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을 받아들임

축복의 가족여행과 학교생활

by 가을 펭귄

많이 울고, 많은 시간이 흐르고, 많은 깨달음을 얻고 나니 마음이 많이 정리되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전구 해준다는 리타성녀께도, 왜 내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섭섭하기보다

나와 긴밀히 연결되어 내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친근함과 고마움이 있었다.

왜 그럴까? 이건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니 신비라고 해 두어야겠다.


생각해 보니 그럴만한 일들이 있기도 했다. 그런 일들과 상관없이도 계속 좋았지만...


어느 날 저녁에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집에 가는 길에, 트렁크를 들고 낑낑대며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시는 리타 아주머니를 도와드리게 되었다. 플랫폼까지 동행하면서도, 그때까지는 전혀 생각 못했는데 한참 타고 가면서 갑자기 그날 아침에 리타성녀께 기도드린 게 생각났다.


'리타성녀님, 저는 당신이 참 좋아요, 제가 아이를 못 낳아도요. 당신도 저를 좋아하세요? 그럼 제 기도를 듣고 있다는 표징을 하나 보여주실래요?'


리타라는 단어를 어디서 보게 된다거나... 마음의 울림이 있다거나... 그런 걸 생각했었는데 그날 저녁에 몇 개월 동안 못 보았던 리타아주머니를 만나 도와드리게 될 줄은 생각을 못했었다.


표징을 받았다.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이것은 내게 하느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 내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증거가 되었다.


더욱더 의탁하는 마음이 생겼다.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가고 나서 찾아온 정적과 고요처럼 내 마음은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점점 더 평온해졌다.


이 모든 것이 '운명'임을 알았으니,

'이제 우리 삶에 자식은 없다.' 생각하고 차분한 맘으로

안정된 맘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작은 아파트도 둘이 살기엔 너무나 충분하고 아름답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더 넓혀서 이사 가야 할 필요도 없고,

여기서 앞으로 쭉 살면 된다.

'이사가 얼마나 힘든데 안 가도 되니 얼마나 편해...!'




2022년 여름, 동생이 6년 만에 온 가족과 함께 독일을 방문해 주었다.

내가 독일로 유학을 나오고, 동생은 남편과 인도네시아로 이민을 가고 모두 바쁘게 살면서, 우리 가족은 다 함께 모이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부모님이 독일로 오시면서 나는 부모님과 가까이 지냈지만 동생은 아이들이 어려서 다 같이 나오기도 어려웠고, 동생이 셋째를 낳아 우리 아홉 명이 다 같이 모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해 여름을 뜻깊게 보내려고 우리 부부는 큰 가족여행을 기획하고, 동생내외와 아이 셋, 우리 부모님이 함께 지낼 수 있는 바다가 바로보이는 숙소를 불가리아의 황금해변가에 잡았다.


물놀이를 하면서 부모님이 좋아서 활짝 웃으시는 모습도 보고 조카들의 다정한 포옹을 받으며,

사랑하는 동생과 얼굴을 비비며,

처갓집 식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고

우리가 좋다니 자기네도 좋다며 서글서글하게 잘 어울리는

남편과 제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모래가 금빛으로 고운 해변에서 바다와 하늘을 보며 푹 쉬었다.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항상 경계하는 고양이 같은 독일 아이들 속에 긴장하고 있었는데, 조카들은 강아지처럼 푸근하게, 나를 자기 엄마처럼 좋아해 주고 안아주고 졸졸 따라다녔다.


그 여름은 내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큰 치유의 시간이었고 오래 쌓인 긴장을 풀어주었다.


귀엽고 끼가 많은 동생과 착하고 건강한 제부를 닮아 세 아이들은 우리 앞에서 여러 곡의 노래를 신나게 뽑아대고 춤을 추었다.

아빠는 껄껄 웃으시며

"천국이 따로 없구나...!" 하셨다. 그 목소리와 표정에서 행복이 묻어났다.


맞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오래 떨어져 있던 우리가 한자리에 다 모여 함박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모두가 화해하고, 조카들을 통해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저녁마다 모여서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다.


한국에서는 가족끼리 바닷가 휴가도 제대로 가보지 못했던 우리가 외국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이렇게 함께하고 있었다.


'이런 조카들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이 아이들을 내 아이처럼 사랑하면 되지.'


그렇게 나는 나의 아이 없음을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처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나이가 들고 아이가 없은지도 너무 오래되다 보니 사람들도 눈치를 챘는지 조심스러웠는지, 이젠 어딜 가도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그래서 부활이나 성탄같이 큰 축일에는 남편과 함께 다시 한인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내가 다시 안 나올까 봐 조심스러웠는지, 이젠 내 나이가 많아 보여 어르신들도 포기를 하셨는지 오지랖 넘치는 질문들을 더 이상 하지 않으셨다.


그때부턴 나도 언제가 가임기인지 신경 쓰지 않기 시작했다.

매일 미사에 다니고 기도와 음악으로 봉사생활에 충실하며

'수녀원에 가려던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제일 행복할 것을 하느님이 이미 다 아시고 이렇게 살게 아이를 안 주셨구나' 싶어 마음이 편해졌고,

교사라는 직업을 나의 소명으로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잔잔한 마음을 '훅' 치고 들어오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었다.

바로 보육교사 수업현장이었다.

처음 만나는 날이면 학생들은 거의 빠짐없이 물었다

"선생님, 아기 있으세요?"


다른 수업은 공부를 더 하면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내가 현장에서 실습 중인 학생들, 혹은 이미 엄마인 학생들 앞에서 유아발달에 맞는 음악교육을 가르치는 일은 공부를 더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알아서 해라"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좋은 롤모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유치원 교사가 된 것처럼 수업시연을 했다. 용기를 내어 아이들 앞에서 동요를 가르치는 방법 그대로,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고맙다며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 노래는 3-4세에게는 안 맞아요."

"우리 아이들은 더 어려운 노래도 잘 따라 불러요."라는 비판도 따라왔다.


내가 보기엔 아이들의 발달 단계에 꼭 맞는 교수법이었다. 그런데 '그건 아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내가 아이가 없어서 몰랐구나...'라는 자격지심이 고개를 들었다.

내 아킬레스건이 건드려지는 순간이었다.


신부님과의 면담에서 내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내 영적지도 신부님은 우리 동네 성당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가서 영유아를 대상으로 '음악조기교육'봉사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내가 소개한 교수방법이 틀렸는지, 학생들이 괜히 딴지를 거는 건지 확인할 수도 있고, 만약 틀렸다면 여러 나이의 아이들을 보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도 되니, 돈 받지 말고 가서 몇 개월 봉사해 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수업이 없는 금요일마다 성당 병설 유치원에서 음악 교육 봉사를 했다.


유치원 봉사를 가는 날이면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했다. 연령에 맞는 소리 놀이와 율동, 노래를 지도하며 현장경험을 쌓았다.

아이들의 연령별 특성을 배우고자 하는 목표로 자청한 봉사였다. 원장선생님의 허락과 동료 선생님들의 도움 덕분에 나는 음악교육 지도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옷을 갈아입히고 놀이터에 놀러 가고 재우는 일까지 모두 함께 할 수 있었다.

모든 나이대의 아이들이 다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내가 가장 좋아한 시간은 11시 무렵, 영아들에게 이른 점심을 먹이고 재우는 순간이었다. 자장가를 부르고,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틀고 커튼을 치고 방을 어둡게 만든 뒤 행복하게 아기들을 안고 있었다. 아이들을 품에 안고 재워주는 시간은 정말 꿈같았다.

선생님들은 내가 잘하고 있다며 칭찬해 주셨다. 그 마음이 따뜻하고 고마웠고, 나는 그 모든 일을 안 울고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해내고 있었다.


'이게 웬 횡재야... 이런 직업을 가져서 이런 것도 맘껏 해보네...'

혼자 웃음이 났다.


독일에서 교사가 되기 위해 교사시보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중고등학생만 가르칠 줄 알았다.

그런데 직업학교의 성인학생들도 가르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성인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영유아부터 초등 아이들까지 돌보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그럴 리가.

나는 그분의 보이지 않는 따뜻한 섭리와 신비 속에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들 키를 봐도 나이가 가늠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언제 걷고 언제 말을 하고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학생들이 무언가 지적하면 금세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7개월동안 매주 그렇게 봉사를 하고 나니 아기들의 나이를 얼추 맞출 수 있는 감이 생겼다.


'나도 이제 어느 정도 알아.'

조용히 자신감이 생겼다.


직접 아주 작은 아이들과 음악활동을 해보니, 학생들의 비판과는 달리

내가 가르치던 레퍼토리가 그 나이에 잘 맞는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미 수십 년간 아이들과 함께해 오신 전문가 선생님들의 확증도 받았다.

특히 3-4세 아이들은 '슈비두아춤'을 무척 좋아했다.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슈비두아!'하고 달려왔다.

어느새 나는 유치원에서 '슈비두아선생님'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실습을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니 나의 가르침에 권위가 생겼다.

더이상 레퍼토리를 두고도 의심받지 않았다.


그 예쁜 영유아들을 내가 항상 만날 수는 없지만 유치원교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좋은 음악을 전한다는 보람이 나를 기쁘게 했다.

학생들이 '슈비두아'를 유치원에서 실습해 볼 수 있도록 직접 동영상도 만들었다. 그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쳐봤더니 "정말 좋아했어요." 라고 말해줄때면 참 뿌듯했다.




이제 유모차 끄는 엄마들을 봐도, 만삭이 된 임산부들을 봐도 많이 흔들리지 않는 내공이 생겼다.


이제 애달픈 눈물이 쏟아지지가 않는다.

'아이고... 고생이겠다...

행복하기도 하지만 그 책임감이 얼마나 무거울꼬...

나는 자유의 몸이지.'

하고 웃을 여유도 생겼다.


그래도 쬐끔은 아직도 부럽고 아프다.

항상은 아니고, 아주 가끔.

하지만 눈물이 흐르지는 않는다.

그저 조금 고였다가 사라지는 정도다.


그 작은 물기도 당장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이 쌓여있으면 쏙 들어간다.

예전엔 학교 선생님들이 이렇게 할 일이 많은 줄 몰랐다. 아무리 연차가 쌓여도 수업준비는 오래 걸리고, 학교업무로 이메일과 아이들과 주고받는 메신저 연락들은 하루에 십 수통이다. 그 모든 연락에 짧더라도 정성껏 답하다 보면 시간이 참 많이 걸린다. 집에 자기 애까지 키우는 교사들은 이 모든걸 어떻게 다 해내는지 놀랍다.


예전엔 가정교사들은 아이를 갖지 않는 조건으로 채용했다고 한다. 교사는 거의 수녀처럼 개인의 삶을 내려놓아야하는 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지금도 우리 학교에는 아이가 없는 좋은 선생님들이 적지 않다. 이 일이 워낙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해서 아이를 갖기 쉽지 않은건지, 혹은 각자의 사정이 있는건지, 사생활이라 조심스러워 묻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자식이 없어도 사명감을 갖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이제는 사람들이 아이 없냐고 물어봐도 살 떨리지 않는다.


"Wir sind ungewollt kinderlos."

저희는 비자발적 무자녀예요.


나는 그렇게 짧게 대답한다.

그리고 더 말하지 않는다.


그 말의 뜻을 상대가 잠시 생각하도록 둔다.


나는 담담하고 행복하다.


세월이 주는 힘, 섭리와 신비, 내 삶에 대한 이해와 감사로 나는 내 불임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작은 말 한마디에도 크게 상처받고 움추러들며 울던 내가 많이 컸다...



이 정도면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여태까지 제 긴 글들을 조용히 읽고 응원해 주신 분들께 작은 선물을 남깁니다.♡

본문에 언급한 보육교사들을 위해 만든 "슈비두아 춤" 동영상입니다.

(클릭하시면 가을펭귄의 얼굴이 나온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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