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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수 Sep 02. 2020

거문오름에서 노닐기

'담뱃대 더부살이'를 아시나요.

한 20년은 족히 지났나?

내가 비양분교에 근무할 때였다.


문득 잊고 지냈던 한 후배가 전화가 왔다.

“오늘 안 나강 그냥 있을거꽝?(오늘 안 나가고 그냥 있을 겁니까?)”

“오~! 무사?(그래, 왜?)”

“비양도 한 번 가 보젠 마씀(비양도 한 번 가보려구요)”


이상하다. 이 후배가 아직도 비양도에 안 와 봤을 리가 없는데.     

그는 아주 간편한 차림으로 도항선에서 내렸다.

큰 카메라 하나, 그리고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왠 일이고?”

“아니, 사진 하나 찍을 꺼 이선 마씀(사진 하나 찍을 거 있어서요)”

“뭔 사진이데?”

“야고란 거 있수다”

야고?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그게 뭔데?”

“예, 억새 뿌리에 기생하는 꽃인데 지금 피어마씀”

“그거 찍으러 여기까지?”

“과학전람회 작품으로 제주도 야고 분포도 만들젠 마씀”

후배는 말끝마다 ‘마씀 마씀’했다.

그의 말습관이었다.


원래 과학에 조예가 깊은 후배였다.

특히 글라이더와 고무동력기 대회 지도에는 누구보다고 탁월했다.

내가 필요할 때 조언을 구하면 그는 항상 자기일처럼 나를 도와줬다.

그 탓에 나도 몇 번 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올린 일이 있었다.     

“어디 있는데? 같이 가보자”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어디 있는지는 찾아 봐야 해 마씀. 오지 맙써. 길 없는 데로 막 댕겨야 헙니다”

듣고 보니 갈 생각이 없어졌다.

“그럼 다녀 와, 와서 들러, 생선 안주 마련해 둘게”

그러나 그는 차를 운전해야 한다며 그것까지도 거절을 했다.    

 

그는 한 두어 시간쯤 되어 학교로 찾아 왔다.

그리고는 디지털 카메라에 찍힌 야고 사진을 내게 보여줬다.

처음 보는 야고는 매우 신비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보라색 색깔이 가을 하늘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꽃 모양도, 이름도 잊은 채 한참이 지났다.     

그런데 어느 날 별도봉 산책을 하고 돌아오던 중 보라색 야고를 발견했다.

별도봉 서쪽 내려오는 길 오른 쪽에 두어 송이 피어 있었다.

‘이게 뭐더라? 이름이 두 글자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이 떠 오르지 않았다.     


또 그렇게 잊고 지냈다.

세 번째 본것은 거문오름이었다.

거문오름 탐방을 마치고 돌아 오다 ‘에어 건’ 설치된 곳 오기 전 왼쪽 억새 틈에서 보았다.

사진을 찍고 안내소에 들어 와 동료 해설사님께 사진을 보여 드렸다.

“아~! 이거? 야고예요! 이것도 몰람쑤광?(이것도 모르세요?)”

아! 야고! 그렇지! 야고였지!     


이후 8월이 중간 지나면 난 억새가 자라는 곳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탐방로 끝에서는 더 이상 야고가 피지 않더니 몇 해 전부턴 입구에서 피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쉽게 야고를 볼 수 있었다.     

꽃대가 올라 올 때의 모습

야고는 순우리말 이름이 아니다.

한자말이다. 한자로는 野菰라고 쓴다. 菰를 옥편에서 찾아 보니 ‘줄 고’ 또는 ‘줄풀 고’라고 되어 있었다.

‘줄’이라고만 되어 있었다면 또 헷갈릴 텐데, ‘줄풀’이라고도 되어 있어 쉽게 이해가 되었다.

‘줄풀’은 물가에 자라는 벼처럼 생긴 식물이다.

‘줄풀’의 열매는 ‘고미(菰米)’라 하며 ‘야생 쌀(wild rice)’로서 식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野菰란 ‘들에 자라는 줄풀’이란 뜻이다.

그런데 野菰가 어디 ‘줄풀’과 비슷한가?

전혀 닮은 데가 없다.

여기서 野菰란 아마 ‘억새’를 가르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야고는 주로 억새뿌리에 기생하기 때문이다.  

   

한자 말이 아닌 순 우리말 이름도 있다.

‘담뱃대더부살이’가 그것이다.

꽃 모양이 ‘담뱃대’와 비슷하고 억새 뿌리에 더부살이(기생)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래서 꽃말도 '더부살이'란다.

참 정겨운 우리말 이름이다.

우리 선조들의 상상력과 해학이 돋보인다.

그래서 나도 이제부턴 ‘야고’란 한자 말 이름 대신, 순 우리말 이름인 ‘담뱃대더부살이’라고

불러야 겠다.     


그런데 억새 뿌리에서 더부살이하는 꽃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황당한 일이 생겼다.

‘오름 매니저’하는 한 분이 ‘담뱃대더부살이’ 꽃 사진을 밴드에 올렸는데 억새군락지가 아닌 엉뚱한 곳에 피어 있는 것이다.

억새 밭이 아닌 곳에서도 피어 있다.


그 분도 이상한 모양인지, 이게 ‘야고’ 맞느냐고 했다.

보신 분들이 다 ‘야고 맞다’고, ‘참 이상하다!’고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또 다른 이름도 있었다.


‘사탕수수겨우살이’란 이름도 갖고 있었다.

억새뿐만 아니라 ‘양하’나 ‘사탕무 뿌리’에서도 기생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이름들이 붙은 것 같다.          

     

또한 뱀에 물렸을 때도 사용한다고 하여 ‘사전초(蛇箭草)’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箭’은 ‘화살’을 뜻하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또 다른 한자 이름은  백모화(白茅花)이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하얀 띠꽃’이다. 아마도 ‘억새’를 중국에서는 ‘백모화’라고 부르는 것 같다. 억새와 띠는 서로 비슷하고 억새꽃이 하얗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일까?     

손으로 쳐들어 고정시킨 다음 찍은 꽃 술

이 식물은 체내에 엽록소가 없다. 녹색 잎이 없으니 억새, 양하, 사탕무 뿌리에 더부살이 할 수 밖에. 줄기는 매우 짧아 거의 땅 위로 나오지 않는다. 털이 없고 몇 개의 잎이 있다. 

꽃은 8∼9월에 붉은빛이 강한 연한 자주색으로 피고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몇 개의 꽃자루 끝에 옆을 향하여 1개씩 달린다. 


관상용·약용으로 이용된다고 한다. 외상에는 짓이겨 붙이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외에도 혈증과 부인병증을 다스린다고 하고 골수염, 종독, 창종, 해수, 해열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항암효과가 있는 걸로 밝혀지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체에 해로운 독이 있으니 함부로 쓸 약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만 분포하였다.

그래서 의기양양하게 자랑을 했다.

“여러분! 오늘 오셔서 이 꽃 본 것만 해도 본전은 하신 거예요!”

그랬더니 곧 한 분이 반박을 해 오셨다.

“서울에도 있어요!”

그럴 리가?


자세히 여쭈어 보았더니 ‘난지도 하늘공원’에 있단다.

나중에 돌아와서 동료 해설사님께 여쭈어 보니, 난지도 하늘공원 조성할 때 제주 억새를 파다 심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억새 뿌리에 ‘담뱃대더부살이’ 균이 묻어 간 것이구나!     


집에 와서 검색을 해 보니 얼씨구나! 가정에서도 재배한 사진이 많이 올라 와 있었다.

이 꽃을 보기 위해 제주 억새를 사다가 화분에 키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젠 ‘제주에서만 나는 꽃’이라고 말하면 안 되겠다.

대신 ‘우리나라에선 제주에서만 나던 꽃’이라고 바꿔 말해야겠다. 

    

제주 출신 시인 변종태(1963~)는 이 꽃을 이렇게 노래했다.  

   

난지도의 새 이름 하늘공원에

만발한 억새풀 사이 걷다 듣는다.

귀에 익은 종소리, 물 건너 제주에서 듣던 그 종소리,

바람 불 때마다 딱 한 번만 들려주는 소리,

무자년 분홍 종소리 예서 듣는다

부끄럼에 상기한 볼, 아니란다.

억새 뿌리에 몸을 감춘 채

살아야, 살아남아야 했던 이유 있었단다.

잎사귀 같은 서방 산으로 가 소식 끊기고

돌배기 딸년의 울음소리 데리고 찾아 나선 길,

어디서 시커먼 그림자 서넛이

휘릭 바람을 타고 지나칠 때

아이의 울음 그러막으며 억새밭에 납작하게 엎드린 목숨,

이제나 저제나 수군거리는 소리 잦아들까.

틀어막은 입에서 새던 가느다란 숨소리마저 잦아들고

붉게 상기한 볼, 딸아이 가슴을 텅텅 치며

목 놓아 부르던 딸아이 이름,

야고야 야고 야고,

핏빛 물든 억새 밑동에 몰래 묻어야 했던 분홍 종소리,

오늘 예서 듣는다.

서울 복판 하늘공원 발그게 울려온다.


야만과 광기의 시대.

낮에는 군경, 밤에는 무장대에 쫒겨 산토끼 몰이를 당하던 불과 우리와 한 세대 위의 제주민들.

상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딸 아이 입을 틀어막다가 결국은 야고같은 딸을 숨지게 만든 어머니.

그 흔적이 이렇게 억새밭에 남았나 보다.

4.3 사건 광풍이 몰아친 1948년이 바로 무자년이었다.


후기: 이 글을 발간한 후 며칠이 지난 후였다.

        같이 근무하고 계시던 한 선생님이 나에게 넌지시 말씀하셨다.

        "그 변종태 시인있죠? 바로 내 아래 친남동생이예요"

       참 제주는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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