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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수 Aug 19. 2020

거문오름에서 노닐기

탐라의 수난사

이 글은 원래 거문오름의 일본군 동굴진지를 소개하기 위해 쓰려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붙이고 붙이게 되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 버렸다. 그래서 아예 탐라의 수난사라 고쳐 쓰고 있다.


제주는 예부터 탐라(耽羅), 도이(島夷), 영주(瀛洲),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탁라(乇羅)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워 왔다. 이 중 가장 대표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은 탐라이다.


조선 후기 역사가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의 해동역사(海東歷史)에 의하면 ‘탐라’는 섬을 의미하는 ‘耽’과 나라를 의미하는 ‘羅’가 합쳐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탐라는 ‘섬나라’란 뜻이 된다. 최근에는 도올(檮杌) 김용옥(金容沃)도 같은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고대 탐라는 독립해상국가였다. 탐라인들은 겨울철에는 시베리아에서 부는 북서계절풍과 여름에는 남동계절풍을 이용하여 일본, 중국은 물론 동남아까지 무역을 했다. 어찌 된 일인지 이 좁은 탐라의 세력이 그 당시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던 같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본다면 신라의 황룡사 9층탑을 쌓은 내력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황룡사 9층탑은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慈藏)의 요청으로 건조되었다 한다. 그런데 이 사찰을 건조한 이유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탑의 각 층은 이웃 나라가 침범하는 재앙을 진압하기 위한 염원을 담은 것이라고 하는데 1층은 왜(倭),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백제),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契丹), 8층은 여진(女眞), 9층은 예맥(濊貊: 고구려)을 말한다고 한다.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다고 치고, 백제나 고구려 보다 탐라를 4번 째 주적으로 선정한 것이 이해가 잘 안 된다. 삼국시대의 탐라 인구 수가 많아야 대략 7,000명 정도라면 기껏 해 봐야 전투가용인원은 1,000명을 넘기 힘들 것이다. 고작 이 정도의 국력으로 어떻게 신라의 4번 째 주적이 될 수 있었을까?

탐라가 남방 해상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 만약 남방 해상 세력이 한반도를 위협하려면 그들에게는 탐라가 가장 최적지가 될 것이다. 더욱이 탐라가 백제와 우호적인 관계라면 백제와 라이벌 관계인 신라로서는 아주 성가신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탐라국은 백제 위덕왕 이래로 백제에 신속되어 있다가 문무왕 2년(662)에 내항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기록도 위의 내용을 뒷받침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첫 번째 수난>: 신라의 침공


탐라의 내가 발견한 첫 번째 수난은 신라의 침공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 19년(679) 2월에 사신을 보내어 탐라국을 경략하였다. 서기 660년 7월 백제는 끝내 나당연합군에 패망하고 만다. 그리고 뒤이어 4년간 소위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활발했던 이 부흥운동 역시 663년 8월, 전쟁의 마지막 대전이었던 백강전투에서 왜의 구원군(왜군 27,000명 / 왜 함선 400여 척)이 나당연합군에게 궤멸당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조’에 “5년(665) 가을 8월 유인궤(劉仁軌)는 우리(新羅) 사신과 백제· 탐라· 왜인 네 나라 사신을 이끌고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돌아가 태산(중국 산동성)에서 회사(會祠)하였다.”라는 기록과, 중국의 사서인《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유인궤전>에 “인덕 2년(665) 탐라국의 사자가 당나라 수군장 유인궤에게 항복했다. 유인궤가 신라·백제·탐라·왜의 추장을 거느리고 모임에 참가했다.”는 기록, 당회요(堂會要)에 실려 전한다.     

 

백강 전투도

그렇다면 신라가 탐라를 침공한 이유가 백제부흥운동에 참가한 데 대한 분풀이는 아니었을까?     


그런데 신라군이 탐라를 공격할 때 탐라의 총사령관은 부여계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저항군을 이끌고 싸움을 벌이다 장렬하게 전사를 하고 말았다.

나는 이 부여계란 이름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백제 부흥군을 이끈 사람이 부여풍, 부여충승이다.

백제 부흥군의 부여풍, 부여충승, 그리고 탐라의 저항군 사령관 부여계(夫麗季)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을까?

어떤 학자는 탐라의 고, 양, 부를 고구려계, 양맥계, 부여계를 말한다고 했다.

탐라의 고, 양, 부는 삼성혈에서 나온 형제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 온 고구려계, 양맥계, 부여계란 말이다. 

그렇다면 부여계는 ‘부 여계’가 아니라 ‘부여 계’를 말함이 아닐까? 특히 ‘季’는 ‘계절’이란 뜻도 있지만 ‘막내’라는 뜻도 있다. 봄 석달을 말할 때 음력으로 1월을 맹춘(孟春), 2월은 중춘(仲春), 3월을 계춘(季春)이라고 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 ‘夫麗季’는 단순히 한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부여계의 막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왜 하필이면 저항군의 사령관이 고씨나 양씨가 아니라 부씨였을까 하는 점이다. 이와 함께 고량부 삼성의 직위명도 흥미롭다.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耽羅志≫에 ‘신라 때 고후(高厚), 고청(高淸), 고계(高季) 삼형제가 바다를 건너와서 조공하니 왕이 기뻐해 작호를 주었는데, 고후에게는 성주(星主), 고청에게는 왕자(王子), 고계에게는 도내(都內)라 하고 국호를 주어 탐라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왕자는 양씨에게, 도내는 부씨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참 평화롭고 사이좋게.     

그러나 이 기록은 1653년에 간행된 제주목사 문신 이원진의 기록이다. 거의 천년 전의 일을 기록한 것이어서 과연 믿어야 할 지 의문이다. 이와는 다른 기록도 존재하나 역시 신빙성에는 의문이 간다.

탐라에 대한 기록은 1434년(세종 16)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그 당시 목사가 그 유명한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다.  그 이후는 제주에서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고, 유람객이나 제주목사가 조선 중기 이후에 쓴 기록과 중앙정부의 기록이 전부이다. 그러다 1918년 제주인 김석익의 민족의 얼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탐라기년이라는 책을 지었는데 고려태조 21년(서기 938년)부터 광무 10년(1906년)까지의 편년체 기록이다. 그는 사기, 후한서, 삼국사기. 고려사, 일본서기 등의 기록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그 이전 기록은 당연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니 이제까지의 탐라에 대한 기록은 거의 다 한반도 중앙정부나 관리, 아니면 일본, 중국 등 기록으로 탐라인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이전의 역사는 도무지 아리송할 따름이다.

성주는 뭐하는 직이며, 왕자는? 도내는 또 뭐라는 직인지?

이에 대해 신라 관직을 아무리 검색해 보았지만 알 길이 없었다. 그냥 나 대로 추측해 볼 수밖에.


성주는 城主가 아니라 星主이다. 탐라는 해상무역국가로서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항로 지표로 별자리를 이용하였고 당연히 북두칠성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다. 칠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을 쌓은 것이 칠성단인데 현재 속칭 칠성통이라 불리는 곳에 칠성단이 있었다. 탐라지 등에 조선조 칠성단에서 제를 지냈는데 칠성은 하늘의 북두칠성이고 제의고 천제란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성주란 하늘(북두칠성)에게 제사를 관장하는 제사장의 직위일까?

1900년초 연농 홍종시가 제작한 제주고적도 지도에 칠성대가 있던 위치를 표시한 모습. 빨간 점선 원안이 칠성대

그렇다면 왕자는 행정? 도내는 치안?

그래서 부씨가 저항군 사령관?


이후 탐라에서는 부씨가 사라졌다. 그리고 탐라 인구가 격감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부씨 족보를 보면 부씨(夫氏)는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조선(朝鮮) 초에 진용부위(進勇副尉)로 별장(別將)을 지낸 부언경(夫彦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한다. 아마 이 사건이 있은 후 부씨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이다. 이 이상은 나의 역량으론 안 된다.        

           

< 두 번째 수난>: 삼별초의 난


탐라의 두 번째 수난은 고려시대 중기 삼별초 난이라고 본다.

삼별초의 난은 너무나 유명해서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삼별초의 난 때 탐라지역사회가 분열되었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중앙의 정치 지형이 변하면 지역은 그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올 즈음 제주 양씨는 삼별초의 편에 들었다.

그러다 삼별초가 완전히 탐라를 지배하게 되면서 그 댓가로 양씨가 성주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양씨에게 성주 자리를 넘겨 준 고씨는 육지 이주민인 문씨와 혼인을 하고 세력을 키우던 중,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에게 패하자 다시 성주 자리를 되 찾음과 동시에 양씨가 세습하던 왕자 자리까지 빼앗아 문씨에게 넘어주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을까?    

 


< 세 번째 수난>: 목호의 난


세 번째 수난은 고려말이다. 제주에서 삼별초 세력을 몰아낸 원나라는 제주가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아봤다. 그래서 제주에 군마목장을 설치했는데 이 목장이 원나라가 세계를 경영하기 위해 세운 14개의 국영 목장 중 14번 째 목장이다. 그리고 한라산의 울창한 숲에서 목재를 벌채하여 군선을 건조하였다. 탐라는 남송과 일본을 경영할 전초기지가 된 것이다.


그러다 원나라가 망하자 명나라가 탐라목장에 말 2,000필을 조공하라고 명했다.

이에 탐라에 주둔하고 있던 원나라 관리(목호)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목호의 난’이다.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 조정에서는 최영이 1374년 8월, 314척의 고려 전함에 2만5,600명의 고려군을 이끌고 왔다. 이 함대가 비양도를 거쳐 명월포구로 상륙을 하자 몽고 기병대 3,000명이 기습을 하여 모든 군사들이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이에 최영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군사들의 목을 직접 치면서 독려하여 새별오름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지막 잔당은 서귀포 범섬까지 쫓아가 섬멸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당시 탐라의 인구는 약 30,000명에 불과했다. 출정한 고려 군사가 무려 탐라 전체 인구에 맞먹는 대군이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아마 고려 조정은 탐라주민들 전체를 목호들과 같은 편이라고 판단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과정에서 탐라인은 절반 가량이 학살을 당했으니 오히려 4·3사건 보다도 더 한 수난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당시 광경은 제주목사는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메웠고 간과 뇌수로 땅을 발랐다. 말하자면 목이 다 메는구나.’


그래서일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마지막 성주인 고봉례(高鳳禮)가 성주와 왕자의 명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하여 줄 것을 청하며 인부(印符)를 조선 조정에 반납하고 말았다.      



< 네 번째 수난>: 소덕유, 길운절의 황당한 해프닝


조선에 들어오면서 다시 한 번 피바람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황당한 해프닝이 있었다.

선조 34년(1601) 소덕유‧길운절이 제주에서 병사를 일으켜 목사, 판관 및 서울에서 온 관원들을 모두 죽이고 군량과 군기를 점령하여 바다를 건너 곧바로 서울을 범하고자 했다.


소덕유는 정여립의 처와 4촌간으로 정여립의 역모(선조 22년,1580)에 가담했다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중이 되었는데 길운절과의 만나 난세를 만나 재주를 펼 수 없음을 한탄하며 지난 날 정여립의 역모가 사전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함은 장소가 각처로 통하는 넓은 지역이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멀리 떨어진 탐라를 거사 거점으로 삼기 위해 길운절은 말을 산다고 핑계하고 청포(靑布)를 주어 소덕유로 하여금 탐라에 가도록 하였다. 탐라에 온 소덕유는 풍수와 화격(畵格) 등으로 삼읍의 토호집을 드나들면서 동정을 살피면서 납마첨지 문충기(文忠基), 훈도 홍경원(洪敬源), 교생 김정걸(金挺傑)‧김대정(金大鼎)‧김종(金鍾)‧이지(李智) 등을 포섭하였다.


그런데 기생 구생(具生)이 음모를 엿듣고 길운절을 추궁하며 고발하겠다고 하자 역모의 주모자 격인 길운절은 성공한 후에도 제주의 병권은 문충기에게 돌아갈 것이고 보면 목숨 보전도 두려운 상태라 고변(告變)하기로 결심하였다.     


 고변서를 접한 성윤문 목사는 주동자 18인을 모두 체포하고 이들과 내통하고 있는 해남인 강유정‧영암인 한희수 등을 체포하도록 요청하였다. 이들은 모두 서울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는데 소덕유‧문충기‧홍경원‧김대정‧이지‧김종‧강유정 등은 능지처참 당하였고, 길운절과 그의 조카 최구익은 고변한 공은 인정되나 계획적인 거사였던 점을 감안 단지 연좌적몰의 법만 면제된 채 참수를 당하였다.  

   

  이 때 조정에서는 제주를 역향(逆鄕)이라 하여 강등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한다. 그러나 영의정 이항복의 반대로 제주는 강호하는 일을 면하였다. 또한, 조정에서는 성균관 전적 김상헌을 안무어사로 파견하여 역모사건의 뒷처리와 민심을 위무하도록 하였다. 김상헌은 도내 민심을 회복하고자 역모에 관련되어 체포된 영암인 한희수 등 7인을 모두 무혐의로 석방하고 제주인 고봉의(高鳳儀) 부자와 고령금(高令金), 진응련(秦應連) 등은 무고에 의한 것으로 분간하여 역모사건을 결말 지었다. 하마터면 또 한번 지울 수 없는 피비린내가 날뻔한 황당하고 아찔한 사건이었다. 그만큼 조선의 허약함을 드러난 사건인데 얼마 안 있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전국이 쑥대밭이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청음 김상헌은 이 곳 제주에서 어사로 복명하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일기 「남사록」을 남겼는데 당시 제주도의 사정을 아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 <남사록>이란 제명이 무척 유감스럽다.  남사(南槎)란 말 그대로 해석하면 '남쪽의 뗏목'이라는 뜻이다. 왜 탐라를 '남사'라 한 것일까. 남사란 중국의 중앙정부에서 양자강 남쪽 오, 월나라를 야만국가라 하시하여 부르던 이름이다. 즉, '남쪽에서 뗏목이나 타고 다니는 야만인'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그 당시 중앙의 지식인들이 탐라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그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다섯 번 째 수난>: 일제 강점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려 한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우리나라 어느 곳인들 성한 곳이 있으랴마는 제주는 더욱 더 그랬다. 미군이 제주를 거쳐 일본 본토로 상륙할 것으로 본 일제는 제주도 전역을 요새화하였다. 지금 바닷가와 중산간 오름에 남아 있는 군사시설이 다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은 1차 방어진지를 해안가에 마련하였다. 대표적으로는 송악산, 고산 수월봉, 함덕 서우봉, 성산일출봉, 서귀포 삼매봉 바닷가에 동굴진지가 남아 있고, 오름에서는 섯알오름, 송악산, 가마오름, 별도봉, 사라봉, 어승생 오름 등 거의 모든 오름에 동굴진지가 남아있다.

섯알오름이 고사포 진지


이런 동굴진지는 제주전역에 700여 군데나 있다. 전도의 모든 오름을 군사시설로 다 파괴하고 만 셈이다. 이를 위해서 당시 동원된 제주도민은 4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대략 한 호수에 한 사람 정도의 강제 동원이 된 셈이다. 증언들에 의하면 이때 동원된 사람들은 점심도 제공되지 않아 제각각 도시락을 갖고 오거나 굶거나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공사 과정에서 다쳐도 치료도 없을 뿐 더러 오히려 가족 중에서 대리작업을 나오도록 하여, 노인이나 어린이들까지 동원되는 사례가 있다고 한다.

성산일출봉의 동굴진지

그러나 정작 핵심지역은 기밀유지를 위해 육지부에서 차출해 온 광부들을 투입하고, 작업이 끝나면 다시 육지로 이송했다고 하는데, 그 광부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침몰한 일도 있어, 혹 고의성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도 간다.     


거문오름에는 갱도진지가 10군데나 있고 그들의 주둔지도 남아 있다. 그리고 군수 물자를 운반했던 병참도로도 남아 있다. 그들은 거문오름에만 6천명(108혼성여단)을 주둔시켰다.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갱도진지는 1코스 정상 가는 코스로 243계단이 있는 데 중간 지점 왼쪽에 있다. 지금은 위험해서 줄이 처 있고, 위험표지판이 있다. 길이는 60m, 내부 폭은 90cm, 높이는 180cm 정도로 완전군장한 병사 1명이 뛰어 다닐 수 있을 만큼의 규모라 한다.

등반로 오른 쪽에는 갱도가 일부 무너진 흔적도 보인다.   

  

제1전망대 오르는 계단 중간 왼쪽에 보이는 일본군 갱도

두 번째는 제1 전망대 가기 전 바로 오른쪽에 있다. 여름에 가보면 숲이 우거져 잘 안 보일 수가 있다. 이 갱도로 나와 제1전망대에 이르면 시야가 탁 트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이 된다.     

제1전망대 가기 전 오른쪽에 보이는 일본군 갱도 입구

이 두 군데는 겨울철이 되면 하얀 수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기도 한다.     


그 다음은 분화구로 들어 가 중앙 부분의 알오름을 지나가면 또 하나가 있다. 이 갱도는 조금은 규모가 작다. 그러나 가까이서 볼 수 있어 갱도진지를 자세히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분화구 안 알오름 바로 지나 보이는 일본군 갱도진지


그 다음은 일본군 주둔지에도 4개의 갱도가 있는데 여름에는 숲으로 가려져 네 번째 것만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일본군들이 통행로를 만들기 위해 곶자왈의 돌을 캐 내 축대를 쌓아 올린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갱도 앞에는 직사화기를 피하고 초병을 세워두기 위한 참호 같은 석축시설도 볼 수 있다.     


또한 이 곳에 물자를 나르던 병참도로가 현재 탐방로로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 동굴진지들은 4·3 사건 때는 지역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되기도 하였다고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2룡 봉우리에 있는 동굴진지


<여섯 번째 수난>: 4·3 사건


 제주 4·3 사건은 이미 잘 알려질 대로 알려져서 여기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948년에 시작하여 내가 태어난 1954년까지 무고한 도민 25,000명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나는 이 과정에서 유혈충돌과 도민피해를 줄이려고 노력한 사람 셋을 소개하려 한다.

두 사람은 그 당시 9연대장을 지낸 김익렬 중령과 무장군 총사령관 김달삼이다.

김익렬 연대장은 경북 안동 출신이다. 그는 겨우 27살에 중령이 되어 제주9연대장으로 부임을 했다. 고은이 쓴 만인보에서 김익렬 연대장에 대해 이렇게 썼다.     

김익렬 제9연대장: 군인의 포스가 느껴진다.


김달삼 무장군 1대 사령관: 그 당시 23세의 약관의 중등교사였으며 나중에 월북하여 인민유격대 태백산 지구 김달삼부대(제3군단)를 이끌었던 논란거리의 인물이다.

제주도 국방경비대 제9연대는 귀양살이 연대였다.


아무도 오지 않으려는 곳

제주도

이곳에 김익렬이 왔다   

  

일본군 소위 경력

제주도에서

그의 야전생활이 시작되었다     


육지에서 건너온 경찰

청년단

군인

세 힘이 제주도를 밟았다     


민심은 산으로 향했다

경찰 발포로

민심이 일어났다   

  

제주도 지사도

제주도 경찰서장도

제주도 유지도

산과의 협상을 방기했다    

 

김익렬 연대장이 나섰다

어머니와 아내

두살 난 아들을 볼모로 제안했다     

그는 유서를 써두었다


어머니와 아내에게

어린 아이에게

그리고 총사령관에게 썼다     


연대장은 장병들에게 말했다

오후 5시까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전투행동에 돌입하라

부연대장 지휘를 받으라     

그는 약속지점으로 갔다


산의 지도자 김달삼은 '백두산'을 피웠다

연대장은 '러키스트라이크'를 피웠다


두 사람은

전투 중지에 합의했다     

선 선무

후 토벌의 원칙에 따랐다  

   

그가 돌아왔다

제주도의 평화를 안고 왔다    

 

그러나 제주도에 건너온

군정청 조병옥 부장은

그를 빨갱이와 내통한 빨갱이 새끼라고 대들었다   

  

조병옥의 멱살을 잡았다

난투극

민정장관 안재홍과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이 말렸다

딘 소장은 구경하고 있었다     


다음날 김익렬 연대장은 딘에 의해 해임되었다     


제주도의 평화가 여기서 깨졌다

제주도의 학살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또 한 분은 문형순이라는 경찰관이다.

위키백과에는 이 분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경찰 재직시의 문형순 경찰관

그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만주 등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삼일운동 후 만주 한인사회 준 자치정부인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이었으며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이었다.

 한국의용군을 시작으로 임시정부 광복군 등에 소속돼 독립운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하여 1947년 7월 제주도에 부임하였다. 

1948년 12월 군경은 대정읍 하모리 좌익총책을 검거해 관련자 백여 명의 명단을 압수하여 이들은 처형될 위기에 놓였으나 모슬포 경찰서장이던 문형순은 자수를 권유하였다.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의 설득에 따라 관련자들이 자수하자 이들을 전원 훈방하였다. 

그가 1949년 성산포 경찰서장이 된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예비검속된 주민들에 대한 군 당국의 학살 명령을 1950년 군 당국의 예비검속자 총살명령에 대해 “부당하므로 불이행”한다며 단호히 거부하여 성산면 지역의 200여 명의 예비검속자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당시 성산포경찰서 관할지역의 백조일손사건의 예비검속으로 희생당한 사람은 겨우 모두 6명이었다. 이는 문형순 서장이 불가피하게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으며, 읍면별로 수백 명씩 죽음을 당했던 다른 지역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성산면 지역은 거의 온전할 수 있었다.     

그는 1953년 9월 15일 경찰을 퇴직하고 무근성에서 경찰에게 쌀을 나눠주던 쌀 배급소에서 일을 했다. 그 후 대한극장(현대극장의 전신)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다가 1966년 6월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향년 70세로 후손없이 홀로 생을 마감했다.

1949년 모슬포경찰서장으로 근무하면서 좌익혐의를 받던 주민 100여명을 자수시켜 훈방했고, 함으로써 200여명 주민의 목숨을 구했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이 분을 ‘제주 4.3의 쉰들러’라고 부른다.

[출처] 경찰영웅 제2호 고 문형순 모슬포경찰서장|작성자 행정사 채수창    

           

붉은 색 원 안에  '부당하므로 불이행'이라는 문형순 서장의 친필이 적혀 있다.

나의 중학교 때 절친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마도로스의 꿈을 품었다. 그래서 부산에 있는 해양대학을 다녔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원조사에 걸린 것이다. 자기도 몰랐던 사실이라고 한다. 그의 피붙이 중에 4·3 사건 연루자가 있었던 것이다. 집에서 쉬쉬하며 숨기던 사실이 신원조사서에서 드러난 것이다. 결국 그는 마도로스가 되지 못했다.


이런 사례는 제주 전 지역에 비일비재하다. 4·3사건으로 가족이 희생된 것만도 억울한데 나머지 가족들은 연좌제에 걸려 진학도, 취직도, 해외 여행도 맘대로 할 수 없었던 야만의 시대를 거쳐 왔다.     

 

제주의 수난은 어디 이뿐일까?

 탐라는 전국에서 가장 민란이 많이 일어난 곳이라고 한다. 내가 아는 것 만으로도 1862년 강제검, 김흥채 등이 주동한 임술(壬戌) 농민 봉기, 1890년에 김지가 주동한 경인(庚寅) 민란, 1896년에는 강유석과 송계홍 등이 주동한 병신(丙申) 민란, 1898년에는 방성칠이 주동한 무술(戊戌) 민란, 1901년에는 이재수의 난(신축 천주교란) 등이 그치지 않았다.

 

지금은 제주를 평화의 섬이라고 부른다. 동의는 하나 흔쾌하진 못하다. 평화의 섬이란 앞으로의 과제를 말함이지 결코 과거의 기억은 될 수 없다. 그래서 흔쾌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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