 다가오지 않았다.
부모님은 오래전 돌아가셨고, 형제들과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가족이란 단어는… 나에게는 늘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마스크의 목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두건도 말을 잃고 조용히 박사를 바라봤다.
“나는 금속 덩어리로 나의 아들을 만들기로 했다.
나도 이제 가족이 생기는 것이다. 아들의 이름은 피노키오.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나는 금속 덩어리로 머리를 만들고, 가지고 있던 쇠로 팔, 다리, 몸통을 만들었다.
그런데… 큰 실수를 했다. 다리를 만들어 주기 전에 인성 교육을 먼저 했어야만 했다.
피노키오는 다리를 달자마자, 내 말을 듣지 않고 바로 밖으로 달아난 것이다.”
“푸핫!”
순간, 두건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아들이 도망간 거야? 이거 좀 웃긴데?”
“진짜 너무 감정에 몰입했어… 갑자기 튄다니까 당황스럽긴 하네.”
마스크도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엔 묘한 슬픔이 묻어났다.
이해됐다. 제페토 박사, 그 괴짜 영감이 왜 늘 무표정하게 실험에만 몰두했는지.
그는 혼자가 싫었던 거다. 피노키오라는 이름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을 만들고 싶었던 거다.
두건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인공지능으로 만든 머리가 피노키오의 두뇌라는 거네… 대체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마스크는 노트를 다시 펴들었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일기에 다 나오겠지. 계속 읽으면 실마리가 보일 거야.”
그는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읽어나갔다.
“나는 피노키오를 쫓아갔지만, 너무 빨라서 쉽게 잡을 수 없었다.
다행히 경찰이 피노키오를 잡아줬다.
나는 화가 나서 피노키오를 질질 끌고 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동학대라고 손가락질했다.”
마스크는 코웃음을 쳤지만,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나는 결코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경찰은 나를 감옥에 가뒀다.
차가운 감방에서 벌벌 떨며 밤을 보냈다.
그래도 내가 걱정한 건 오직 하나, 피노키오였다.
밥도 할 줄 모를 텐데, 얼마나 배가 고플까. 불쌍한 내 아들…”
두건이 옆에서 살짝 숨을 들이켰다. 뭔가 마음 한쪽이 찌릿했다.
“다음날 감옥에서 나와 집에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피노키오는 쫄쫄 굶고 있었고, 용광로 근처에 있었는지 다리가 다 녹아 있었다.”
마스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럼에도 계속 읽었다.
“나는 황급히 새 다리를 만들어 줬다.
그러자 피노키오는 조용히 다가와 내 뺨에 뽀뽀를 해줬다.
아… 이런 게 가족이구나.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사랑이 뭔지 알았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건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눈가를 훔치는 게 보였다.
“그런데… 피노키오가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기뻤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옷은 낡은 천으로 꿰매 만들고, 신발은 나무를 깎아 만들었지만,
책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마스크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고민 끝에 내 의족을 팔기로 했다.
니콜라 씨의 가게에 가서 그것을 넘기고, 그 돈으로 책을 사서 돌아왔다.
목발을 짚고 걷는 길은 참 힘들었지만…
피노키오가 책을 받아 들고 두 팔로 나를 꼭 안아줬다.”
그는 잠시 읽는 것을 멈췄다.
노트 위로 똑, 하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 아이가 말해줬다. ‘고마워요, 아빠.’
…나는 그 말 하나면 충분했다. 더는 바랄 게 없었다.”
마스크는 노트를 천천히 덮었다.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박사를 바라봤다.
“그래서… 책을 사주느라 의족을 팔았던 거였어?
네가 그렇게 다리 하나 없이 휘청거렸던 게… 진짜 그런 이유였어? 으아아앙…”
두건은 괜히 코를 훌쩍거리며 뒤돌아섰다.
“뭐야… 다 큰 어른이 왜 울어… 아니, 다리를 팔아서 책을 사는 사람이 어딨어… 미쳤냐고! 흑흑…”
박사는 아무 말 없이 그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은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콧잔등이 살짝 붉어진 걸 보면… 어쩌면 그도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가벼운 침묵이 방 안을 채우고 있을 때, 마스크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박사님… 혹시, 피노키오를 정말로 아들처럼 생각하셨어요?”
박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 표정엔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마치 피노키오가 활짝 웃으며 “아빠!” 하고 부르는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듯했다.
방 안은 순간, 아주 조용해졌다. 고요 속에서, 두건도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진짜 아들이었구나. 기계가 아니라, 가족…”
그때 마스크가 말했다.
“박사님, 우리는 피노키오를 해치려는 게 아니에요. 진짜예요. 도와주고 싶어요. 나름 진심이에요.”
박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아직 슬픔과 의심이 엉켜 있었지만, 아주 미세하게 희망이 번졌다.
“…도와주겠다고?”
두건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그럼요! 우리 진짜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냥… 약간 소란스럽고, 뭐랄까, 어설플 뿐이죠.”
박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데, 인공지능을 가져가겠다고 했잖아. 그게 어떻게 도움이 되는 거지?”
두건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인공지능만 살짝 떼어 가면…”
마스크가 맞장구쳤다.
“그러면 되겠네. 피노키오의 모양은 그대로 남는 거잖아.
도망가지도 않을 테고, 항상 옆에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 말에 박사의 얼굴이 굳더니, 이내 폭발했다.
“그게…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그럼, 피노키오의 껍데기만 남겨놓겠다는 거잖아!
이 못된 것들아! 나는 죽어도 피노키오가 어딨는지 말 안 해! 내 심장이 멎어도!!”
두건이 마스크를 툭 치며 말했다.
“됐어, 그냥 일기 더 읽어봐. 어차피 다 거기 쓰여있을 텐데 내가 뭐 하러 영감한테 사정하겠냐?”
마스크는 여전히 코를 훌쩍이며 일기를 들춰 읽기 시작했다.
“예쁜 옷을 입히고, 의족과 바꿔서 산 책을 가방에 넣어주었다.
피노키오는 활짝 웃으면서 나에게 입을 맞추고 학교로 갔다.
가면서도 ‘아빠, 사랑해요.’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그날 하루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날, 밤늦도록 피노키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밖으로 나가 마을 사람들에게 피노키오를 보았는지 물어봤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다리가 아파 오래 걸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밤새워 기다렸지만, 피노키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읽는 내내, 마스크의 코맹맹이 소리는 점점 커졌다.
“엉엉… 아! 어떻게야 할지…
신이시여.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저에게 벌을 내리시고,
제발 피노키오는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세요. 으앙…”
마스크는 읽으면서도 참지 못하고 계속 울음을 터뜨렸다.
두건은 헛기침하며, 눈물을 닦았다.
“에이, 일기를 왜 그렇게 슬프게 쓰는 거야?
어쨌든 피노키오는 학교에 간다고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지? 알았어.
우리가 직접 찾아보지.”
박사는 간절한 목소리로 붙잡았다.
“제발… 피노키오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줘! 달라는 건 뭐든 다 줄게.”
두건은 마스크의 뒤통수를 툭 쳤다.
“마스크 가자. 다른 놈이 채가기 전에 빨리 피노키오를 잡자.”
“엉엉… 그래. 빨리 피노키오를 찾자!”
둘은 그렇게 울다 웃으며 뛰쳐나갔다.
방 안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박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한쪽 다리는 휘청이고, 손끝은 바들바들 떨렸지만…
그 모든 걸 이기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섰다.
빨리 일어나서 두건과 마스크가 피노키오를 해코지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장화를 신고, 두터운 외투를 껴입고, 털모자까지 눌러 썼다.
작은 보따리에 빵 한 덩어리를 챙겼다.
목발을 짚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여는 순간, 싸늘한 바람이 그의 코끝을 스쳤다.
그럼에도 박사는 오직 피노키오를 위해서 절룩절룩 걸었다.
한편, 피노키오는 코인 10개를 손에 꼭 쥔 채,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입꼬리는 귀에 걸렸고,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볍기만 했다.
길가에서 도토리를 주워 먹던 다람쥐 한 마리가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더니 말했다.
“얘야~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니? 왜 그렇게 싱글벙글이야?”
피노키오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코인을 흔들며 말했다.
“응! 나 열심히 일해서 코인 10개를 벌었어!
아빠한테 드리면 엄청나게 좋아하실 거야. 내가 처음 번 돈이거든!”
다람쥐는 감동한 듯 도토리를 끌어안았다.
“우와~ 진짜 기특하다! 근데 이 길은 조심해야 해. 이상한 도둑들이 돌아다닌다더라.”
그런데 마침 그곳을 두건과 마스크가 지나고 있었다.
주머니는 텅 비었고, 뱃속에서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진 지 오래였다.
오죽하면 눈물마저 메말라 버릴 지경이었다.
마스크가 허리를 굽히고 기어가듯 걸으며 말했다.
“배고파… 기운 없어… 눈앞에 도넛이 날아다녀…”
그때 저 멀리서 ‘코인 10개’라는 달콤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두건의 귀가 쫑긋 섰고, 마스크의 콧구멍이 살짝 흔들렸다.
“지금… 코인 소리 아니야?”
“코인… 10개… 라고 하지 않았냐…?”
“코인! 열 개! 완전 열 개!!”
두건과 마스크는 좀비처럼 비척거리던 몸에 갑자기 부스터를 단 듯,
소리가 나는 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