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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도 Oct 30. 2023

퇴근길

8월 어느 날 군중 속 고요

  사실 그냥 배가 부르길래, 때마침 비가 그쳤길래 공원에 왔을 뿐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으며 저 멀리 이미 져버린 노을의 흔적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저 그날따라 유독 뭔지 모를 여유를 흠뻑 느끼던 참이었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에어팟을 귀에 꽂으려다 보니 문득 주변이 고요하다 느껴진다. 달리는 사람들의 신발소리, 부딪히는 옷의 비닐소리,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 저 멀리 고요히 들리는 음악 소리, 구구궁 우는 비행기 소리, 잔디에서 나무에서 각기 다르게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내 두 귀를 감싼다.


  귀에 꼽힌 에어팟을 뽑아 가방에 집어넣고 다시 정면을 보며 걷는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요즘 나 아무래도 행복한 것 같다. 무언가 안정이 되었다 싶다. 세상이 주는 자극들이 고통스럽지 않고 견딜만하다. 약간은 차가워진 공기가 또 앞으로를 살아갈 기대를 심어준다. 


  잘 살고 있나 보다. 스스로를 격려한다. 떠나간 강아지 생각도 하며 감사의 마음도 전해본다. 이별은 슬프지만 어쩌면 나에게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바라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이, 그리워할 대상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눈앞에 노부부가 팔을 연신 앞뒤로 흔들며 씩씩하게 걸어간다. 서로를 향한 손을 꽉 붙든 채. 또 바로 옆에 할아버지의 팔뚝을 잡고 기대어 걷는 할머니가 보인다. 신발을 고쳐 신는 동안 잠시 서로를 기다려주며. 그 옆엔 젊은 남성이 비인지 땀인지 이미 흠뻑 젖어 몸에 옷이 바짝 달라붙은 채 헉헉 숨을 내쉬며 달린다. 그리고 그 옆을 배부른 내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유유자적하며 걸어 나간다.


  그래 어쩌면 이대로도 괜찮을지도 몰라. 충분히 괴로웠으니까 이젠 좀 초연해질 때가 됐는지도 몰라. 날 불안으로 이끄는 생각들을 멈춰본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하나하나 세며, 날아가는 새들의 하얀 배를 눈으로 좇으며, 옆을 스쳐 달려 갸는 사람들의 섬유유연제 향을 맡으며, 하나하나 제각기 다른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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