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사, ‘얼음새꽃’ 드디어 나오다.
비가 왔다. 겨울비치고는 너무 많이 왔다. 이 비가 눈으로 내렸다면 아주 볼만했을 텐데. 많이 아쉽다. 아마 한라산에는 이 비가 모두 눈으로 내렸으리라. 구름이 걷히면 장엄한 백록담이 하얀 눈을 뒤집어 쓰고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 비는 겨우 내 땅속에 잠들어 있던 미생물을 기지개 켜게 하고, 또 그 미생물은 다시 잠들어 있던 봄꽃을 자극하여 어서 싹을 틔우라고 재촉할 것이다. 그렇게 봄은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시각보다 예민한 것이 후각이다. 비가 오고 난 다음 숲 속에 들어가면 아련히 흙냄새를 맡을 수 있다. 죽어 있는 흙이 아니라 이제 막 미생물이 제 역할을 시작하여 생명의 싹을 틔우는 그러한 흙냄새이다. 그래서 봄은 우리의 눈으로 보기 전에 이미 코로 느끼기 시작한다.
얼음새꽃 봉오리(2020. 1. 19. 거문오름. 촬영: 신정미)
봄철 가장 일찍 피는 꽃은 흔히 ‘복수초’로 많이 알려진 ‘얼음새꽃’이다. 복수초는 일본식 이름이기 때문에 나는 그 대신 우리 이름 중 하나인 ‘얼음새꽃’으로 쓰려고 한다. 아마 얼음 사이로 핀다는 뜻일 것이다. 왜 우리 이름 중 하나인가 하면 지방마다 약간씩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그냥 ‘얼음꽃’, ‘눈색이꽃’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난 그 중에서 ‘얼음새꽃’이 제일 좋아 이 이름을 쓴다. 제주에서는 ‘눈벨르기꽃’이라고 부른다. 아마 ‘눈을 벌리고 나와 피는 꽃’이라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이 꽃은 눈이 두텁게 쌓여도 노란 꽃송이가 그 눈을 뚫고 나와 핀다. 북한에서는 ‘복풀’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역시 복(福)과 관련있는 듯 싶다.
내가 이 꽃을 처음으로 본 것은 아마 한 20년 전일 것이다. 어느 겨울인가 무척 눈이 많이 왔다. 같이 근무하시던 교장 선생님이 물장오리 오름을 가자고 선생님들을 꼬드겼다. 물장오리 오름은 지금은 탐방 금지 지역이지만 그때는 별로 단속을 안 할 때여서 가려면 갈 수 있었다. 발목이 푹푹 빠지는 등산로를 가다 하얀 눈 위에 핀 노란 꽃을 보았다. 처음엔 누가 버린 색종이로 접은 조화인가 싶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생화였다. 잎과 줄기는 눈 속에 파 묻혔는데 노란 꽃송이만 눈 위에 올라와 피어 있었다. 아무도 신비로운 그 꽃 이름을 몰랐다. 나도 무심히 지나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증이 커 졌다. 그러다 5-6년이 지나 대흘초등학교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학교 뒤 뜰에 그 꽃이 있는 것이었다. 그 꽃이 바로 ‘얼음새꽃’이었다. 너무 기뻐 몇 그루를 빌어다 마당에 심어 놓았는데 아직도 봄철에는 어김없이 피어 나를 기쁘게 해 준다.
얼음새꽃 꽃 봉오리(2020.1.19. 거문오름, 촬영:신정미)
가끔 어떤 분들은 이렇게 예쁜 꽃의 이름이 왜 ‘복수초’냐고 물어 오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복수’는 ‘어벤져스(Avenger)’가 아니라 복복(福)자에 목숨 수(壽)자이다. 그러니 ‘복 많이 받고 오래 사시라’는 뜻이다. 아마 일본식 한자일게다. 우리나라라면 ‘복수’가 아니라 ‘수복’이라고 할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설날 때 웃어른에게 세배갈 때는 이 꽃을 선물로 갖고 간다고 한다. 또 설날이면 벌써 핀다고 하여 원일초(元日草)라고 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올해는 설 1주일 전에 벌써 봉오리가 차가운 땅을 뚫고 올라왔다.
이 얼음새꽃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오랜 옛날 일본에 안개의 성에 아름다운 여신 구노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구노를 토룡의 신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토룡의 신을 좋아하지 않았던 구노는 결혼식 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아버지와 토룡의 신은 사방으로 찾아 헤매다가 며칠 만에 구노를 발견하였다. 화가 난 아버지는 구노를 한 포기 풀로 만들어 버렸다. 이듬해 이 풀에서는 구노와 같이 아름답고 가녀린 노란 꽃이 피어났다. 이 꽃이 바로 얼음새꽃이라고 한다.
얼음새꽃, 오전 10 경이어서 꽃 봉오리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2020. 1. 26.거문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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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이 꽃은 설련화(雪蓮花)라고 부른다. ‘눈 위에 핀 연꽃’이라는 뜻이다. 가끔 중국 무협영화나 소설에 보면 100년인가 1000년인가 오래 된 설련화 뿌리를 캐어 먹고 천하제일 고수가 된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오는데 이외로 이 꽃은 독초이다. 그러나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된다. 다만 전문가가 법제(法製) 하기에 따라 신경계·운동계의 각종 진통을 다스릴 수 있고, 강심제, 변비, 소변불통, 신경쇠약, 심계항진, 심기증, 심내막염, 심신허약, 심장병, 심장판막증, 이뇨, 진통, 창종 등에 효과가 있다고는 한다.
티베트의 산악지방에는 ‘노드바’라고 하는 희귀한 약초가 있다고 한다. 이 약초는 히말라야 산속 만년설 밑의 바위틈에서 돋아나 꽃을 피우는데 꽃이 필 무렵이면 식물 자체에서 뜨거운 열이 뿜어져 나와 3∼4미터나 쌓인 주변의 눈을 몽땅 녹여 버린다고 한다. ‘식물의 난로’라고나 할까. 이 풀은 신장병, 방광 질환 또는 몸이 붓거나 복수가 차는 병에 특효약으로, 티베트의 라마승들이 매우 귀하게 여겼는데 이‘노드바’가 바로 얼음새꽃과 같은 종이라고 한다.
얼음새꽃(촬영: 김정희. 2020.2.7)
나는 이 꽃을 소개하기 전에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우리나라 산야에 피는 야생화 중에서 제일 먼저 피는 꽃은 무엇인지 아세요?”
대부분 어른들은 대답을 잘 안 한다. 혹시나 틀리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다. 정답만 말해야 하고 틀린 답은 웃음거리가 되어 왔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그렇지 않다. 맞건 틀리건 서슴없이 말한다.
“개나리요!”
“매화요!”
당연 다 틀렸다. 질문하는 사람은 이렇게 얼른 맞힐 것은 애초 질문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이걸 알기 때문에 대답을 잘 안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피는 꽃은 복수초라고도 부르는 얼음새꽃입니다”라고 이 꽃에 대해 설명을 시작한다.
그런데 올해는 난감한 일이 생겼다. 얼음새꽃을 보기 전에 다른 꽃이 먼저 피었다. 시내 어느 초등학교에 도서관 봉사활동을 하고 연북로를 따라 집으로 걸어 오는 도중에 먼저 핀 꽃을 보았다. 내가 보니 매화였다. 아직 필 시기는 아닌데. 내가 잘못 알고 있나 싶어 사진을 찍고 해설사 단톡에 올렸다.
“이거 매화 맞죠? 미친 거 아녜요?”
그랬더니 몇 초도 안 되어 답이 올라왔다.
“미친 거 맞아요”
‘바보꽃’이다. 제철에 피지 않고 엉뚱한 시기에 피는 꽃을 ‘바보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바보라 부르지만 제철에 피는 꽃보다 이 바보꽃이 훨씬 더 반갑다. 세상에 바보들은 다 그렇다. 자신은 바보라 놀림 받지만 그렇게 하여 세상을 더 즐겁게 만든다. 꽃만 그리할까? 사람이 사는 세상도 다 마찬가지리라. 어쩌면 인류 사회의 발전도 똑똑한 사람보다는 바보들에 의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연북로에 피어있는 바보 매화(2020. 1. 17)
1월 26일에 해설에 이 꽃이 너무 반가워 장황하게 설명을 했다. 끝나자 중후하게 생긴 나이 지긋한 한 분이 조심스레 나에게 물었다.
“근데 이 꽃은 지금 추운 겨울이라 벌이나 나비가 없는데 어떻게 수정하나요?”
물론 지금은 나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벌은 활동이 적을 뿐 활동을 한다. 그래서 봄철 꽃은 화려한 색깔을 띤다. 먼 데서 벌들이 얼른 찾을 수 있게. 봄꽃은 대단히 바쁘다. 봄꽃은 키가 작기 때문에 다른 나무들이 싹을 틔우기 전에 빨리 수정을 마쳐야 한다. 만약 키 큰 나무들이 잎이 나오면 햇빛을 받을 수 없어 광합성을 못하게 된다. 그러니 피는 기간도 매우 짧다. 그래서 더욱 봄꽃은 우리에게 아쉽게 다가온다.
얼음새꽃(2020.2.14)
제주시인 양전형은 이 꽃을 이렇게 노래했다.
딱히
겨우내 그 비바리 기다리 건 아니다.
언뜻 그녀 생각
봄을 들입다 치올리는 그 생각에
몹쓸 것
냉가슴 앓으면 눌러 삭힐 일이지
가만가만 기어나와
쪼르르 둘러앉아 피고 말았네
꽃말은 슬픈 추억 다른 이름 얼음새꽃
사람아
난 모르겠네
동토에 핀 이 내 가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