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기 전에 다시 한번

세 번째 난임판정

by 가을 펭귄

교사시보 후에 다니던 학교에서 다시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5학년에서 8학년 아이들을 주로 가르칠 수 있고, 음악 특성화 학교여서 참 좋았는데 육아휴직에 들어가신 선생님을 대신해서 1년 반동 안만 있을 수 있는 학교였기에 돌아오시는 시점에 맞추어 떠나야 했다.

마침 교사시보를 함께 했던 믿음직한 동료가 있는 학교에 장기적으로 있을 수 있는 자리가 나서 지금 학교인 종합고등학교로 오게 되었다.


초등학생 고학년 나이의 어린아이들이 더 귀엽고 예쁜데, 다 큰 고등학생들만 가르치면 작은 아이들은 못 봐서 좀 아쉽다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을 만나보고 수업을 해보니 얘네들도 몸집만 크지 아직 속은 순수한 아이들이었다.


'큰 애들도 예쁘다... 괜히 걱정했네...^^!'


종합고등학교라는 특성상 김나지움과 직업 전문학교가 한 지붕 아래에 있어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도 가르치고, 유치원·보육기관 등에서 일하는 사회교육 전문직(Erzieher)을 준비하는 학생들도 가르친다. 대학입시용 음악 수업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예비 유치원·보육교사를 위한 음악 수업은 아이들에게 동요를 어떻게 가르치면 되는지, 동요반주를 어떻게 하는지 가르치는 실기위주의 음악교육 수업이라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덜 받고, 내가 잘하는 걸 하면 되는 편안한 수업이었다.


새로운 학교는 외곽에 있는 작은 도시의 학교인데 학생들이 잘 따라주고, 동료들도 다 친절하고 협조적이어서 멀지만 학교 다닐 맛이 났다. 수업의 경험이 쌓이면서 준비 요령도 생기고, 아이들을 다루는 데에도 자신감이 생기면서 점점 교사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힘들고 고된 날도 많았지만, 천성에 맞는 직업을 찾은 것 같은 만족감과 뿌듯함이 올라왔다.


모든 게 안정되면서, 그리고 내 나이 마흔이 되면서 다시 '아이 낳기'에 대해 생각해 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주변에 마흔둘에 초산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그보다 높은 나이는 본 적이 없었다.


'이러다 금방 마흔둘, 마흔셋... 뭐라도 시도해 보려면 이제 마지노선이다.'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해기전에 시험관 시술을 해볼까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인공수정도 가능성이 너무 적다지만 그래도 뭐든 다 해봐야 후회를 안 하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그때 즈음에 10년 동안 아이를 기다리던 후배부부와 11년 동안 아이를 기다리던 선배 부부가 우리처럼 오랫동안 자연임신을 시도하다가 인공수정 시도로 한방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오랜만에 득남을 하고 너무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자신의 편의와 이기주의로 의학을 이용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자연적인 방법으로 안될 때 도움을 받는 것이 왜 나쁜가?

'자연이 훼손되고 망가져갈 때 기술의 도움을 통해 다시 복원시키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수술을 통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회도 하느님이 허락하시는데, 난임에 의학에 도움을 받는 것이 왜 문제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 반대한다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당시의 문제였던 것이 시간이 흐른 후에는 문제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는 것도 있고...


더 늦기 전에 다시 한번 인공수정과 시험관의 의학적 시술과정, 교회의 입장과 생명 윤리적 문제점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서적과 인터넷 자료를 읽으며 공부를 하고 장단점을 나열해 보기 시작했다. 각종 체험담, 성공담, 실패담에서부터 시작해서 시험관 시술로 탄생한 아이들의 현재모습, 발달실태 등등도 찾아보았다.




시험관시술로 탄생한 건강하고 믿음이 깊은 쌍둥이 자매가 한 생명 운동가에게

"우리를 보세요. 시험관 시술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라고 질문했을 때, 그는 우선

"나는 당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신들을 축복합니다. 그렇지만 그 방법이 옳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던 인터뷰가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시험관 시술 과정에서 아이를 낳기 위해 아이(배아)를 버리는 역설이 많이 행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로 시험관 하는 사람들을 잘못되었다고 탓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인터뷰 중간에 이런 말을 했다.


"암 다음으로 인간이 정신적으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은 불임입니다. 이는 연구를 통해 입증된 사실이죠. 불임은 더 많은 우울증과 불안을 초래합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쉬운 해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정신을 집중하고 이성적으로 듣고 있었는데, 불임의 고통이 암 다음으로 크다는 그의 말에 눈물이 순식간 퀑 차오르고 감정이 복받쳤다.

그 오랜 세월 힘들어한 나의 고통,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은 감춰진 내 심한 정신적 고통이 데이터로도 나올 정도로 큰 것이라니 갑자기 이해받은 것 같아 정지버튼을 누르고 엉엉 울던 생각이 난다.


'불임의 고통이 그렇게 큰 것이었구나...'


주변에 또 많은 친구, 선배들이 뒤늦게 아이를 낳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나는 기뻐하며 또 아가옷을 열심히 선물했다. 뒤늦게 결혼한 언니들이 모두 시험관을 시도하다가 자연임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속담도 생각나고, 나도 그 정도로 간절히 시도는 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시도라도 해봐야 후회가 없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남편도 인공수정에 대해서는 설득이 되어서 난임센터에 상담 예약을 잡았다.


그때쯤 친한 성당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인공수정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그녀는 그날 화가 나서 뚜껑이 열린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자기 말만 하고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다. 교회의 입장만 얘기하며 훈계하는 말들을 쏟아내는데, 듣고 있자니 마음이 슬펐다.

내가 슬픈 진짜 원인은 임신이 안되어서라기보다 이해받지 못함, 질책, 비난, 아주 은밀한 부분까지 코치하려 드는 사람들이 주는 모욕감, 수치,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죄책감, 자기 비난, 자기 연민, 신부님들의 조언에 대한 실망, 수없는 희망에의 좌절, 나이 어린 엄마들이 훈계할 때 드는 굴욕감, 열등감 등이었다.

믿는 사람들이 해주는 '신앙적으로 더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말, 그들이 보내주는 성경구절, 이걸 매일 읽어라, 이 기도를 매일 해라 등등도 내가 뭘 잘못하고 있다는 질책처럼 여겨졌다...

자기가 원인을 다 안다는 듯이 이런저런 조언하는 것들이 불임 10년 차가 되자 더 이상 듣고 참고 견디기 어려워졌다.




시험관 시술에 대해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시술을 한 사람들에 대해 더 이해가 되고, 나도 진짜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변에 실제로 내가 아는 시험관 시술 경험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다들 신실하지만 시험관 성공해서 너무나 행복해하는데,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으로 낳은 아기들이 정말 이상한지, 교회가 말하는 '죄'를 통해 아기를 낳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묻고 싶었다.

그래서 오랜 생명윤리적 고민 끝에 난임휴가까지 내고, 여러 번의 시험관 시술로 득녀를 한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는 아이가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오랫동안 우울해 있던 언니의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밝아져 있었다.

언니는 아이를 낳고 나서 삶이 완전 달라졌다고,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부부사이도 더 좋아졌다고 했다.

그리고 언니도 시험관 수정 전에는 여러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막상 아기를 낳아 받으면 "이건 하느님이 주실 수밖에 없는 거다."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언니의 설명을 들으니 '아 시험관 진짜 괜찮구나.'라는 생각이 더욱더 들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었다.

시험관 시술당시 언니의 나이와 배아이식의 성공률을 고려해 많이 얼려두었다던 그 배아들은 어떻게 되었는가였다. 보통 보관 기간이 5년이라고 하는데, 필요한 만큼만 채취해서 배아를 시켰는지, 아직 많이 남아있는지 등등...


'아... 그거?!... 아이구 그땐 시험관 성공 못하면 또 쓰려고 보관했지만 지금 이 나이에 또 어떻게 더 낳아...지금 얘 하나 키우기도 벅차다... 배아를 어떻게 해야 하는 죄의식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사람이 어떻게 완벽하게 사냐...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폐기했어~~."


아... 그렇구나...


이해는 간다. 언니의 마음도... 사람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도... 하느님의 자비도 믿는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언니의 깨 밝은 목소리가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귓전에 울리는 데 뭔가 마음이 쎄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것인가... 난임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탓하고 싶진 않다.

여러 가지 신학적 윤리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나도 그걸 마지막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우울하던 언니가 그렇게 행복하다니 진심으로 다행이다 생각한다.

사람이란 부족한 존재라는 것도 알고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다시 생각에 잠겼다.


냉동하는 거 까진 그렇다 쳤다.

그런데 내 나이가 젊어서 여러 개의 배아를 냉동하고 그걸 다 쓸 수 있는 나이면 모르는데

그걸 버리게 되면 아이를 낳기 위해 아이를 버리는 역설이 되는데 어쩌지?

배아를 정말 자궁에 모두 이식할 정도의 숫자만 난임센터와 잘 얘기해서 할 수도 있다지만

안 그래도 정자수가 너무 적어 성공률이 낮은 우리에게 골라서 배아를 성공시키는다는 게 가능할까?

둘에게 신체적으로도 고통이 주어질 그 난자 정자 체취 과정들을 막상 시작하고 나면

이왕이면 한 번에 배아를 많이 확보하고 싶지, 그 유혹을 다 이겨내고 매번 최대 두세 개의 배아만 만들어내도록 그 힘든 과정을 반복할 수 있을까?

만약에 많은 배아가 만들어져서 그걸 한 번에 내 자궁에 이식하게 되어, 쌍둥이도 아니고 네다섯 다둥이를 낳게 된다면 안 그래도 몸이 약한 내가 그걸 다 버텨낼 수 있을까?




그러던 중에 '슬라브코 바르바리치'라는 신부님에 대해 알게 되었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 마약 중독에 빠진 청소년들을 도와주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과 평화를 준 거룩한 사제...

어쩌면 하느님께서 나에게도 영혼구업의 사업을 위한 큰 계획 안에, 그 사랑 안에 자녀를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신부님 만큼은 아니더라고 일반인보다는 훨씬 많은 열정과 재능을 주셨는데 내가 그 에너지를 다 쓰지 못하고, 좌절 속에 나태 속에 묶여 있어서 슬픈 건 아닐까?

나는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기보다는 더 많은 아이들을 돌볼 사명을 받은 것은 아닐까?

리타성녀의 그런 강한 전구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안 주시는 때에는 분명히 뜻이 있을 거야...

그게 나의 영혼에 더 유익하기 때문에...


당장 고아원에 가서 봉사하지는 못하지만 윗집 로레 아주머니의 여동생의 방문으로 중병에 걸린 그분께 우리 부부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침마다 그리고 가끔은 낮에 방문해서 도왔다. 얘기를 나누고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가까운 이웃 안에서 봉사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해 주심에 무척 감사했다.


여태까지 이웃이라도 파킨슨 병 때문에 건강하지 못하는 것 외에는 모르고 지냈지만, 날마다 대화를 나누면서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답고 섬세한 영혼인지 느낄 수 있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관철할 줄 아는 사람, 지성인이면서도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 취급 당한 것을 굳이 해명하려 애쓰지 않고, 엄청난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를 할 수 있으면서도 자랑하지 않고 겸손한 사람.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서적들을 서재에 소유하고 아침마다 클래식 방송을 들으며 젊은 시절 동독정부에 저항하는 글들을 출판했던 잡지사 기획부장. 청소년, 사회심리를 연구한 교육자. 아이들보단 돈과 밥줄만 생각하는 동료들과 함께 일할 수 없다며 두 번이나 직장을 때려치운, 돈보다 이상을 따라 살았던 용기 있는 여자. 이혼 후 장애가 있는 아들을 키우며, 자기 자신도 파킨슨 병을 앓으며 힘든 세월을 혼자 버텨왔을... 이상한 아들을 둔 어미라는 오해와 누명, 불명예의 고통까지 견디며 살아온 사람... 그래도 덕을 많이 베풀었는지 꾸준히 찾아오는 친구들이 꽤 있는 복 받은 사람... 이제는 병이 너무 많이 진행되어 혼자 화장실 가기도 어렵고, 의사 말로 얼마 안 남았다고 하는 많이 아픈 아주머니... 신앙이 없기에... 자신의 고통을 끝까지 곁에서 함께해 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안락사를 원하고 있는 로레 아주머니...


그동안 쌓인 것들을 다 놓고 가는 게 아쉽진 않은지... 죽음이 두렵진 않은지... 너무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이웃을 알게 되어 나와 남편이 얼마나 기쁜지 얘기하며 우리는 매일 올 테니까 오래 사시라고 했을 때 감동하셨는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셨다. 죽음보다는 사실 그런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했던 것 아닐까?

나도 넘 눈물이 났다.


아들이 저녁에 동화를 읽어줄 때가 제일 좋다고 하시며 특이한 중동문화의 이야기책을 보여주셨다. 그림만 보아도 이야기를 다 설명하실 수 있을 정도로 머리는 맑으시고 명석하시다. 본인은 다 알지만 아들은 이야기를 모르니까 아들도 좋아한다 했다.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듣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냐고 하니까,

"Ich höre, WIE Hans das vorliest..." (나는 한스가 '어떻게' 읽는지를 들어요.)라고 하시며 행복하고 수줍은듯한 미소를 지으셨다.

아...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크고 맑은 눈이...

그 마음이, 영혼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아름다움에 감동되어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도 뇌의 질병을 겪었다 보니 그분이 하는 행동들... 가끔 말하기가 힘들고... 행동이나 시야... 에너지 등이 가끔 느려지는 그 현상들... 특히 스트레스가 많을 때의 그 반응들이 어떤 상태인지 넘 이해가 잘 되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2021년 1월. 코로나로 온 세상이 록 다운되어 학교수업도 집에서 하던 그 시절, 나는 한편으론 비디오로 수업을 제작하기 위해 영상편집 기술을 배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시험관과, 인공수정에 대해 고민하고, 그러다 또 모든 소망을 내려놓고 이웃돌보기에 열중하며 시간을 보냈다.




록다운이어서 가뜩이나 잡기 어려운 병원 예약이 더 늦어져서, 여러 검사에 대한 결과가 2월 말에나 나왔다. 일단 인공수정을 받기 위해 잡아놓은 예약과 검사 결과였다. 검사는 병원에 가서 했지만 결과에 대한 면담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남편의 정자수 체취 결과는 변함없이 최악이었다.

나 역시 난자 나이가 내 나이에 비해 노후되어 있고, 여러 가지 상태가 전에 비해 좋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다.

의사 선생님께서 이런 상태로는 인공수정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막 하고 계실 때 갑자기 로레 아주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쓰러졌다고 도와달라는 전화였다.

나와 남편은 의사 선생님께 급한 일이 생겼다고 말씀드린 후, 한시의 망설임도 없이 쏜살같이 위층으로 뛰어갔다. 아주머니의 여동생이 우리에게 열쇠를 맡겨놓아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머리에 피를 흘리고 계셨다. 다행히 심한 출혈은 아니었지만 아주머니는 충격으로 일어서지 못하고 몸을 떨고 계셨다. 아줌마를 진정시켜 드리며 얼른 신고를 했고, 구조대원과 아들이 아주 빨리 와서 우리는 다시 비디오 컨퍼런스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시험관 시술이 아니면 우리의 임신은 불가능할 거라는 말씀만 하셨다. 인공수정은 해볼 필요도 없이 확률 제로이고, 시험관 시술도 정자 채취가 가능하긴 한 경우에, 보통 기술이 아닌 가장 최근 기술의 가장 복잡한 과정으로만 가능한데, 그걸로 임신이 될 확률은 20%, 임신이 되었을 경우 정말 출산까지 성공할 확률은 25% 정도로 매우 낮다고 했다.


시험관 시술에 대해 마음이 많이 열려있는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인공수정은 불가능하다는 소견, 시험관 시술의 확률도 그렇게나 낮다는 사실, 그리고 하필 그 중요한 결과를 듣는 바로 그 타이밍에 로레아주머니가 쓰러져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신 그 사건은 우리를 여러 가지로 멍하게 만들었다.


선생님이 시험관 시술을 하려면 어디에 연락하면 되고, 어떤 절차를 밝아야 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나나 남편이나 겉으로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우리의 사명은 아이 낳는 게 아니라 남을 도우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편도 그동안 표현은 잘 안 했지만 정자가 하나도 없다는 결과가 또 한 번 충격적이었는지, 정상적으로 아빠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오히려 나보다 더 실망한 것 같았다. 선생님께 아직은 우리가 여러 상황상 좀 얼떨떨해서 나중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시험관 시술용 검사 의뢰서를 받은 후 면담에서 나왔다.


시험관 시술을 하는 사람들 다 이해하고, 나도 별 수 없는 인간이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올라오는데, 아이를 못 낳는 것이 나의 운명이었는지,

우리의 몸과 영 상태가 그런 것을 하느님의 섭리와 선하고 지극히 좋으신 뜻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겨서 그런 건지,

몸이 그리로 움직이지 않았다.

전화만 한 통하면 시험관 시술 예약을 잡을 수 있는데 손가락이 그리로 이동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그냥 두고 보았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우리에게 아이는 없을 거라는 것.

이것이 불임선고라는 것.

이제는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는 것.


우리의 사명은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에 있다는 것.

그냥 알 것 같았다.

이것이 우리가 안고 가야 할 달콤한 십자가라는 것을.


우리는 처음 난임선고를 받았던 날처럼 부둥켜안고 울었다.


아무 말도 없이 많이 울었다.







이전 12화기적적인 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